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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1~40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신경 써서 봐야 할 것은 바로 '집 짓기'입니다. 바울은 이미 3장에서 이 집짓기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거저주심을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처럼 토대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그 위에 건물을 짓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그 위에 어떻게 지을지 주의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미 놓은 것 외에 다른 토대를 놓을 수 없으니, 그 토대는 바로 메시아 예수이십니다!


  만일 누가 이 토대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물을 지으면, 모든 사람이 한 일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들의 업적을 밝히되, 불 가운데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은 모든 사람이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 검증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운 업적이 검증을 이겨내면, 그들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업적이 불에 타 버리면, 그들은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구원을 얻겠지만, 마치 불을 통과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집)짓기'라고 번역한 단어는 '오이코도메'입니다. 말 그대로 집을 짓는 것인데, 이는 자신을 '부풀리는' 교만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집을 짓는 일은 하나님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세계라는 집을 지으셨고, 그 집을 타자인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타자를 위한 공간을 내어줌.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였습니다. 이 일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그래서 그이의 하시는 일이 '디아코노스'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세계는 우리를 위한 공간이자, 우리와 숨으로 교제하시는 공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으나, 그 집 안에서 가족이 되었고, 집주인은 한 가족된 이들을 위해서 경이로운 건물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는 바로 이러한 집을 짓습니다. 서로를 위한 공간 창출. 바울이 방언으로 획일화된 부풀려진 지혜를 비판하는 이유는 근원적입니다. 오이코도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방언 자체가 문제라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해석되지 않은 방언'입니다. 오이코도메는 타인을 위한 것인데, 해석되지 않을 때 그 방언은 에클레시아 안에서 그저 부풀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12장에서 드러난 문제가 13장의 '인'을 지나 이제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할 차례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먼저 1~19절은 "신실한 이들에게 방언을 어찌 사용해야 할지를 밝힐 것이고, 20~25절은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방언이 무엇인지를 말할 것입니다.

1) 신실한 이들과 집 지을 수 있게 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4:1~5


  인(仁)을 추구하십시오. 숨에 속한 것들을 열망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 위해 말입니다. 왜냐하면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누구도 (이해하며) 들을 수 없는데, 그는 숨을 통해 뮈스테리아를 말합니다. 그런데 예언하는 이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곁에서 속삭여주며, 이야기 곁으로 초대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집)짓고,  예언하는 사람이 에클레시아를 (집) 짓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이 모두 방언으로 말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모두 예언한다면 더욱 기쁘겠습니다. 예언하는 이가 방언으로 말하는 이보다 더 큽니다, 만일 그가 에클레시아를 (집)짓기 위해 해석 없이 한다면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인을 추구하십시오"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13장의 서정시를 보기 전에, 같은 동사를 만난 바 있습니다. 바로 12장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여러분은 더 큰 카리스마들을 추구하십시오!"

  12장에서 "더 큰 카리스마"라고 말한 것이, 14장에서는 "인(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카리스마를 인이 대체해버린 것이 아닙니다. 카리스마는 카리스마대로 있지만, 그것의 사용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들을 부풀리고 분열하기 위해 사용된 카리스마라면, 이제는 다릅니다. '인을 통해 사용된 카리스마'는 기이한 시대(현시대와 오는시대가 중첩된)를 관통하는 에클레시아만이 누리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13장에서 확인한 그대로 입니다. 그리고 '인을 통한 카리스마'는 '오이코도메'합니다. 집 짓습니다.

