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히브리서 2:10~18

10)왜냐하면 그이에게 적절했기(ἔπρεπεν) 때문이다,
  (그이는) 만물의 근원이자 만물의 과정이며,
  많은 아들들을 뚜렷 속으로 이끄는,
  그들의 온전함(구원)의 그 아르케고스인데,

(하나님께서) 그이를 겪음들을 통해서 완전케하심이 (적절했기 때문이다).
11)왜냐하면 거룩한 이와 거룩해진 이들 모두가 하나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 이유(αιτια) 때문에 그이는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수치스러워 않으신다,
12)말씀하시길,


시편 8편 인용이후, 기자는 신의 계획이 '인간에 의한 통치'였음을 천명한다. 여기서 '인간'은 '인자'라 언표되는데, 곧 인간 일반이다. 그리고 그 인자들에 의한 통치를 가져오는 선구자(아르케고스)로서 다름 아닌 예수가 적절했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해하는 예수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만물의 근원이자 과정이며,
2) 많은 아들들을 뚜렷속으로 이끄는
3) 그들의 온전함의 그 아르케고스.

  기자의 카메라는 만물에서 시작해서 점점 줌인을 거쳐 최종적으로 '그들', 곧 '인자들'에 머문다. 예수는 만물의 근원이자 과정이기 때문에 만물에 둘러쌓인 만물 중에 하나인 인간을 이끌 수 있다. 인자가 인자들을 이끄는 목젹지는 '뚜렷(영광)'이고, 이 과정과 결과를 기자는 '구원(온전함)'이라 말한다.

  '완전케하심' 앞에는 '토라'가 생략되어 있음을 염두해야 한다. 성경에서 완전의 개념은 토라 준수와 연결된다. 즉 메시아 예수가 토라를 완수하셨다. 그리고 그 토라 완수는 예수에게도 예외없이 "겪음들"이라는 과정을 요구한다. 즉 세부 법조항에 대한 종속이 토라 완수의 길이 아니라, 예수께서 직접 온 몸으로 겪으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이 '토라 완수의 새로운 길'이었던 것이다. '새로운'이란 말을 추가한 것은, 이전까지의 토라 완수의 방법과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을 이루는 길은 율법에 의해 저주받는 길이었고, 율법에 의해 죽임당하는 길이 율법을 이루며 살아나는 길이었다. 땅에서의 삶을 미워하는 것이 하늘과 땅을 모두 얻는 길이었다.

  예술을 이전에 없던 길을 새로이 드러내는 것이라 말한다면, 이는 예수의 예술이다. 원래 있었지만, 감추어졌던 길을 새로이 드러냄이다. 모두에게 낯설고 이질적이었던, 이 손님같은 방식이 그이에게는 "적절했다". 이 적절함은 방식이 가져온 결과에 의해서 평가된다. "거룩한 이와 거룩해진 이들 모두가 하나로부터 있"게 된 현실이, 메시아 예수의 방식이 적절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도덕적 판단은 전복된다. 이전까지는 수치스럽게 여겼어야 마땅할 사람들이, 형제들로 판단된다, "이 이유 때문에".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 새롭게 드러난 이유(αιτια)를 다시 이미 쓰여진 옛글에서 찾는 신약성경의 방식이다. 새로움은 고대성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가? 고대성으로부터 단절되지 않고서야 새로움을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현실화된 새로움은 다시 고대성과 만나 그 고대의 글을 다시 재인용하게 한다.


    "내가 당신의 그 이름을 나의 형제들에게 알리리라,   
    내가 에클레시아들 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리라."


  13)그리고 다시/새롭게,

    "내가 그에게 설득되어 있으리라."

  그리고 다시/새롭게,

    "보라, 내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던 아이들이 (있다)."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오늘날에는 가능한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전혀 다른 시간을 살면서, 그 현실과의 시차를 과거의 글에서 확인하고, 그 확인을 현실로 다시 인용하는 방식의 파격적인 글쓰기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물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글쓰기 방식이 불가능한 사람이야 말로, 그에게는 옛것과 새것은 단절된채, 삶의 토대는 모조리 분절되어 자신이 서 있을 수도 없겠다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까?

