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히브리서 2:1~9

1)그러니 우리는 더욱 들은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에서 떠내려가지 않도록.(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2)만일 천사들을 통해 여러분들이 말하게 된 로고스도 걸을만해서
모든 벗어난 걸음과 헛들음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면,
3)어찌 우리가 이토록 큰 구원에서 머물지 않고 밖으로 달아날 수 있겠는가?


  여기서 "그러니"라는 접속사는 시간의 리듬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표지판과도 같다. 비트가 더 쪼개졌고,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천사들에 의해 전달되고 이해되던 메시지에, 깃털같이 가벼운 메시아가 얹어졌더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율법의 폐쇄적인 의미 작용 안에 들어온 메시아는, 율법의 운용방식을 뒤집는다. 율법은 여전히 기능하나 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이 기존의 율법을 정지시키면서도, 율법을 새로이 완성하는, 율법의 새로운 운용방식을 사도들은 목격했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그 메시아의 이야기가 전달되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천사는 주인공일 수 없다. 사라지는 매개자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화되었다면, 이제 그 권력은 무력화되고 진정한 매개자가 등장했다. 인간이다. 천사의 통치는 이 인간 통치자의 등장까지의 임시 권력이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6:3, 개인번역
여러분은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그런데 하물며 일상생활과 관련된 문제라니요! 

  이 구절을 어찌 이해할 것인가? 앞에서 보았던 '천사/불/법(토라)'의 의미군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에클레시아는 국가 단위의 의미작용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민족들의 경계 안에서 작용하는 의미작용은 더 이상 에클레시아를 속박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 안에서의 의미작용인 법이, 무고한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지 목격했고, 바로 그 목격에서부터 에클레시아는 출범했기 때문이다. 2절에서 말하는 "천사들을 통해 여러분들이 말하게 된 로고스"가 토라인데, 바울은 이 토라가 ㄱ) 모든 사람의 걸음이 법을 이룰 수 없는 헛걸음이라는 사실을 드러냈고, ㄴ) 토라가 인간에게 내놓은 정당한 대가는 법을 어긴 인류 전체에 대한 유죄 판결이었다. 그리고 이 유죄 판결이 자신에게도 유효함을 인정하는 것이, 메시아께 향하는 입구가 된다.

  또한 이 입구로서의 토라가 '불', '천사'로 표현된다는 것은 에덴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불칼든 천사가 지키는 에덴으로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고, 그 에덴은 성막으로 재현되었다. 성막에 들어가 지성소의 신과 대면한다는 것은, 불칼든 천사를 지나 다시 에덴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며, 신과의 조우를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토라가 드러낸 유죄판결, 곧 천사(법)의 의미작용으로 인한 심판(불)인 것이다. 거기서 죽고, 다시 살아나는 방식이 신과 만나는 방식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에클레시아는 메시아의 죽음에 자신을 대입하는 '가상적'이면서도 '법적인/법에 대한 죽음'을 통해, 삶 그 자체로의 삶, 곧 에덴에서의 삶을 원점에서부터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실체없는 매개자의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다. 기자는 그것을 "이토록 큰 구원"이라 표현하는데, 여기서 구원은 곧 인간으로서의 온전함을 의미한다. 


이 구원은 주를 통해 나온 말로 얻게 된 아르케요,
이 말을 들은 이들로부터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확증을 얻었는데,
4)하나님도 함께 증언하셨다, 표적과 기적으로

그리고 그의 뜻을 따라 다양한게 분여된 거룩한 숨결의 잠재력으로,

5)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 임박한 거주지'를 천사들 아래 두지 않으셨기 때문인데,
6)이에 대해 어떤 이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증언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언어/질서. 거기서부터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 '아르케(αρχη)'는 새로운 통치 권력의 출범을 의미한다. 메시아의 언어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가 곧 구원, 온전함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통치질서는 언어를 통해 전이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르기까지 누군가의 몸을 통해 "걸어왔다." 언어는 몸을 움직이게 하고, 그 몸은 다시 언어를 발화하는 과정을 통해, 지극히 인간적인 과정을 통해 새로운 통치는 이 땅에 돌입했던 것이다.
  이 '언어'에 대해서 기자는 목격자들의 증언과 하나님의 표적이 맞아 떨어졌다고 말한다. 그것은 메시아가 이루신 A. 경이로운 사건들, B. 다양한 능력들, C. 성령의 분여다. 말과 사건이 만나고, 말과 능력이 만나고, 말과 성령이 만났다. 그 말로 사건을 전하고, 그 말로 능력을 전하고, 그 말로 성령을 전한다. 말로 말을 전하기도 힘든 바벨의 통치 안에 떨어진 새로운 매개는 말과 일치된 현실이다. 이 새로운 매개가 승천 이후 가능해진 것이다.