  집 짓는다는 은유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이 집은 나만 살기 위해 짓는 집이 아닙니다. 그런데 방언은 나만 살기 위한 집입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말하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뱉지만, 숨으로 뮈스테리아를 말하며 하나님과 소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뒤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에클레시아보다 더 많은 방언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함께 살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타인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소통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자기 자신을 위할 수는 있어도, 타인을 위한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기도는 에클레시아 모임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타인을 위한 것은 예언입니다. 예언은 타인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고,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듯 사람을 격려할 수 있고, 위대한 성경 이야기 안으로 사람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이야기 곁으로 초대한다"고 번역한 말은, '파라.뮈뛰아'라는 말인데, '파라'는 '곁', '뮈뛰아'는 myth. '신화'라고 으레 번역하지만 본래 '이야기'입니다. 즉, 이야기 곁에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위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참된 위로가 되는 것은, 그저 뜻없이 던지는 "힘내"가 아닙니다. 어머니가 중병에 걸리셨는데, 그 사람에게 던지는 "힘내"라는 말은 조금도 힘을 낼 수 있게 하지 못합니다. 실제의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뇌사상태에 빠진 어머니에게서 뇌파가 발견 되었다던지, 투석기를 돌리던 신장이 다시 제기능을 하게 되었던지 하는 진짜 이야기만이 절망한 자에게 참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언'은 참 이야기인 '메시아 예수 안에서 이뤄진 토라 이야기' 곁으로 사람을 초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바로 거기에 참 위로가 있습니다. 죽는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 빈 무덤에서 발생한 충격적인 사건 때문에, 온 우주가 새롭게 될 것이라는 역사적이면서도 우주적인 희망에 관한 이야기.

  그렇다고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예언이 방언보다 큰 카리스마인 것은 아닙니다. 카리스마들은 각각의 독창성을 갖고서 다양성을 이룹니다.(그러면서도 하나됩니다.) 다만 오늘 본문의 핵심은 에클레시아가 모였을 때의 집 짓기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봤을 때, 방언은 개인적으로 사용할 것이지, 집 짓기에는 별 도움이 못됩니다. 그러나 예언은 결정적입니다.

고린도전서 14:6~12


  그런데 지금, 내 가족 여러분, 만일 내가 여러분에게 방언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간다면, 어찌 여러분을 이롭게 하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에게 내가 계시로, 혹은 깨달음으로, 혹은 예언으로, 혹은 가르침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호흡없는 것들이 소리 내는 것과 같은데, 피리나 하프가 만일 분명한 음을 내지 않으면, 어찌 그 부는 것과 치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즉 만일 나팔이 분명치 않은 소리를 낸다면, 누가 전투를 위해 준비를 갖추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찾아가서 온통 방언으로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고 말합니다. 이 유쾌한 상상 속에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진리를 발견합니다. 전혀 이로움이 없습니다. 에클레시아를 새창조의 공간으로 지어가는 일에 필요한 것은 이해와 소통입니다. 따라서 계시, 깨달음, 예언, 가르침과 같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바울이 방언을 자신들보다 못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덜 영적이며, 자신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까지 생각합니다.('그런데 지금'이라는 말은,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숨에 속한 사람'을 잘못 이해한 것이지요. 숨에 속한 사람은 알아듣게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세 가지 예시를 들어 설명합니다. 1) 악기들 2) 나팔 소리 3) 외국어. 분명한 음을 낼 줄 모르는 관악기를 "호흡없는"으로 표현한다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타인과 소통할 줄 모르는 표현은, 너도 나도 함께 마시고 내쉬는 '호흡'과는 무관합니다. 곧 창조의 숨결인 성령은 서로를 통하게 하시고, 말을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나팔에 대한 비유는 여리고성을 떠올리게 합니다(15장에서 다시 나팔이 언급될 것입니다.). 여리고성의 나팔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나팔을 부는 이스라엘 사람이나, 소리를 듣는 여리고 사람들이 제대로 된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부는 사람은 나팔소리 답게 불어야 할 것이요, 듣는 사람들도 나팔소리 다운 나팔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예시를 고린도 에클레시아에 적용하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방언을 통해서 만일 분명한 로고스를 주지 않으면, 어찌 말된 것을 깨닫게 될 수 있겠습니까? 즉 여러분은 허공에 대고 말하는 이가 될 것입니다. 발생된 소리들의 종류가 무척 많고, 소리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만일 소리의 힘(수)을 알지 못한다면, 나는 말하는 이에게 외국인이 될 것이고, 말하는 사람은 내 안에서 외국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이 숨에 속하여 열심내는 이들이 되려거든, 에클레시아의 (집)지음을 위해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이 남기 위하여.


  그들의 방언은 호흡없는 관악기, 제대로 들리지 않는 나팔소리 같습니다. 그리고 고린도는 국제도시로서 다른 지역과 대규모의 교역이 이뤄지던 곳입니다. 따라서 외국인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말이 다르기 때문에 답답한 모습에 대해서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답답한 모습을,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숨에 속한 사람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생각했고, 심지어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말하는 소리의 '힘(수)'은, 이해에 있습니다. 알아듣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말을 통한 서로의 소통을 통해, 다시금 등장합니다. 집 지음.