  기자는 불안은 커녕 현실의 폐허 위에 견고한 확신을 박아 세우는듯 하다. 그는 시편 22편을 인용한다. 시편 22편은 메시아의 시편으로도 유명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구절로도 유명하다(지젝만 이를 애써 모르는척 하면서, 성부가 분열을 거쳐 성자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시작은 이러하다.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시편은 고뇌와 고난의 '겪음'을 말하고 있다. '겪음'은 앞에서 토라를 이루는 새로운 방식으로서 메시아의 '십자가-부활-승천'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시편 22는 메시아의 비참한 겪음과 그에 대한 절망으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메시아의 고난에 대해서 도울 생각은 커녕, '저 사람이 맞다면,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겠지'라고 조롱하며 의인의 비참한 현실을 관망한다. 그럴수록 시편 저자는 더욱 신을 구하고, 마침내 21절에 이르러서는 그 구함이 응답되며, 22절에 이르러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구절이 등장한다.

시편 22:22
주님의 이름을 나의 백성에게 전하고,
예배 드리는 회중 한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즉 기자는 저 주님의 이름을 "예수"라 읽고 있고, "예배 드리는 회중"을 천사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이 땅에 새로운 통치를 시작한 "인자들"로 읽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이라면 익숙했을 이 메시아의 시편 속에서, 메시아의 고난과 신적인 통치를 시작한 에클레시아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인용된는 구절은 이사야 8:17,18이다.

이사야 8:17,18, 새번역
주님께서 비록 야곱의 집에서 얼굴을 돌리셔도,
나는 주님을 기다리겠다. 나는 주님을 의지하겠다.
내가 여기에 있고,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아이들이 여기에 있다.
나와 아이들은, 시온 산에 계시는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시는, 살아 있는 징조와 예표다.

  시편 22편과 마찬가지로, 서두는 마치 신께 버림받은 것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시편 22편과 마찬가지로, 그런 상황일수록 더욱 신께 구하고 의지하겠다는 결단이 표출된다. 이로써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22편의 화자를 고난받는 예수로 읽고 있고, 이사야 8:17의 "나는 주님을 기다리겠다"의 "나"를 고난받는 예수로 읽고 있음을 확인한다. 즉 기자는 메시아 예수의 의지를 구약성경에서 발견한 것이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예수는 버티는 메시아였고, 그 버팀은 "이 아이들"을 위함이다. 짝으로 나오는 "나와 아이들"은 시편 8편의 "인자"가 되며, 이들이야 말로 신적 통치를 알리는 "살아있는 징조와 예표"인 것이다(디모데전서 4:8의 "알림"). 

  그리고 시편 22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이 고난 속 버티는 삶은 '알림/선포'의 기능이 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시편 22:30,31
내 자손이 주님을 섬기고 후세의 자손도 주님이 누구신지 들어 알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말하면서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하고 선포할 것이다.

  이 인용들을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의 시간을 추론해볼 수 있다. 그의 시간은 과거가 달려와서 마침내 도달한 시간이다. 그런데 이 "마침내 도달"이라는 인식, 즉 지난 시간이 유의미하게 달려왔다는 사실은, 마침내 도래한 시간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에클레시아는 과거가 유의미했음을 자신들의 견디고 버티는 현실과, 텍스트 안에서 확인하는 공동체이고, 자신들의 현실을 근거로 끊임없이 과거의 텍스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공동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토라가 필요하다. 즉 토라는 그 효력이 끝나버림과 동시에 폐기되고 없어지는게 아니라, 그 사용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이전에는 효력을 가진 삶과 죽음의 기준이었다면, 토라는 도달한 시간 속에서 그 효력이 정지되고 '자신'과 고대를 잇는 가교로서 새로이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발생한 것이다.


