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이 한 구절을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입니다. 숫자가 적절합니다. 미국에서는 화재나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911을 누르지 않습니까? 우리도 삶이 지치고 어려울 때, 히브리서 9장 11절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1.  "그런데 메시아께서 곧 있을 좋은 것들의 대제사장으로서"

  메시아는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마씨아흐이고, 희랍어 즉 그리스말로는 크리스토스입니다. 이 크리스도스를 부드럽게 말하면 그리스도, 한자로 음역하면 기독입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메시아 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라는 말을 예수라는 말 뒤에 으레 붙는 것인 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라는 말보다는 메시아라는 말을 더 자주 쓰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익숙한데, 메시아는 익숙하지 않거든요. 익숙하면 별 고민을 하지 않다가도, 익숙하지 않으면 그제서야 고민하게 됩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는 먼저 '기름 부음 받은 왕'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뜻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모든 민족을 통치하시는 분' 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은, 모든 민족을 통치하시는 분이 나타나서 로마 제국 아래 있는 자신들을 구해주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을 통치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에 무력하게 매달려 질식사한 청년이, 모든 민족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라 믿는 기독교인들입니다.

  히브리서 '911' 구절은 그 메시아가 대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를 가키리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민족을 통치하는 분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이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곧 있을 좋은 사람들, 금세라도 생겨날 좋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저 '좋은' 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저 좋은 이라는 말은 한자로 하면 '선'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좋음, 혹은 선함이라고 번역된 것은 같은 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다가 '좋다'는 표현, 혹은 한자로 '선하다'라는 표현이 나오면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자는 성경에 나오는 선함, 좋음을 보고선 그저 착하게 살면된다는 책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좋음, 선함은 그저 착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다라" 즉 성경에서 말하는 선함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음' 입니다.

  따라서 좋은 사람들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들',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에 걸맞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적어도 우리는 이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우두머리이신 메시아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므로, 이들은 분명 제사장일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제사장은 이렇게 임명됩니다. 일단 하나님은 그 후보를 죽은 사람들 중에서 찾으십니다. 시체같이 하나님의 창조에서 머리 떨어진 사람들 중에 제사장의 후보들이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은 그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냅니다. 그 살려냄은 메시아를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메시아 예수가 온 우주의 주님임을 알아보는 사람은, 일단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입니다. 에베소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서 허물은 모르고 지은 죄입니다. 죄는 알고 지은 죄를 말합니다. 즉 모르고 지었던 알고 지었던, 바로 그 죄 때문에 죽었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첫째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첫째 부활에 이미 참여했나요, 아니면 나중에 참여하게 되시나요? 여러분들은 이미 첫째 부활에 참여한 상태입니다. 이단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사람들을 속이므로, 교회 공동체 여러분들은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죄로부터 죽었다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임명합니다. 구약 때에 제사장을 임명할 때는 그 사람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래서 기름이 부어졌다는 말은, 임명받았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왕, 예언자, 제사장은 기름이 부어졌던 사람들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메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예수를 믿게 된 난민들에게, "당신들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왕이고 제사장이라면 머리에 기름이 부어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예수를 믿은 난민들에게 기름이 부어진 적이 없습니다. 대신 이들에게는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성령부음은 임명받음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임명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구절의 시작을 다시 마주합니다.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메시아께서 곧 있을, 2000년전부터 계속 생겨나고 있는 "보시기에 좋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 제사장이십니다. 그리고 이 제사장은 죽었다가 살아난, 그리고 성령을 받아 임명된 사람들입니다.

  그럼 제사장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요? 유대전통은 제사장들의 임무를 두 가지로 압축합니다. 하나는 돌보고 지키는 일입니다. 제사장 아닌 사람들을 돌보고, 하나님의 집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 일을 제사장들이 맡아서 했습니다.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2. ...크고 더 완전한, 손으로 짓지 않은 장막을 통해 곁에 있게 되셨습니다...