  바울은 집 지음을 추구해야 여러분이 남는다고 말합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서로 소통하기는 커녕, 개인적인, 그리고 못알아들을 소리만 반복하는 에클레시아가, 분열하고 사라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목적 때문에 에클레시아 안에서 서로를 외국인 만들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13~19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헤르메스를 통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숨은 기도하는 반면, 나의 '누스'는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입니까? 나는 숨으로도 기도하고 누스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숨으로도 노래하고 누스로도 노래하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숨으로 축복한다면, '알지 못하는 이들의 자리'를 채우고 있는 사람이 어찌 당신의 기도에 '아멘'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대는 온전하게 감사드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집짓지는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여러분 모두보다 방언을 더 말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 안에서 나는 다섯 로고스들을 나의 누스로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방언으로 하는 만 개의 로고스보다.


  바울은 에클레시아 안에서 방언을 사용할 때, 하나의 단서조항을 달아둡니다. 바로 헤르메스입니다. 헤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로부터 말을 가져와 배달해주는 전령의 이름입니다.(우리에게는 버디버디 신발 로고로 익숙합니다.) 이 헤르메스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해석'입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전달함'을 의미합니다. 즉 '해석'이 에클레시아 안에서 방언을 사용할 때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단서조항입니다. 다시 말해서, 해석이 있어야 방언이 제자리를 찾습니다.(이는 결혼을 통해 성(性)을 제자리에 두려는 5~7장에서의 방법과 같습니다.)

  그리고 '누스'가 등장했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생각하는 이성'이라는 의미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숨'의 작용이지, '누스'의 작용이 아닙니다. 그래서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생각 없는 기도입니다. 그렇다고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카리스마를 받은 이에게 개인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에클레사이 안에서 이 숨으로 하는 기도는, 해석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생각으로 소통할 수 없으면, 집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숨으로도 기도하고 누스로도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또한 본문에 '노래'가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당시 에클레시아에 대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습니다. "노래(찬송)은 유대교 예배에 늘 있던 부분이었고, 초기 기독교에서도 이 노래를 예배의 본질을 이루는 부분으로 받아들였습니다...사람들은 이렇게 방언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방언으로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고든피, <성령> p.431) 또한 기도할 때, 함께 아멘하는 전통도 무척이나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자리를 채우고 있는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는 말이 난해구절입니다. 독일 학자들은 '개종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나, '기독교 신앙을 배우고 있지만 아직 신자는 아닌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이 말은 그저 기독교 신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방언'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 방언을 듣고 '아멘'할 수 없을 뿐더러, 방언은 이들을 위한 관계의 공간을 창조할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개인에게만 좋습니다. 홀로는 감사를 온전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방언으로 떠들고 있는 사람을 '당신'이라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에클레시아보다 더 많은 방언을 한다고 말합니다. 방언의 종류인지, 아니면 시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개인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울이 권면하는 것은, 방언으로 만 개의 '로고스'(12장에서 "지혜의 로고스, 지식의 로고스"와 같은 용례로, '질서 잡힌 말)를 말할 바에는, '누스'로 다섯 마디의 로고스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2) 신실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주의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4:20~25


  가족 여러분, 생각하는 데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오히려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 토라에 기록되기를,