  5절이 말하는 "그 임박한 거주지"는 무엇일까? "천사들 아래 두지 않았다"라는 말이 단서가 되는데, 8절에서는 "아래 둔 것"을 "만물"이라 말한다. 따라서 거주지는 '만물'이 된다. 그렇다면 "임박한"이라는 형용사는 무엇을 의미할까? 1:12를 따라 '변화/갱신'이 임박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만물은 하늘과 땅이고, 임박한 것은 그 하늘과 땅의 변화/갱신이다. 그리고 이 일은 천사들 아래 놓이지 않았다. 따라서 천사들을 통해 주어진 율법의 시간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변화와 갱신이다. 그리고 기자는 "그 임박한 거주지"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히브리서 1,2장을 읽으며 그 임박함의 시간성과, 새 하늘과 새 땅의 갱신을 염두하고 있지 않다면, 저자의 의도를 이미 벗어난 것이리라.


  기자가 인용한 구약구절은 조금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진술을 좀 더 이어가 보겠다. 기자는 "변화가 임박한 만물이 메시아 예수 아래 두어졌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하늘과 땅의 변화를 감지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땅을 딛고 만물을 보는 인간은, 만물의 쇠락을 인지할 수는 있어도, 그 갱신을 꿈꾸지 못한다. 혹은 만물의 지속을 일상적이라 여길 수는 있어도, 그 지속의 단절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만물의 갱신 조짐은 보이지 않더라도, 보이는 것이 있으니 예수. 천사들보다도 낮아지셨던 십자가의 왕만은 역사 위에서 분명하다. 희랍적 사유는 '본다'를 '안다'와 연결시킨다. 영어로 "알겠다"를 I see라고 말하는 것은 희랍식 사고의 전통에서 온 것이다. 만물의 갱신을 알지 못하는 인간도, 예수는 알고 있다. 예수를 앎은 그저 지속되기만 하는 인간의 인식 속에 박히는 균열이요 틈이다. 그의 현존이 분명하기 때문에, 만물의 갱신이라는 역사의 텔로스 또한 분명하다. 자신은 아르케요, 갱신되는 만물은 텔로스다. 그 아르케와 텔로스가 만나 에클레시아의 '지금'을 구성한다. 이로서 에클레시아는 현실 시간의 지속을 내파시키는 새로운 시간/새로운 상상/새로운 소망을 구현하게 된다. 메시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시간은 끊어졌고, 보이지 않던(설령 지금도 보이지 않더라도) 만물의 갱신을 사유하게 된 것이다. 이 현실 감각과 충돌하는 이질적 감각의 추구에 대한 언급은 히브리서 뒤에서도 이어질 것이다(기자는 이것을 '믿음'이라 부른다).


  메시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메시아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이를 하늘로 들어올려 대권을 이양하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이의 말이 옳다. 이 하나님의 표적은 우리를 새로운 말에게로 인도한다. 하늘의 표적을 보이신 이의 말은 만물의 갱신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보지 못하는 것이 현실화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의 현실화를 말할 때, 그 말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실화는 이미 작동을 시작한다. 인간에게 말은 곧 현실이기 때문이고, 인간은 말 없는 현실을 상상할 수 없다. 마치 만물의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듯이, 인간에게는 말 바깥이 없다. 메시아 안에서 우리는 들은 것을 말할 것이고, 그 말대로 만물은 새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만물이 새로워지는 그 날은 말의 옳고 그름이, 예언자의 정함이 드러나는 날이 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들을 기억하십니까?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에게 찾아오십니까?
  7)주께서는 그를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고
  그에게 뚜렷한 인정의 관을 씌우셨고,
  8)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습니다.“

  만물이 그 아래 두어졌다면, 그 밖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만물이 그 아래 두어짐을 보지 못한다.
9)그런데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신 분을 본다, 예수,
죽음의 겪음을 통해서 뚜렷한 인정으로 관을 쓰셨으니,
그 결과 하나님의 거저로 모든 죽음을 대신하여 맛보셨다.


  이런 기자의 시선을 가지고 시편 8편을 읽어보라.