  제사장들의 일터는 성막, 혹은 성전입니다. 성막은 광야를 떠돌아다닐 때 만들었던 이동식 텐트이고, 성전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더 이상 떠돌아다닐 필요가 없을 때 세운 건물입니다. 성막이든 성전이든 그 기능은 같습니다. '하나님 사시는 집'입니다. 이 하나님 사시는 집은 우주의 중심입니다. 하늘에 사시는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와 성전에 거하시기 때문에, 성전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 안에 대제사장이 있고, 또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집에서 사람들을 돌보고 이 성전을 지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이 성막은 보통 성막이 아닙니다. 출애굽 백성들이 만들었던 성막보다 "크고 더 완전한", 게다가 "손으로 짓지 않은 장막" 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장막 안에서 성령받은 사람들이 섬길터인데, 대체 어떤 장막일까요?
 
  오늘날은 '손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값이 올라갑니다. 수제버거도 있고요. 수제 초콜릿도 있고요. 수제 가방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손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별로 좋은 뜻이 아닙니다. 불완전한 사람이 만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손으로 짓지 않았다'는 말이 더 좋습니다. 그 말은 사람이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손으로 짓지 않은"이란 표현을 씁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손으로 지은 건물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 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 하나님의 장막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고소 고발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가복음 14:58
"우리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세우겠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실제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 마저도 건축 비용으로 사용했던 그 화려한 건물입니다. 그런데 이 화려했던 건물 성전은 로마군에 의해 A.D. 70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성전이 아니라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의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즉 "더 완전한, 손으로 짓지 않은 하나님의 장막"은 부활하신 예수의 몸을 가리킵니다. 그 몸의 우두머리, 대제사장은 예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받은 이들은 그 예수 안에서 대제사장과 함께 사람들을 섬기고, 그 몸을 지키는 제사장들인 것입니다.

  메시아는 부활의 몸을 통해, 제사장들의 곁에 계십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 여러가지 생각이 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생각납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이야기를 하며, 낙담한채 엠마오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어떤 남자가 나타나더니, "무슨 얘기들 하십니까?" 하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며 같이 길을 걸었는데, 숙소에 도착하자 그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비로소 엠마오로 가는 글로바 부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가던 길을 되돌아 제자들이 모여있는 예루살렘으로 뜁니다.

  같은 시각 사라지신 예수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어안이 벙벙할 때, 집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소리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자신들도 알고 있다고. 여기있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이렇듯 예수는 곁에 계셔도 계신줄 모르고, 또 갑자기 눈에 안보이기도 하십니다. 부활한 예수는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떡과 고기도 잘 잡수실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부활하신 예수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하나님이 자신과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다음의 구절은 거짓말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임마누엘의 약속은 부활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대제사장이신 부활의 몸을 통해서 늘 우리 곁에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곁에 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숨 소리입니다. 숨 소리가 들리면 곁에 있음을 압니다. 성령은 원문으로 거룩한 숨결입니다. 눈을 감았든 떴든 곁에 계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우리와 연결된 메시아이십니다.

  에베소서 1:22는 예수쎄거 만물을 그의 두 발아래 놓았다고 말합니다. 즉 만물과 예수는 붙어 있습니다.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 만물을 위해서 머리로, 교회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머리는 곧 제사장들의 우두머리인 대제사장이란 말이고, 예수를 대세사장으로 받은 교회는 제사장들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분의 몸입니다. 우리가 곧 그분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 몸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 에베소서 1:22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몸은 만물 안에서 그 만물을 넘치게 한다"

