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1~11

  홍대에 왔습니다. 까페에 들어와 커피를 시켜놓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어폰을 끼고 있습니다. 각자의 노래를 들으며, 각자의 공부를 합니다. 다들 나름의 꿈이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모습이 예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모두 각자 이어폰을 꼽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데도, 각자가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것이 '숨에 속한 것'이라 생각하며 말입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오해를 바로 잡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덧 15장에 이르렀는데, 바울의 글쓰기 방식은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이 15장에 대한 암시를 글 곳곳에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1장부터 빵조각들을 주워봅시다. 그럼 우리는 마침내 마귀 할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따뜻한 우리집, 바울이 제시하는 부활의 위대한 장면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았습니다.


1~4장 :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미래

5,6장 : 포르네이아 문제와 소송 사건,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7장 : 성(性)문제를 바로 잡기 위한 결혼과 독신

8~10장 : 그림자들 숭배와 음식, 성찬에서의 차별 문제, 엑수시아

11~14장 : 숨에 속한 사람은 누구인가?


i) 하나님의 건물입니다(3장)
  첫번째 빵조각입니다. 바울은 3장에서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꺼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일 것이라 말했습니다. 즉 아래 본문이 말하는 것은, 메시아 예수를 토대로한 하나님의 성전 짓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거저주심을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처럼 토대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그 위에 건물을 짓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그 위에 어떻게 지을지 주의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미 놓은 것 외에 다른 토대를 놓을 수 없으니, 그 토대는 바로 메시아 예수이십니다!


  부활을 논하는데 성전 언급이 왜 중요할까요? 현시대에서 오는시대로 전환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표지가 바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현시대에서 이방인들에게 능욕당하던 성전은, 오는시대가 오면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전을 깨끗게 하는 것이 A.D.1세기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의 사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처럼 추앙을 받고 싶었던 이들이, 성전을 이방민족에게서 빼앗아 다시 봉헌하기도 하고(마카비 혁명), 성전을 증축하기도 했습니다(헤롯). 그러나 예수님은 건물 성전이 무너진다고 말씀하셨고, 건물 성전을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가리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증언했습니다.

  따라서 성전에 언급은 부활에 대한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건물은, 메시아 예수를 토대로 하는 성전이며, 이것은 메시아와 하나되어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는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ii) 하나님께서 주를 일으키셨고, 우리도 일으키실 것입니다(6장).


  그런데 몸은 포르네이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위해 있고, 주는 몸을 위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를 일으키셨고, 우리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의 힘으로.


  6장에 다시 몸에 대한 논의가 이어집니다. 이 '몸'은 포르네이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위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부활시키셨듯이, 바로 '이 몸'을 부활시키실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몸이 곧 3장에서의 건물이요,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iii)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9장)


  사람들이 육상 경기장에서 경주할 때 모든 사람이 달려도 한 사람만 상을 받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상을 받도록 달리십시오. 운동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면에서 절제합니다. 그들은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목표 없이 달리지 않습니다! 나는 허공을 치는 사람처럼 권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한 뒤에 나 자신이 실격당하지 않도록, 나는 내 몸을 거칠게 다루고 노예 삼습니다.


  그리고 이 9장에 나오는 운동경기 비유 역시 부활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중첩된 시간을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사람이 얻게 되는 것은, '썩지 않는 면류관'입니다.

iv) 집을 지읍시다(14장)
 

  그런데 예언하는 이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곁에서 속삭여주며, 이야기 곁으로 초대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집)짓고,  예언하는 사람이 에클레시아를 (집) 짓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이 모두 방언으로 말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모두 예언한다면 더욱 기쁘겠습니다. 예언하는 이가 방언으로 말하는 이보다 더 큽니다, 만일 그가 에클레시아를 (집)짓기 위해 해석 없이 한다면 말입니다.