  14)그래서 그이가 그 아이들을 피와 살몸으로 코이노니아 하셨을 때,
그이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가지셨던 것이다,
이는 그 사망을 통해 그 사망의 강력을 가진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함이다,
(그러한 것이 디아볼로스에 관하여 있다),
15)그리고 이는 사망의 두려움으로 그 삶의 모든 것을 관통하여 묶인 노예라면
누구나 풀어주기 위함이다,
16)즉 그이가 천사들을 곁에서 취하지 않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씨를 곁에서 취함이 분명하다.


  글쓴이의 생각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본문을 세밀하게 읽어야 한다. 쓱 한 번 보는 것으로 의미가 파악되는 글은, 잘 쓴 글이 아니라 내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글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모국어 사용자에게 낯선 번역을 말한다. 외국 저자가 쓴 '문장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외국어 단어와 문장의 구조를 번역데 반영하게 되면, 그 번역은 모국어로 구성된다 할지라도 모국어 사용자에게 낯선 것이 된다. 그러나 그 낯섬은 글자로는 낯설지 몰라도, 그 낯섬을 풀어내는 사유의 과정 속에서 독자로 하여금 저자의 의도와 의미에 더 근접하게 만들어준다.

  위의 낯선 본문을 천천히 읽어보자.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이지 않은가? 단어들의 의미들을 따라 읽다가 두 내용을 원인과 결과로 연결하는 "그래서"가 등장하는 순간, "뭐가 그래서야?"를 묻게 되지 않는가?
  앞에서 기자는 구약 인용을 통해서 '고난 속에서 더욱 신을 의지하는 인자들'을 읽어냈고, 그 안에서 자신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고난 속 버팀'의 선구자는 다름 아닌 예수였다. 즉 기자는 '예수의 겪음이 우리의 겪음'임을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래서'라는 접속사 이후 따라오는 문장은 고난 겪은 예수와 같은 고난을 겪는 그 아이들의 관계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때 "함께 가지다"라고 번역한 '메테코(μετεχω)'라는 동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사로는 "함께 가지다", "함께 속하다"의 의미인데, 이것이 명사형으로 쓰이면 '메시테스(μεσίτης)'가 되고, 이 단어가 "중보자"로 번역된다. 따라서 '중보자(매개자)'의 매개 방식은 '공동소유'라고 할 수 있다. "그이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가지셨기" 때문에, 중보자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이는 무엇을 함께 가지셨는가? "피와 살몸으로의 코이노니아". 즉 '몸으로의 겪음'을 함께 가져야 매개가 될 수 있다.

  메시아라는 직책을 갖고서 예수께서 몸으로 함께 겪으신 것은, 사망의 강력 가진 이의 무력화에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메시아의 직책에의 참여는, 그 몸으로의 함께 겪음을 통해 이뤄지고, 그 목적 역시 동일할 것이다.
  '사망의 강력'을 가진 이는 '디아볼로스', 즉 사람을 매개하기는 커녕 찢어놓는 비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의 찢어놓는 힘은 죽음에서 오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다.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유기체적 삶을 거절하고 나와 타자를 갈라놓기 때문이다.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이 두려움이 발생시키는 분열과 소외는 삶 전체를 점령하고 마비시킨다. 그러나 메시아의 '중보'는 몸으로의 삶을 해방시킨다. 곧 몸의 새로운 사용방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토라를 새롭게 사용하게 되었다는 가능성은, 곧 몸을 새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가능성과 연결된다. 그리고 '풀어줌'은 바로 이 새로운 사용 가능성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풀어줌'의 가능성을 겪은 이들이 "아브라함의 씨"이고, 메시아는 그 아브라함 씨 곁에서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항존하신다. 여기에서 다시 천사가 언급된 이유는, 천사에게는 이러한 역전,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삶으로의 연대에 대한 역전이 없기 때문이다. 에피람바노(επιλαμβανω)는 복음서에서는 "(손을) 붙들다", "데리고 (가다)"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서에서는 8:9에 언급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즉 이 역전이 성경에서 '출애굽'으로 표현되고 있다.


