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저자를 알 수 없는 편지가,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히브리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표현창세기 14:13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브람에게 처음 붙은 말이다. 이후 그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당신은 히브리 사람인가? 나는 히브리 사람이다. '수원에서 나서 수원 바닥을 벗어나본 일이 극히 드문 네가 무슨 히브리 사람이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할 말이 있다, 내가 히브리 사람인 이유.


  온 우주가 창조되었다. 사람이 표현한 진,선,미도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거늘, 하물며 진선미의 본체인 창조주 자신의 작품은 어떠하겠는가! 그야말로 '좋음'. 그러나 그 '좋음'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자율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에 의해 산산히 부서졌다. 그러나 이후 창조주는 그 '좋음'을 완성하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냈다. 이들이 히브리인이다. 혈연이나 특정 지역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창조주가 불러낸 모든 사람이 히브리인이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을 완성하기 위해, 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


  그러니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곧 나에게 전달된 편지인데,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이제야 두루마리를 펴본다. 아마도 창조주의 좋음으로 가는 길을, 그 옛날 이름 모를 히브리 사람이 남겨놓지 않았을까 하는 희미한 추측을 가지고, 글자를 따라간다. 그 편지의 서두는,



히브리서 1:1~5

  1)그 옛날, 여러 시대,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고,
2)이 마지막 날들에는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들은, 모든 것(만물)의 상속자로 임명되셨고,
하나님은 그이를 통해 이 시대들을 창조하셨다.
3)그이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뚜렷한 밝음,
하나님 본질(ὑπόστασις)의 '캐릭터'이며,
잠재력 있는 이야기로 모든 것을 나르신다.
그 비뚤어짐들의 정화를 행하셨고,
높음들 안에 (계신) 장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4)그이는 천사들보다 더 위대하시니,
그이에게 상속된 이름이 그들(천사들)을 압도할 정도다.

  5)하나님께서 천사들 중 그 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는가?

    "나의 아들이 너다.
    나는 지금 너를 낳았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되리라"



1.


  개똥철학부터.


  '사건'이 클까 '말'이 클까. 말들이 많지만 아무리 말이 많더라도 사건보다 클 수는 없다. 우리는 사건의 다면적인 측면 중에 어느 하나를 말로 포착해서 들어올릴 뿐이다. 그리고 사건에 관해서 '말' 이라는 젓가락질로 무언가를 들어 입에 넣는 순간, 그것은 '해석'이 된다. 그래서 "인간이 말하는 모든 것은 해석이다." 인간을 거치고 나면 해석 아닌 게 없다. 그러니 말하는 사람이란 온 몸에 진흙을 묻히고 들어온 어린아이와 같다. 그가 무엇을 집던 진흙은 묻게 되어 있다.


  옛적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만이 인간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앎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예수의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신게다. 사건과 무관한 비역사적 앎은 기득권의 권력이 된다. 사람들은 모르는데 자기 혼자만 안다고 우기게 되므로 못 되면 왕따요, 잘 되면 남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니 비역사적 앎은 추구할 게 못된다. 그러니 우리는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잠시 삼천포로 빠지더라도 다시 '사건'으로 돌아오자. '사건으로 돌아오자'는 말은 듣는 이들이 발화자의 말에서 진흙을 털어내고 다시 스스로 사건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해석이 아니라 사건에 집중해야 한다. 이후 그가 말하는 것도 하나의 해석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해야한다. 그 방법만이 사건이라는 환원불가능한 진실에 '접근'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이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대화를 통한 사건에의 접근. 이 방법이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직시하면서도, 대화를 멈추지 않는 것. 줄여 말하면 겸손과 정직이다.


  여기 2000년 전 어느 히브리인의 사건 해석이 있다. 이 히브리인 역시 한계가 있지. 그가 말하는 것은 사건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사건은 결코 말로 환원될 수 없다. 심지어 성경이라도 그러하다. 그럼에도 그의 해석을 아는 것은 '사건'을 아는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지구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도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사건과 말을 혼동하며, 어떤 사건에 대해서 단편적인 해석 몇가지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 그것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고 단정짓는다. 스스로 재구성해보지 않아서 온갖 허튼 진흙들로 덮어놓은채 자신의 사고에 들여놓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아니다. 이건 다음에 얘기하자.


2.


  그래, 일단 본격적으로 이 히브리 사람의 편지를 읽어보자. 이 사람은 지금까지 지구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크게 두 범주로 나누어 생각한다. 하나는 '옛날', 다른 하나는 '마지막 날들'.