  다시 집에 대한 유비로 돌아옵니다. 3장에서 언급했던 집은 14장에 다시 등장합니다. '오이코도메'라는 단어는 서로를 위해 집을 지어주는 것이고, 이것은 3장에서 언급했던 하나님의 성전, 에클레시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드러난 진실은, 하나님께 부름받은 신실한 사람들은, 에클레시아라는 세상에 없던 관계망으로 부름받은 것이고, 그것을 잘 가꾸고 돌봐서, 이 땅에 하나님의 성전을 구현해야 할 책임을 도맡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은, 곧 메시아와 하나된 몸이요, 이제 그 몸이 "주의 날"에 어떠한 결말을 맞을지가 15장에서 밝혀집니다. 우리는 이 15장을 살펴볼 것인데, 일단 전체 구조부터 확인합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막 쓰지 않고(당연히 그럴리는 없겠지만), 구조를 염두하고 썼습니다. 그리고 C를 중심으로 위 아래 내용은 서로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A. 복음은 예수의 부활에 토대를 두고 있다(1~11)

    B1. 너희들 몇몇의 말대로 부활이 없다고 가정해보자(12~19)
    B2. 지금이 어느 때인지 보라 : 예수의 부활 ~ 죽은 자들의 부활(20~28)

      C. 실천력 (29~34)

    B'1. 무엇으로 부활하는가?(35~41)
    B'2. 
숨에 의해 결정되는 삶과 몸(42~49)


A' 새로운 몸, 죽음에 대한 승리, 찬송과 권면(50~58)






A. 고린도전서 15:1~11
"복음은 예수의 부활에 토대를 두고 있다."


  가족 여러분, 내가 전했던 복음을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았고, 그 안에 서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것을 통해 구원받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메시지를 단단히 붙들고, 헛되게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제가 처음에 여러분에게 전해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합니다. 이 복음은 최초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구성하게 한 바로 그 소식입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에게서 인간다움의 회복이 벌어진다고 말합니다. 단 그 (바울이 전한) 그 메시지를 단단히 붙들고, 헛되이 믿고 따르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전한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이며, "헛되이 믿고 따른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메시아께서 성경대로 우리 비뚤어짐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이는 무덤에 매장되셨고, 성경대로 셋째 날에 부활하셨고,
  게바에게 나타나셨고, 그 뒤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뒤에 그이는 단번에 오백명이 넘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나타났는데,
  그들 중 일부는 잠들었지만 대다수는 아직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 뒤에 그이는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
  그 뒤에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고,
  또 마지막으로 모태에서 조산한 사람인 내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먼저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확인해봅시다. 그것은 잘 다듬어져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문장들호 보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메시아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앞에서 '메시아'리는 단어의 의미를 확인했습니다. 메시아는 현시대의 수장을 끝장내고, 성전을 깨끗게 해서 오는시대를 가져올 출애굽의 왕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죽임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성경대로"였다는 것이 복음의 진술입니다. 즉 구약성경 전체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달려가고, 그 한 사람이 메시아라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메시아의 죽음이 현시대의 종말과 오는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메시아 한 사람의 죽음으로 현시대의 수장이 파멸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고, 성경은 이것을 출애굽의 맥락으로 이해합니다 . 즉 메시아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고, 그 어린양의 죽음으로 현시대를 지배하는 죄와 죽음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새로운 시절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를 핍박했기 때문에, 사실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내게 주신 그분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렇게 전파하였고, 여러분도 이렇게 믿고 따랐습니다.


  앞에 나온 공식문서에서 바울이 "마지막으로 모태에서 조산한 사람인 내게도"라는 표현을 덧붙인 이유가 등장합니다. '조산'의 의미는 민수기 13장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모세에게 도전했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악성 피부병에 걸려 버렸습니다.


민수기 12:11,12

아론이 모세에게 말하였다.

"참으로 애석합니다. 우리들이 어리석었던 죄와, 우리가 저지른 죄를, 부디 우리에게 벌하지 마십시오. 미리암을, 모태에서 나올 때에 살이 반이나 썩은 채 죽어 나온 아이처럼, 저렇게 두지는 마십시오."


  바울의 상황은 미리암과 비슷합니다. 메시아 예수의 권위에 도전하여, 에클레시아를 핍박한 전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출애굽의 지도자를 가로 막았던 미리암과 같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예수의 공생애 시절 늘 그와 함께 했던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그는 마치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나온 아이처럼,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치지 못한채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바울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혜로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I am what I am by His grace) 이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바울은 열심히 창조적 과업에 참여했고, 그 결과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심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반응형

'바울의 편지들 > 고린도전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전서 16:1~24  (1) 2016.02.20
고린도전서 15:12~58  (3) 2016.02.19
고린도전서 14:1~40  (0) 2016.02.19
고린도전서 13:1~13  (3) 2016.02.12
고린도전서 12:1~12:31  (3) 2016.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