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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1~13

  '숨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던 12장은, "주 예수"와 하나 되어 모인 에클레시아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본문이었습니다. 획일화된 비언어적 지혜를 추구하던 고린도 에클레시아에게, 하나됨과 다양함을 아우르는 겪음이 참된 지혜임을 역설한 바울은, 그들에게 한 분 숨님이 다양한 지체들을 통해 표현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카리스마의 문제로 돌아와, "더 큰 카리스마들을 추구하라"는 명령문을 읽고서, 우리는 13장으로 들어왔습니다.

  13장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유명한 본문입니다만, 12~14장의 연관성 안에서 본문을 숙고해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2장에서는 '숨에 속한 것'에 대한 논의를, 그리고 13장의 사랑을 통하여, 14장에서는 "더 큰 카리스마들"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저는 이러한 구조가 카리스마의 숨님, 디아코노스의 주님, 창조의 하나님의 관계를 보여주는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큰 그림 속에서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13장인데, 바로 '사랑'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단어는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곡해의 우려가 많아 이 본문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의 사랑은 전혀 로맨틱한 감정과는 무관합니다. 저는 '인(仁, 어짐)'이라고 쓸 작정입니다. 이 말은 공자철학의 중심개념입니다. 사람(人) 둘(二)에서 온 이 단어는 人과 동원자이기도 합니다. '관계에서 이루는 인간성'이라 하겠습니다. 본래 인에 관해서는 공자 자신도 정의하기를 꺼려했던 근원이 되면서도 다양한 의미로 나타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인 자체는 두 사람이 전제되어 있기에 늘 복수개념입니다(마치 삼위로 계신 하나님처럼).  논어에 나타난 그 의미를 보자면,


1) 번지가 인에 관하여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2) 공자가 말하길, "인생의 목표를 도의 실천에 두고, 덕에 근거해야 하며, 인에 의지해야 하고...


3) 군자는 밥을 먹는 동안에도 인을 위배하지 않는 법이니, 황망 중에도 그렇게 해야 하며, 위급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4) 무릇 인이라는 것은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해주고, 자신이 통달하고 싶으면 남도 통달하게 해주는 것이다.


5) 오로지 인자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사람을 싫어할 수 있다.


6) 인에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7) 만일 왕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백성들이 인해질 것이다.


  이렇듯 인은 사람 사이에서 구현되어야 마땅한 인간됨의 근거로 사용되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말로는 '어질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랑'이라는 말은 감정과 남녀관계에 치우쳐 있어, 이러한 '인간됨'의 의미를 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주자도 愛는 감정(情)이고, 인(仁)의 한 양상이라고 말했으니,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아가페의 번역으로는 愛보다 仁이 낫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2장에서 '숨에 속한 사람은 누구인가?'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13장 역시 카리스마 문제로 국한하지 않고, 숨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본문으로 읽어야 마땅하겠습니다. 13장 전체를 다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A. 1~3s 인의 필요성
B. 4~7s 인의 성격
C. 8~13s 낀 시대에서의 삶


A. 고린도전서 13:1~3 : 인의 필요성


만일 내가 사람의 말들, 심지어 천사들의 말을 해도,
인(仁)을 갖지 않으면, 나는 소리나는 구리나
요란한 심벌즈일 뿐입니다.
또 만일 내가 예언을 갖고,
모든 뮈스테리아들과 모든 깨달음을 알고,
또 만일 산을 옮길 신실함을 가졌다 해도,
인을 갖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만일 내가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어 먹이고,
또 만일 자랑하고자 내 몸을 내주더라도,
인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말'이 말솜씨를, 그리고 '천사들의 말'이 방언을 가리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던 바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이 없으면, 그 말들이 이교 신전 제사에 사용되는 악기(심벌즈)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소리나는 구리"는 궤변론자나 웅변가를 조롱하는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추정합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표현들은 분명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이방인이었던 이전 모습들을 상기시킵니다.(12:2)