  '옛날'에 벌어졌던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여러 시대들 속에서, 여러 방법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은 예언자들로 이 히브리 사람의 조상들, 즉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새로운 때매김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마지막 날들'이다. 이 표현은 가만 들여다 보면 이상한 표현이다. 마지막은 말 그대로 마지막이어야 한다. 뒤가 없어야 마지막이지. 그러니 '마지막 날'이어야 하고, 그 뒤에는 날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마지막 날'들'이다. 이 히브리 사람의 세계관 속에서 무언가 마지막이 유보되고 있고, 따라서 마지막 날들이 지속되고 있다.


  이 '옛날'과 '마지막 날들'의 때매김이 성경읽기의 기본이다. 그들의 시간관을 이해해야, 그들의 사건 해석에도 접근할 수 있다. 시간관이 그들이 사건을 읽는 선 자리다. 시간관을 모른채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이 히브리 사람은 자신이 역사의 끝자락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옛날부터 시작된 역사는 이미 절정에 달했다. 끝났다. 그러나 그 끝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 날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이 다르다. 옛날에는 여러 시대, 예언자들로, 여러 방법으로 하셨다면, 이 유보되고 있는 마지막 날들 속에서는 '예언자들로'가 아니다. '아들로'다. 여기서 ''는 희랍어 엔(en)으로 뒤에 여격이 올 경우 '도구'로 해석된다. 그간 이 en이 "~안으로"라는 의미로 주로 이해되어 '소속'을 나타내는 말로 여겨졌지만, 달리 볼 수도 있다. 위에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의미가 잘 들어맞는다. 옛날에는 예언자들로, 마지막 날들에는 아들로. 그렇게 말씀을 전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 아들은 모든 것의 상속자가 '되셨고',

  하나님은 마침내 그 아들을 통해서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실 수 있었다.


  그럼 상속자에게 주어지는 상속물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창조세계 전체가 그의 상속물이다. 그리고 그 모든 창조세계가 이 아들에게 상속된다. 즉 하나님은 아들에게 그 창조세계 전체를 맡기실 수 있게 되었다. '아들에게 맡겨진 창조세계'. 그렇다면 아들에게 상속되기 전에는 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차지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세계를 강탈한 타락한 사람들. 그들이 포도원을 약탈한 강도들이었다.


  이쯤되어 토지 문제를 다뤄야겠지만, 넘어간다. 나중에 얘기하자.


  어찌되었든 중요한 건, 이 새로운 상속자는 이전 약탈꾼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이는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말 그래도 아들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과의 관계를 통해 창조세계 전체를 새롭게 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 아들에 대한 히브리 사람의 묘사를 들어보라. 그는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는 밝음이고, 하나님의 캐릭터다. 곧 하나님 그 자신이다. 여기서 캐릭터라는 말은 희랍어 '카라크테르'에서 왔다. 동전을 주조할 때 스탬프를 사용해서 정확하게 남기는 문양을 가리키는 말이라 한다. 나는 앞에서 사건과 해석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아들은 무엇인가? 이 아들은 하나님의 사건이다. 해석이 아니다. 하나님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밝음. 하나님이 직접 찍어 주조한 동전, 이 아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읽으라고 이 땅에 새겨주신 환원불가능한 불변의 사건이다. 


3.


  그리고 이 아들은 모든 것을 (새롭게) 가져오신다. 그런데 그가 만물을 새롭게 가져오시는 방법이 '힘있는 이야기'이다. 개역성경에서는 '능력의 말씀'이라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를 쓰고 있다. 레마는 연결된 말이다. 이어지는 말이다. 이야기라 하면 어떨까.


  힘 있는 이야기를 사용하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아들.

  이미 예수께서 자신의 공생애를 통해 보여준 사역의 주된 모습들이 이 모습 아닌가. 그는 항상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비틀었고, 이야기를 포개어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가 모두 그러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만들었고, 오늘 나를 포함해서 무수한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연구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해도 계속 결과물이 쏟아져 나온다. 이야기라는게 그렇다. 하나님 아들의 방법이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다이나마이트(희랍어 '듀나미스'로부터 이 단어가 나왔다. 폭발적인 힘) 같다고 한다. '이야기'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어떠한가? 부드럽지 않은가? 강요하지 않고, 할머니가 들려주는 새로운 시간과의 만남. 새로운 인물과 줄거리, 그리고 다행스러운 결말. 이야기는 참 따뜻하잖아? 그런데 그 이야기가 폭발적인 힘이 있다는 말은, 진리가 이야기로 전달될 때를 말하는 것 아닐까. 예수께서 그리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캐릭터 예수는, 힘 있는 이야기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해석'하셨고, 자신이 해석한 그대로 살았다. 그 결말은, 우리의 비뚤어짐의 끝을 깨뜨리는 것. 곧 십자가다. 자신의 말을 사건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말을 사건으로 만들어서 환원불가능하도록, 불변의 것으로, 그 어떤 해석으로도 흠집을 낼 수 없는 '사건'의 형태로 이 대지 위에 박아 두셨다. 우리의 비뚤어짐의 끝은 멸망인데, 그 멸망을 스스로 받아내셨다. 그리고 역사는 뒤집어진다. 복수의 칼날 앞에서, 복수가 아닌 화해와 용서로 대면할 수 있음을 창조 세계 안에서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런 그이가 하나님의 캐릭터다.