  그런데 "만물 안에서 그 만물을 넘치게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이것이 제사장들이 해야할 일인데, 곧 교회가 해야할 일인데 "만물 안에서 그 만물을 넘치게 한다"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요한계시록 구절이 눈을 번뜩이게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5에 보면 이렇게 써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즉 평소에는 넘치지 않던 무언가가, 넘치게 되면 그것이 새로움입니다. 만물 안에서 그 만물을 넘치게 하는 것은 새롭게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 여러분, 식물이 평상시에는 입사귀를 늘어뜨리고 있다면, 그 식물의 생명력이 넘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합니까? 물을 주고, 정성을 들여 돌봐줘야 합니다. 평상시 쾡한 눈을 가지고 있는 청소년이 있습니다. 그 청소년이 평소에 없던 생기를 가지고 살게 하려면 어떻게 해줘야 합니까? 잘 해줘야겠지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넘치게 하는 것, 곧 새롭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제사장들이 모여서 해야할 일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22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메시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즉 제사장의 모임인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아넹서 하나님 거하시는 성전이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우리도 온전한 몸을 가지고 부활하게 될 것이며, 예수의 부활몸이 완전한 성전이듯, 우리도 역시 완전한 성전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성전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오늘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3. 그런데 이 장막은 바로 이 (옛) 창조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장막"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습니다. 이 장막은 부활한 예수의 몸이며, 우리는 그 몸,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에 참여한 제사장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온전한 성전의 온전한 부분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 부활의 몸은 바로 이 옛창조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럼 옛창조는 무엇일까요? 창세기 1장에 창조되었던 것이 옛창조입니다. 이 옛창조는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이 몸 역시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 줌 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두 죽음의 쓰레기통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옛창조입니다. 이 옛창조의 만물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옛 창조가 죽음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을 때, 이 옛 창조의 세계 위에 새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새 창조입니다. 만물은 모두 죽고 소멸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 것이 됩니다. 이것을 이사야서와 요한계시록이 가르쳐줍니다.

요한계시록 21:1, 개인번역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즉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사야 65:17, 개정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것은 옛 창조에 속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새 창조였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새 창조에 참여한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곧 예수를 믿는 이들이요, 하나님의 제사장들이요, 교회입니다. 곧 우리 입니다. 이들은 옛창조가 붙잡아 둘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새번역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교회가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를 분명히 일러줍니다.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즉 인간, 세계, 우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먼저 새로워지기 시작한 사람들, 하나님의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를 가리켜 출애굽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우리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8장은 만물이 우리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새롭게 하는 일이 메시아 예수의 부활을 통해 시작되었고, 우리를 통해 이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는 새창조의 일이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사랑은 옛창조의 것입니까, 새창조의 것입니까? 바울은 사랑만이 온전한 것이요. 새창조를 이루는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8~10, 개인번역
사랑은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없어질 것입니다.
말들도 멈출 것이고,
깨달음 역시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분으로부터 깨닫고,
부분으로부터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전함이 오면,
부분으로부터 온 것은 없어집니다.

  사랑은 새롭게 함입니다. 새롭게 하려면 사랑해야 합니다. 이 일이 메시아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두고, 그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우리가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이야 말로 새 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창조의 역군으로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넘치게 하는 일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착한 사람되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새창조의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은혜로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처음 읽었던 히브리서 9:11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곧 있을 좋은 사람들의 대제사장으로서
  크고 더 완전한, 손으로 짓지 않은 장막을 통해 곁에 있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장막은 바로 이 (옛) 창조에 속하지 않습니다."


(기도)


  하나님 여기 제사장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도 곁에 계십니다.
  우리를 예수 안에 있게 하신 은혜에 만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듯이,
  만물이 새롭게 될 날을 고대합니다, 주님.

  우리가 그 새로움에 동참했으니,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새로움이 나타나게 해주시옵소서,
  끝까지 사랑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고,
  이 땅에서는 본적이 없는 새로움, 그 사랑이
  우리 제사장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 위에
  드러나게 해주시옵소서.

  메시아 예수의 이름으로, 아멘


반응형

'히브리 사람들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브리서 2:10~18  (1) 2017.09.05
히브리서 2:1~9  (4) 2017.09.01
히브리서 1:6~14  (2) 2015.12.19
히브리서 1:1~5  (3) 2015.12.12
[공지] <히브리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0) 201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