  본문에서 '인을 갖다'라는 표현 때문에, 인을 소유물로 이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에 대한 명령은 바울 사상에 계속 등장합니다. (살전 4:9, 갈 5:13,22, 롬 12:9, 13:8, 골 3:14, 엡 5:2)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카리스마들 중 예언, 깨달음, 신실함을 가져옵니다. 바울은 이 세 가지를 무척이나 강조하는데, 자신이 그렇게 강조하는 카리스마들을 '인'과 대비시켜서, '인'의 중요함을 극대화시킵니다.
  뮈스테리아는 뮈스테리온을 지나 벌어지는 모든 일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뮈스테리온 안에서의 일들을 겪지 않고서도 모조리 안다고 해도" 인(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한 구제와 희생의 예시를 듭니다. 남을 먹이는 것과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일은 누가봐도 옳다고 할 내용입니다. 바울은 구제와 희생이 문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이 없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인이 없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거짓된 중심은, 누가봐도 옳은 행동인 구제와 희생 마저도 변질시킵니다. 곧 위선입니다. 바울이 구제와 희생을 사랑과 대립으로 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카리스마들도 사랑과 대립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12장 마지막 절 "더 좋은 카리스마들을 추구하라"는 문장을, '인을 가지고서 행하는 카리스마'라고 이해합니다.


B. 고린도전서 13:4~7 : 인의 성격


인은 호흡이 깁니다.
인은 손내밀며, 시기를 모르며,
인은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고,
부풀리지 않고, 아름답게 처신하며,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성을 내거나 악한 것을 계산하지 않고,
불의함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참과 함께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에 신실하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기다립니다.


  '오래 참는다'고 알려진 '마크로.뛰메오'라는 단어는, '긴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긴 호흡이 오래참는 것과 분명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은 베풂을 낳습니다. 상대적 비교를 모르며, 자기 자신을 거짓된 중심 삼지 않습니다. 부풀리지 않으니 솔직하고, 매사 아름답게 처신합니다. 자기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성을 내거나, 악한 것을 궁리하지도 않습니다. 불의함을 기뻐하지 않고, 참과 함께 기뻐합니다.

  그리고 이 '인'은 모든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모든 것 안에서 참과 함께 하는 일은 때로는 견디는 일이고, 때로는 신실해야 하는 일이고, 때로는 소망해야 하는 일이고,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한 글자로 줄여서 '인'이라고 합니다.


C. 고린도전서 13:8~13 : 중첩된 시대에서의 삶


인은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없어질 것입니다.
말들도 멈출 것이고,
깨달음 역시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분으로부터 깨닫고,
부분으로부터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전함이 오면, 부분으로부터 온 것은 없어집니다.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어린아이처럼 말했고,
어린아이처럼 이해했고,
어린아이처럼 이치를 따졌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나는 어린아이의 것들을 그쳤습니다.


  바울은 '인'은 떨어지지 않지만, 예언, 말들, 깨달음은 없어질 것이라 말합니다. 바울이 수려한 문장으로 인에 대해서 써내려가면서도, 카리스마에 대한 논점을 잃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카리스마들이 없어집니다. 이 없어지는 것들의 특징은 '부분으로부터 왔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떨어진다'라는 말은 '그 힘을 빼앗긴 채 그 효력을 잃어버린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따라서 카리스마는 임시적입니다. 아마도 카리스마(특히 방언)를 추구하던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이 대목에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카리스마를 '부분'과 연결짓고, 그 다음 문장에서는 완전함을 말합니다. 이 완전함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1) '완전함'을 '사랑'으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분적인 것은 카리스마들이 되어,  "어른이 되어서는, 나는 어린아이의 것들을 그쳤습니다"에 이르면, 카리스마들은 없애야할 것들이 됩니다. 또한 2) '계시'라고도 읽었습니다. '이전에는 부분적으로 알았지만, 이제는 계시를 통해 완전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읽어도 카리스마들이 없애야할 것으로 읽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3) 완전함이 '조화로운 에클레시아의 삶'으로도 읽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현재 획일적 카리스마를 추구하는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행태를 모두 버려야 할 것으로 이해하게 되니, 카리스마들을 긍정할 길은 없게 됩니다.
  이 해석들의 공통점은 부분과 완전함을 뒤에 나오는 어린아이 비유와 연결지어 성숙과 미성숙으로 읽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카리스마들은 불필요한 것들로 오해하게 됩니다.