"외국어로, 낯선 자의 입술로 내가 그 씨알에게 말할 것이나,

그들은 나에게 그토록 귀 기울이지 않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 방언들은 신실한 이들이 아니라, 신실하지 않은 이들에게 표적으로 있습니다. 반면 예언은 신실하지 않은 이들이 아니라, 신실한 이들에게 (표적으로)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온 에클레시아가 거기로 가서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는데, 알지 못하는 자나 신실하지 않은 자가 들어왔다면, 그들은 여러분이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반면, 모두가 예언하는데 알지 못하는 자나 신실하지 않은 자가 들어 온다면, 그들은 모두에게 책망 받고, 모두에게 판단 받아, 그들 가온 속 감추인 것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고, 그렇게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어린아이'가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13장에서 중첩된 시대를 살아가는 어린이를 만났습니다. 바울이 13장의 표현을 염두하고 있다면, 13장의 어린이는 '악에는 어린이'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어린이와 같이 않으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어린이도 '악에는 어린이'일 것입니다. 그리고 악이 사라지는 날, 그 어린이는 이제 진정한 어른이 됩니다. 저는 '어린이'라는 표현이 탐욕과 성적 무절제와 밀접한 상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어린이는 음욕을 품지 않습니다. 성(性)문제 앞에서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는게 어린이입니다. 벌거벗은 이성의 사진이 어린이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어른들의 숫자놀음은 어린이에게 지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어린이같이, 악의 문제 앞에서 전혀 그 일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겠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은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어른'은 '얼(익)은'입니다. 정신이 충분히 성숙한 사람입니다. 정신이 충분히 성숙한 사람은, 에클레시아가 모였을 때, 타인의 입장을 배려할 줄 압니다. 타인에 대한 생각 속에서, 방언 또한 제자리를 찾습니다. 특히 20~25절은 '신실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방언을 숙고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어른들이라 자부하는 이들에게 이사야서 28장을 보여줍니다. 그것도 "토라에 기록되기를" 이라는 말을 붙여서 말입니다. 이 말은 무겁습니다. 토라는 광야 한 복판에서 받은, 이스라엘의 삶의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8:8~10,12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즉 바울이 '어린아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사야 28장의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입니다. 이들은 '생각하는 데 어린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어른이라 여기며(그들은 하나님에게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나 가르치시지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생각하는 데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리석게도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더듬는 입술과 방언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듣지 않습니다.

  이 단락이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는 말임을 염두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방언으로 듣지 않음'은, 그 사람이 이사야서 28장이 말하는, 심판받는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즉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통해 이사야 28장이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방언을 고집함으로서, 방언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심판받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방언은 '신실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표적'이 됩니다. "유익을 주는 표적이 아니라, 해를 끼치는 표적입니다.
  반대로 신실한 사람들에게는 '예언'이 표적이 됩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신실한 자들에게만 들리는 예언이 아닙니다.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들리는 예언'이 신실한 사람들에게 표적이 됩니다. 신실하지 않은 이가, 에클레시아 안에서 벌어지는 예언을 듣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배하는 모습을 보며, 신실한 이는, 하나님께서 이 에클레시아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실하지 않았던 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은 이사야 45:14입니다.


이사야 45:14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집트가 수고하여 얻은 재물과 에티오피아가 장사하여 얻은 이익이 너에게로 넘어오고,
키 큰 스바 사람들이 너에게로 건너와서 네 밑으로 들어와 너를 따를 것이며,
사슬에 매여 와서 네 앞에 엎드리고, 너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이르기를
'과연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그 밖에 다른 이가 없습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할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당신'을 '여러분'이라고만 바꿉니다. 즉 에클레시아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그 에클레시아 안에서 예언은 매순간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 에클레시아 안에서 신실하지 않았던 이에 대한 '판단(심판)'이 이뤄집니다. 즉 최후에 벌어질 심판이 에클레시아 안에서 미리 행사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판단'에 대해서 말했던 5장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토록 예언을 강조했던 예시가 여기에 등장합니다. 예언은 아마도 하나님의 씨알들에게 주어졌던 말씀들이, 실제로 에클레시아의 삶 안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밝히 드러내 알아듣게 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4:26~40

  그럼 어찌 해야겠습니까? 가족 여러분,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 각각 찬송, 가르침, 계시, 방언, 해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집짓기가 되게 하십시오. 누가 방언으로 말하면, 둘 혹은 많아야 셋이 돌아가며 말하고, 그들 중 하나는 해석해야 합니다. 만일 해석하는 이가 없으면 에클레시아 안에서는 잠잠하고,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실제적인 지침을 내려줍니다. 12장에서 제기한 문제가 13장의 '인(仁)'을 지나, 이제 14장에서 구체적인 삶의 형태로 그 해결책이 드러납니다. 핵심은 집짓기, 오이코도메입니다. 이 원칙에 따라 방언은 '많아봐야(이 말로 봐서 당시 에클레시아가 모였을 때, 방언하고자 했던 이들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에 대한 내용에는 '많아야'가 없습니다)' 둘에서 셋. 그리고 반드시 해석하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해석하는 이가 없으면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방언해야 합니다. 이것을 원칙으로 제시합니다.


