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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1~9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들을 위한 모금에 대해서 입니다. 여러분도 갈라티아의 에클레시아들에게 내가 바로잡은 대로 그렇게 하십시오. 안식 후 첫 날, 여러분 각각은 모두 여분으로 얻은 것을 따로 모아두십시오. 내가 갔을 때 모금들을 그때서야 깨닫기 않도록 말입니다. 내가 여러분 곁에 있을 때, 누구든 여러분이 인정한 사람들을, 여러분의 거저 내놓은 것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보내는 공식 서한을 쓸 것입니다.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다면, 나와 함께 갈 것입니다.


  드디어 마지막 장으로 들어왔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에서 돈을 모금해서, 유대인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를 돕고자 합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고린도 에클레시아 뿐만 아니라 갈라티아 지방에 있는 에클레시아들도 참여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도착했을 때, 이 일을 그때 가서야 하지 말고, 미리 준비해달라고 말합니다.(고개는 끄덕이지만 정작 준비가 되지 않는 이런 경우가 당시에도 비일비재했나 봅니다)

  이 예루살렘 에클레시아에 대한 내용이 사도행전 1,2장에 나옵니다. 가롯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뽑고, 숨님을 받아 불같은 혀로 온세계 말을 하던 사람들이 바로 예루살렘 에클레시아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지금 힘겨운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온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썼습니다. 즉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예루살렘에 있는 가족들을 돕는 구제 수준이 아니라, 더 큰 차원의 목적이 있습니다. 에클레시아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실제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구성된 에클레시아들이, 유대인으로 구성된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를 돕습니다. 거저 돕습니다. 메시아 예수의 화해와 하나됨이 실제로 구현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보다 바울의 서신서가 먼저 쓰였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주일(안식 후 첫 날)'에 대한 가장 이른 언급입니다.

  게다가 거금을 가지고 이동할 때, 당시는 노상강도들도 많았으므로,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몇몇 사람들을 보내던지, 혹은 바울 자신도 동행할 것을 계획했습니다.


  나는 마케도니아를 지날 때면 언제든 여러분에게 가겠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곁에 잠시 머물거나 혹은 겨울을 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내가 가려는 어디든 보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을 잠깐 보길 원치 않기에, 여러분과 오랜 시간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허락 하신다면 말입니다. 나는 오순절까지 에페소스에 머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크고 활기찬 문이 내게 열렸기 때문인데, 반대하는 이들 또한 많습니다.


  루트는 에페소스에서 체류하면서, 마케도니아를 경유하는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 계획이 어찌 진행되었는지가 고린도후서 8,9장에 등장합니다. 계획은 연기되고, 바울은 더 큰 어려움을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 이러한 일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페소스에서 만난 사람들을 '문'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크고 활기찬 문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날 것을 기대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물론 반대하는 이들이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6:10~14


  디모데가 가거든, 그가 여러분을 두려워하게 되지 않도록 보살펴주십시오. 그도 나처럼 주의 일을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를 없이 여겨선 안됩니다. 그가 내게 올 수 있도록 그를 평화 안에서 보내주십시오. 왜냐하면 여기 가족들과 함께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오랜 시간 여행을 함께한 파트너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겁쟁이일리는 없을텐데 말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분열하고 있던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이 날카로워졌고, 그로 인해 바울이 보낸 디모데를 해꼬지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 형제 아볼로에 대해서 입니다. 나는 그가 다른 가족들과 함께 여러분에게 가도록 곁에서 여러 번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지금 그가 가는 것이 뜻이 아니었습니다. 적절한 때가 되면 갈 것입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원하던 사역자는 디모데가 아니라 아볼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신실함으로 곧게 서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강해지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것이 인(仁)으로 되게 하십시오!


  이 마지막 문장들이, 어떠한 지도자가 오느냐보다 더 중요합니다. 결국 우리는 '독립'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없이도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독립'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께 기대어, 모든 일에 인으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바라던 선생을 보내주지 않았느냐고 투정하는 것은, 아직 독립할줄 모르는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일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6:15~24


  그리고 나는 여러분 곁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스테파나스의 집안을 압니다. 그들은 아카이아 지역의 첫 열매였고, 그들은 거룩한 이들을 디아코노스 하기 위해 자기 자신들을 바로 잡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이들과 그들과 함께 일하며 고생하는 모든 이들, 아래 놓여야 합니다. 나는 스테파나스와 포르투나토스와 아카이코스의 '재림'에 기뻤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가난을 넘치게 채워주었습니다. 그들은 내 숨과 여러분의 숨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철저히 알아주십시오.


  몇 가지 익숙한 단어들이 보입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하시듯, 그들을 곁에서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테파나스 집안을 언급하는데, 그들은 '디아코노스'를 위해 자기 자신들을 '질서있게 바로 잡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과 같이 고린도 에클레시아도 '아래 놓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질서, 바로잡음, 아래놓임. 이것은 굴종을 뜻하는 단어들이 아니라, 제자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늘에 오르신 메시아 예수 아래, 존재가 참되도록 하는 제자리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스테파나스와 포르투나토스와 아카이코스가 '재림(파루시아)'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개그가 아니라면, 일상적으로 이 '파루시아'라는 말을 썼다는 증거가 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파루시아라는 말은 문제로 가득한 식민지에 황제가 방문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마치 메시아 예수께서 하실 일을 미리 하는 사람처럼, '가난'이라는 문제가 있었던 고린도 에클레시아에 '왕으로서 찾아가서(재림)' 그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아시아의 에클레시아들이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아퀼라스와 브리스킬라가, 그 집에서 모이는 에클레시아와 함께 주 안에서 특별히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모든 가족이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입맞춤으로 서로 환영하십시오.


  바울과 함께 하는 익숙한 이름들이 보입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18장과 로마서 16장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인사말을 덧붙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우호관계로 여기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마란 아타!

  주 예수의 거저주심이 여러분과 함께.
  나의 인(仁)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우호관계'로 풀은 말은 '필레오'입니다. '아가페'는 아닙니다. 우정, 우호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메시아 예수를 자신과 우호관계라 여기지 않는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바울은 예수께서 쓰셨고, 에클레시아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아람어 문장을 번역 없이 그대로 기록합니다. '마란 아타(주여, 심판을 위해 오시옵소서!)'

  그간 애 많이 쓰셨습니다. 저 역시 바울과 같은 인사로 고린도전서 연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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