  하나님은 자신의 화신, 예수를 다시 일으키셨고, 다시 살아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만물의 상속자로 임명되셨다. 이는 A.D.1 를 살았던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다니엘서의 '인자 이야기'의 반영이다. 짐승이 다스리던 창조세계, 그런데 옛적부터 계신 창조주가 그 짐승들을 심판하고, 인자와 같은 이는 죽임당하나 다시 살아서,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이양받는다. "지극히 장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는다"는 말은 그런 의미.


  사랑의 화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 앞에 모든 천사들이 압도된다.


  하나님은 그이와의 관계를 천명하신다. 이 천명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의 '사건' 전에 이미 이뤄졌다. 시편 2편과 사무엘하 7:14. 여기서 뒷꼭지가 얼얼해진다. 사람은 말을 만들지만, 하나님은 사건을 만드신다. 사람의 말은 사건을 해석하지만, 하나님의 말은 사건을 만든다. 다시 말해, 우리 역시 말을 하고 그 말을 사건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왜 무수한 자기 개발서들이 '작심삼일을 넘어 노력하는 인간'을 지향하는지 이제야 알겠지. 말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시고, 말을 이루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49분이 지나면 내가 난지 11959일이다. 하나는 아버지요, 하나는 아들. 9는 동양에서 완전을 뜻하는니, 나(吾)는 완전에 둘러싸여 있구나.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 속에. 그 사랑의 온전한 연합 속에. 게다가 9는 10진법의 끝 수라, 그 다음은 0이다. 마지막 날들을 사는 히브리 사람에게 적합한 수.



  여기는 12586일 (만 34년5개월13일) 이다. 안산에서 히브리서를 강해하게 되었고, 다음 주에는 4절부터 강해하기로 되었다. 말씀을 놓고 해석하는 일은, 말할 수 없음에서 말할 수 있음으로 전이되는 창조의 작업이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이 즐거움이 사라지고 나면 말라버린 글자들만 남는다. 사도들은 어려운 중에서도 기뻐했다. 그 기쁨은 없던 것을 이 땅에 도래시키는 창조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 즐거움이 필요하다. 그 즐거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한다 한들, 그 과정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그 일의 결과를 보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지난 주 나는 그 즐거움이 사라질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재미없을 것 같은 위기.


  생각을 골똘이 하게 된다. 그 골똘함 속에서 메시아의 시간을 묵상한다. 자신의 현실을 위기상황이라고 느끼는 것은, 스스로를 메시아의 시간으로 밀어넣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에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끔찍한 파국 속에, 메시아가 계셨다. 파국의 상황이 메시아를 호명한 것인가? 파국의 상황 속에서도 남는 것이 진짜고, 불 속에서 연단되어 나온 금이다. 메시아는 파국의 상황 속에서 진짜를 낳았다. 매순간 파국의 현실을 체감하고, 그 파국 속에서 짓이겨지지 않은 금으로 나타날 수 있다면, 그가 겪고 있는 시간이 메시아의 시간이다. 내가 느끼는 것이 파국이라면, 이 파국은 오히려 나를 낳기 위한 부모의 태이지, 날 죽이기 위한 올무가 아니리라. 그럼 오늘의 글자들을 보자.

*구문 단위로 독해할 것
*단어의 유기적인 연결에 주목할 것


높음들 안에 (계신) 장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4)그이는 천사들보다 더 위대하시니,
그이에게 상속된 이름이 그들(천사들)을 압도할 정도다.

  5)하나님께서 천사들 중 그 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는가?

    "나의 아들이 너다.
    나는 지금 너를 낳았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되리라"


  본문의 첫 줄은 '승천'을 보여주고 있다. 메시아께서 장엄하신 분의 오른쪽을 차지하신 것이다. 장엄하신 분의 옳은 판단이 곧 메시아의 판단이다. '앉다'는 표현은 다스리고,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옳은 판단으로 땅을 다스린다. 바로 이것을 위해 하늘에 "앉으신"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가 하늘에 앉은 사건은, 이전의 시간과 승천 이후의 시간은 '절합'한다. 승천 이후 에클레시아가 메시아와 공유하는 '거룩한 숨결'은, 곧 메시아의 판단이며 판단을 수행하는 실천력에 다름 아니다.