  다음의 표를 통해, 바울이 대조하고 있는 것들을 확인해봅시다.


부분 

완전함

 어린아이

어른

 아직

그때

 없어질 것

떨어지지 않을 것

중첩된 시대(마지막 날~주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어린아이의 말, 생각, 이해를 그치는 것은 카리스마들을 버리라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더 큰 카리스마를 추구하라"는 바울의 말과 충돌합니다. 어린아이의 말, 생각, 이해를 그치는 것은 완전함이 왔을 때이고, 그때가 어른이 된 때이며, 영원한 것이 도래한 시절입니다. 다시 말해 우측에 나열된 것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따라서 카리스마들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부분의 시절이요, 어린아이의 시절이요, 아직 새 하늘과 새 땅은 도래하지 않았으며, 임시적으로 발생한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중첩된 시대입니다. 다시 말해 마지막 날 ~ 주의 날입니다. 십자가, 부활로 개시된 오는시대가 현시대의 종말을 바라보고 있는 때입니다. 따라서 "어린아이 같은" 이라는 표현은, 없어져야 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날 카리스마들을 가지고 끼인 시대를 살아가는 에클레시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인은 카리스마들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아직은 거울을 통해 어른대는 것을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볼 것입니다.
아직은 내가 부분으로부터 깨닫지만,
그때에는 하나님 나를 아시듯 꿰뚫어 알게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거울 비유도 오해가 있었습니다. 청동거울로 보는 것은 어른거림이,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동거울은 당시 고린도 지역의 특산물이었고, 그러한 청동 거울을 무시하는 발언은 지극히 현대인의 입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청동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중첩된 시대에서의 앎'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거울이 후져서 참되게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는 시대인 것입니다. 고든 피는 "본질상 간접성"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만일 바울이 나는 지금 거울이 아니라 완전히 안다고 말한다면, 앞에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방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자기 말과 충돌하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13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실함, 바람, 인, 이 세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들 가운데 큰 것은, 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라는 말은 현재상태. 즉 중첩된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뜬금없이 지금까지 논의 바깥에 있었던 신실함(믿음)과 바람(소망)이 등장했습니다. 이 신실함과 소망은 현시대 위에서 오는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신실함과 바람을 말했을 때, 이 어휘들을 현시대와 오는시대의 맥락에서 읽을 것이라고 당연히 기대했기에 이런 단어들의 출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시대와 무관하게 믿음과 소망을 말하는 오늘날과는 달리)

  신실함은 매순간 태도를, 소망은 앞으로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창조세계가 어른이 되어, 영원한 것, 완전한 것,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되면 신실함과 소망은 어찌 될까요? 신실함이 이뤄졌으니 더이상 신실함이 요구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참으로 이뤄졌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실함과 소망 역시 카리스마와 마찬가지로 끼어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인은 영원합니다. 도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인의 세계입니다. 바울은 뒤에서부터 생각합니다. 완전한 것으로부터 역으로 현재를 추리하니, 인이 으뜸이더라. 이 영원한 인(仁) 안에서 신실함도 소망도 제자리를 찾습니다. 하물며 카리스마들은 어떻겠습니까? 끼어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에클레시아에게, 믿음, 소망, 사랑이 있습니다. 카리스마들도 있습니다. 없애버려할 것들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삶의 방식으로서 말입니다.

  12장을 지나 13장을 거쳐온 지금, '숨에 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전과는 분명하게 다른 답변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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