  신은 메시아의 삶과 말을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위대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그이를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는 말은, 십자가를 의미한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보이지 않는 권력에 무릎 꿇려지고, 심지어 목숨마저도 빼앗겼다. 천사들로부터 토라를 건내받은 민족의 의미작용안에 예수는 배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방 제국이었던 로마의 입장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로마를 지배하고 있던 의미 작용은 카이사르 한 사람에 대한 숭배와 그 한 사람을 통한 세계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 보이지 않는 의미작용에 많은 이들이 참여했고, 그 참여는 의미작용을 권력화하여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이는 참극에 이르렀다. 


  천사를 의미작용과 연관지어 보는 것은, 의미작용이 곧 인간의 사유가 되고, 인간의 사유는 신께 위임받은 통치권으로 인해 권력화되기 때문이다. 이 눈으로 포착되지 않는 단순하지 않은 과정을 고대인들은 영적 실체들과 관련된 용어로서 사고하고 포착하려고 했다. 고대의 신들이 여럿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 신들은 권력관계 안에서 암투와 투쟁을 반복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삶을 투영한 것인가, 아니면 신들의 삶이 인간에게 투영된 것인가? 아니면 의미작용과 인간을 분리시켜 사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이 의미작용 아래서 인간은 끝없이 종노릇하며 만물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늘 부정해왔다. 그러나 메시아의 시간 안에서 이 뒤틀린 관념은 역전되고, 그 역전은 다시 인간 의식의 제자리이다.


  예수는 이미 상존하고 있는 의미작용들과 권력들에 패배하는 것으로 보였다. 기자가 "잠깐 낮추셨다"고 말한 것이 이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뚜렷한 인정의 관"을 쓰셨다. 유대인들에게 의인으로서의 인정을 드러내는 사건이 부활이었다. 

  그리고 "만물이 그의 발 아래 놓인다". 이것은 명백한 승천에 대한 표현이다. 즉 기자는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말하고 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메시아는 천사들을 압도하는 새로운 의미작용의 주체로 드러났고, 이제 에클레시아는 그 메시아를 통해 권력화의 의미작용이 아닌, 만물의 갱신을 소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에클레시아는 권력화의 의미작용을 간파해야 한다. 권력화의 노예는 생각한대로 살게 하지 않고, 사는대로 생각한다. 그는 콘크리트같은 삶 속에서 새로운 시간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의 생각은 콘트리트를 뚫기엔 한없이 연약하다. 


  그 앞에서 메시아 예수를 말한다는 것은, 생각으로 삶을 나누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삶의 시간을 끊어 새로운 시간을 함께 기워놓는 것이다. 옛 시간은 새로운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내파될 것이다. 새로운 시간은 흘러서 결여를 채우고도 넘치게 될 것이다. 악습을 끊는 용기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나올 것이다.  본문의 '인자'가 다니엘서 7장의 '인자'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시편 8편은 "그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자'는 '그 사람의 아들'로서 인간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본문은 천사들의 통치가 종식되고, 이제 비로소 인간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구절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창조의 원칙이 회복되는 것이며,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것이다. 이 "인간의 통치"에 관해서는 히브리서 2장에서 이어지는 나머지 내용들이 더 분명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거기 가서 좀 더 생각해보자.



히브리서 2:1~9

1)그러니 우리는 더욱 들은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에서 떠내려가지 않도록.(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2)만일 천사들을 통해 여러분들이 말하게 된 로고스도 걸을만해서
모든 벗어난 걸음과 헛들음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면,
3)어찌 우리가 이토록 큰 구원에서 머물지 않고 밖으로 달아날 수 있겠는가?

이 구원은 주를 통해 나온 말로 얻게 된 아르케요,
이 말을 들은 이들로부터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확증을 얻었는데,
4)하나님도 함께 증언하셨다, 표적과 기적으로

그리고 그의 뜻을 따라 다양한게 분여된 거룩한 숨결의 잠재력으로,

5)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 임박한 거주지'를 천사들 아래 두지 않으셨기 때문인데,
6)이에 대해 어떤 이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증언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들을 기억하십니까?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에게 찾아오십니까?
  7)주께서는 그를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고
  그에게 뚜렷한 인정의 관을 씌우셨고,
  8)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습니다.“

  만물이 그 아래 두어졌다면, 그 밖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만물이 그 아래 두어짐을 보지 못한다.
9)그런데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신 분을 본다, 예수,
죽음의 겪음을 통해서 뚜렷한 인정으로 관을 쓰셨으니,
그 결과 하나님의 거저로 모든 죽음을 대신하여 맛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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