  승천이 언급된 이후, 히브리서 기자는 자연스럽게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이 천사 이야기는 2장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 천사에 관한 진술들은 '모두 메시아가 천사보다 크시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히브리서의 천사 담론은, 중세에 이르러 천사 계급론으로 발전된다. 정점에는 메시아가 계시고, 그 메시아의 하급 관리로서 천사들이 하이라키(hiarachy)를 이루고 있는 세밀한 구성이 연구되었고, 이것은 근래까지 이어졌다(페테르존 <천사론>, 1935). 그리고 천사들의 '위계'는 천사들의 '권력'이 되고,[각주:1] 신과 인간 사이를 채우는 천사들은 힘을 가진 영적 실체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히브리서의 주제, 또한 신약성경이 말하는 천사 개념과는 오히려 정면으로 부딪힌다. 기자는 메시아가 천사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 동질성'을  말하려는게 아니라, 천사들과의 '단절, 차이'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7:53, 새번역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3:19, 새번역 

그러면 율법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율법은 약속을 받으신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범죄들 때문에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개자의 손으로 제정되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천사는 '토라의 전달자'로 이해된다. 땅의 소유권을 제국에게 빼앗기고, 성전이 무너저버린 제 2성전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 토라는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표지였다(토라 낭독만으로 예배가 가능하다는 원칙이 생긴 것도 이때였다). 따라서 토라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록, 신과 인간의 매개로서 천사도 함께 중요해졌고, 이것은 이방의 비의들과 만나 보이지 않는 천사들에 대한 지나친 존경으로 이어졌다(요한복음 5:4). 천사는 토라를 전달하고, 또한 해석을 도우며, 보이지 않는 세력이다. 즉 신과 인간 사이의 공백을 천사가 채운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메시아는 천사를 압도한다"고 말한다. 이로서 기자는 히브리인에게 천사를 통해 주어진 토라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도래했음을 알리고자 한다. 승천 언급 이후 메시아의 천사 압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제 천사들을 통해 주어진 토라의 시대는 끝났다. 즉 메시아가 토래를 재해석했고, 메시아와 인간 사이의 공백은 천사가 아니라 성령이 채우는 새로운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의 메시지와 그 해석에 매달려 있는 것은, 새 시대를 대하는 에클레시아의 태도가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이어지는 인용은 시편 2:7과 사무엘하 7:14의 조합이다.

   "나의 아들이 너다.

    나는 지금 너를 낳았다.

    (시편 2:7)  

           +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되리라"

    (사무엘하 7:14)


  시편 2편은 메시아의 시편으로서, 베드로가 인용하고(사도행전 4:25), 특히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수도없이 인용한다(2,5,12,14,15,19장). '메시아'라는 말은 히브리인에게 자신들을 지배하는 제국을 포함해서,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통치자를 의미했다. 
  사무엘하 7:14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메시아를 통해서 새로운 집을 건설하겠다'는 말을 (나단을 통해서) 전하시는 대목이다. 즉 이 두 구절의 조합은, 마침내 메시아가 나타났고, 그 메시아를 통해서 "영원히 보전되는 다윗의 왕조"가 시작되는 새로운 시절이 도래했음을 말한다. 다윗의 왕조는 메시아를 통해서 보전되므로, 메시아를 거절한 다윗 왕국은 다윗 왕국이 아니라는 단절을 표명하는 인용인 것이다. 


히브리서 1:1~5


  1)그 옛날, 여러 시대,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고,
2)이 마지막 날들에는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들은, 모든 것(만물)의 상속자로 임명되셨고,
하나님은 그이를 통해 이 시대들을 창조하셨다.
3)그이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뚜렷한 밝음,
하나님 본질(ὑπόστασις)의 '캐릭터'이며,
잠재력 있는 이야기로 모든 것을 나르신다.
그 비뚤어짐들의 정화를 행하셨고,
높음들 안에 (계신) 장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4)그이는 천사들보다 더 위대하시니,
그이에게 상속된 이름이 그들(천사들)을 압도할 정도다.

  5)하나님께서 천사들 중 그 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는가?

    "나의 아들이 너다.
    나는 지금 너를 낳았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되리라"



  1. <왕국과 영광>, 조르조 아감벤, p.323 "아퀴나스가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이용어는 "성스러운 질서"가 아니라 "성스러운 권력"을 의미한다" <신학대전>, 108 문제, 제1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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