  토마스 슈라이너는 이사야 41:10의 인유라고 주장한다.


이사야 41:10, 새번역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내가 도와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준다.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었던 이들이, 단지 그이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브라함의 씨가 된다. 아브라함의 씨가 되었다는 말은, 몸의 사용방식이 달라졌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토라를 폐기처분 하는 것이 아니라 토라 "곁에" 메시아가 계시다는 이유만으로 토라 전체는 그 사용방식이 새로워진다. 곁에 있음을 통해 그 대상 전체의 새로운 사용방식을 드러내는 것이 메시아의 방법이다. 


17)여기서부터(이 이유로) 그이는 모든 것을 따라 형제들과 같게 되어야 하는 빚을 지셨다,
이는 그이가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기 위함이다,
그 하나님을 향하여, 그 씨알의 비뚤어짐들을 속죄하는 것 속으로.
18)즉 그 안에서 그이는 아픔을 공감하고 시험당하시기에,
시험당하는 이들을 도우실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 지점("여기서부터")에서 메시아의 책임("빚")을 논한다. 몸의 매개, 사망이 가진 강력의 무력화, 아브라함의 씨를 출애굽시키기 위해서 메시아는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 그리고 이 십자가 사건은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의 책임이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 사건은 씨알들의 비뚤어짐을 속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속죄를 위해 대제사장이 필요하다. 대제사장은 신으로서 피를 흘린다. 피 흘리는 것은 매개의 역할을 하는 메시아뿐, 어떤 이도 피 흘릴 것을 요구받지 않는다. 이렇듯 속죄는 희생을 끝장내기 위한 유일한 희생으로서 벌어진다. "아픔을 공감하는 것"은 토라는 비뚤어진 이들에게 비뚤어짐을 이유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고라'의 사건).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 그 희생을 끌어안고, 비뚤어진 이들에게 비뚤어짐을 이유로 고침과 사랑을 제시한다. 타자에 의해 (법체계의 로고스 안에서) 희생을 요구받는 이들을 돕는 가능성(~할 수)은 자발적인 희생의 떠안음을 통해 발생한다. 희생의 떠안음이야 말로 희생을 끊어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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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10~18

10)왜냐하면 그이에게 적절했기(ἔπρεπεν) 때문이다,
  (그이는) 만물의 근원이자 만물의 과정이며,
  많은 아들들을 뚜렷 속으로 이끄는,
  그들의 온전함(구원)의 그 아르케고스인데,

(하나님께서) 그이를 겪음들을 통해서 완전케하심이 (적절했기 때문이다).
11)왜냐하면 거룩한 이와 거룩해진 이들 모두가 하나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 이유(αιτια) 때문에 그이는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수치스러워 않으신다,
12)말씀하시길,

    "내가 당신의 그 이름을 나의 형제들에게 알리리라,   
    내가 에클레시아들 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리라."


  13)그리고 다시/새롭게,

    "내가 그에게 설득되어 있으리라."

  그리고 다시/새롭게,

    "보라, 내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던 아이들이 (있다)."

  14)그래서 그이가 그 아이들을 피와 살몸으로 코이노니아 하셨을 때,
그이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가지셨던 것이다,
이는 그 사망을 통해 그 사망의 강력을 가진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함이다,
(그러한 것이 디아볼로스에 관하여 있다),
15)그리고 이는 사망의 두려움으로 그 삶의 모든 것을 관통하여 묶인 노예라면
누구나 풀어주기 위함이다,
16)즉 그이가 천사들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씨를 곁에서 취함이 분명하다.
17)여기서부터(이 이유로) 그이는 모든 것을 따라 형제들과 같게 되어야 하는 빚을 지셨다,
이는 그가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기 위함이다,
그 하나님을 향하여, 그 씨알의 비뚤어짐들을 속죄/사면하는 것 속으로.
18)즉 그 안에서 그이는 아픔을 공감하고 시험당하시기에,
시험당하는 이들을 도우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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