  예언에 관해서는,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분별하십시오. 만일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내리거든, 먼저 말한 사람은 잠잠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씩 모두가 예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가르침을 얻고, 모두가 힘입기 위해서 (말입니다). 또한 예언의 영들은 예언하는 사람들 아래 놓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질서가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거룩한 에클레시아에서처럼 (말입니다).



  방언에 이어 이번엔 예언에 관한 지침입니다. 역시나 둘 이나 셋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하는 예언을 남은 사람들은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인지 악령인지에 대한 이분법적 분별이 아닌, 예언이 하나님의 뜻과 에클레시아에 합당한지에 대한 판단입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는 예언은 개인적 예언이 아닌 공동체적 예언입니다.

  예언을 하는 도중에, 다른 사람이 계시를 받아 예언하거든,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히 하고 나중에 말하게 된 사람의 예언을 들어봐야 합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 말하겠다고 아수라장이 될 수 있습니다. 나중에 하는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면, 모든 사람들이 예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숨에 속한 '알아들을 수 있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배움을 통해 삶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언의 영들"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카리스마는, 한 성령께서 에클레시아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나시는 방식이므로, 이 "예언의 영들"이라는 말을 보고서, 성령외에 다른 영을 염두했다고 보는 것은 그릇된 해석입니다. 한 성령으로 예언하는 여러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것은, 그 다양하게 드러나시는 예언의 영이 예언하는 사람들 아래 놓인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질서'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보다 영이 우선권을 갖는다면, 서로 영을 받았다고 소리치며, 정작 '사람 사이의 질서'가 무너질 것입니다.(사람 외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에는 항상 이러한 어려움이 따릅니다.)


  '질서'라는 말은 '탁시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아래 두다', '조정하다'라는 의미인데 이 단어가 계속 반복되는 단락을 우리는 15장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때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무질서의 반댓말이 질서가 아니라 평화라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질서는 평화로부터 옵니다. 반대로 질서 위에서 평화가 이뤄진다고 말할 수 도 있겠습니다. 질서와 평화는 같은 현상을 지칭하는 두 단어가 되어야 합니다. 질서 없는 평화도 참 질서가 아니요, 평화없는 질서는 사람을 움츠려들게 합니다.


  평화와 질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평화와 질서가, 곧 모든 에클레시아의 삶입니다.


[여자들은 에클레시아 안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여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토라에 명시되어 있듯이, 그들은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 여자들이 더 이해하고 싶거든,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야 합니다. 여자가 에클레시아 안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구절을 여성 인권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별로 안좋아합니다. 그래 보이지 않습니까? 여성은 복종해야 하고, 남편에게 의존해야 하고, 에클레시아 안에서 심지어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 본문에 대한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본문을 바울이 쓴 것으로 보지 않는 견해입니다. 7장에서 결혼을 말하면서,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라고 말했던 바울인데, 한 편지 안에서 이토록 다른 말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구절들이 없거나, 고린도전서 맨 뒤에 붙은 사본들이 있습니다. 후대에 누군가가 따로 붙여 넣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다른 견해는, 당대 역사적 상황에 국한하여,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질서를 깨뜨렸던 여자들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봅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별을 깨뜨리려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채, 방언으로만 말하며, 아내로서의 신분을 망각하고, 에클레시아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는 여자들에 대한 직접적 권면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견해를 따르느냐에 따라서, 뒤에 남은 본문을 읽은 방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나왔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만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서만 나온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여자들'이 되느냐, 아니면 '무질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일단 저는 여기서 판단을 멈춥니다. 학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하고 있으니, 일단 그들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누구든지 자신이 예언자나 숨에 속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내용이 주의 명령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것을 무시하면 무시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가족 여러분, 예언하기를 열망하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마십시오. 하지만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질서대로 되게 하십시오.


  바울은 바울과 예언에 대한 권고를 꼭 지켜야 한다고 고린도 에클레시아에게 무겁게 경고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12장에서부터 시작되었던 '누가 숨에 속한 사람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단락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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