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선언한 히브리서의 서문(1:1~4)을 지나, 천사의 지배가 종결되었음을 살펴보았고(1:5~2장), 이제 3장으로 들어왔다.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눈여겨보자. "여기서부터"라 번역된 말은 히랍어 호뗀(Ὅθεν)이다. 그럼 '여기()'는 어디인가? 기자는 2:14의 대제사장이라는 키워드를 염두하는듯 하다. 2:14에서 언급된 이후, 대제사장은 히브리서의 중심 주제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메시아 예수가 대제사장임을 밝히고(2:14),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대제사장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를 살펴보자는 말이다.

히브리서 3:1~6, 개인번역

여기서부터, 거룩한 형제들이여,
하늘에의 부르심의 참여자들이여!
생각하라, 그 사도 곧 대제사장
우리가 한 가지로 말하는 예수를,
그이를 임명하신 분께 신실한 이,
마치 모세도 그이의 온 집 안에서 신실했던 바와 같이.

  이 앞에서 "거룩한 형제들"을 3장에 와서는 "하늘에의 부르심의 참여자들"이라 부른다. 원문으로는 '클레세오스 에푸라니우 메토코이(κλήσεως ἐπουρανίου μέτοχοι)'인데, 메토코이는 우리가 앞에서 확인했던 '메타에코(μετεχω)'의 명사형이다. 즉 메시아 예수를 통해 '함께 되어감'의 단계로 진입한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 단어는 이미 1:9에서 등장한 바 있다. 이때는 "당신과 나누는 자들"이라 번역했다.

히브리서 1:9, 개인번역
당신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곧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쁘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당신과 나누는 자들 곁에서."

  중보는 '메시아와 함께 존재적 변화를 겪어나감'이다. 그렇다면 이 존재적 변화가 '하늘'과는 어떤 상관이 있는가?

-하늘 
  이 하늘을 부르심의 출처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부르심을 통해 들어가게 되는 목적지로 봐야하는가? 그레 아니라면, 하늘에서 부르심을 받아 하늘로 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때 '하늘'은 '땅'과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가?
  '하늘'이라 번역된 단어는 에푸라노스(επουρανος)인데, 이 단어는 '에피(επι)' + '우라노스(ουρανος)'의 조합이다. 우라노스만 써도 '하늘'이란 의미가 된다. 그런데 '에피'가 붙어있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적 부가'를 나타낸다. 왜 에피가 붙었을까? 신약성경에서의 에푸라노스의 다른 용례들을 살펴보자. 특히 에베소서에 나오는 에푸라노스를 살펴보고자 한다.


에베소서 1:3
좋게 말되신 분 하나님, 우리 주님 메시아 예수의 아빠,
그분은 우리를 모든 좋은 말 속에서 좋게 말하십니다,
그 모든 말은 메시아 안에서 "하늘들 안에 있는" 숨결에 속한 말들입니다.

  '하늘'을 땅과 분리되어 멀리 떨어진 차원으로 생각하면, 위의 구절들을 이해할 수 없다. 에클레시아는 숨결에 속한 말을 한다. 그런데 그 숨결은 하늘들에 속해있다. 따라서 하늘들에 속한 것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구현된다.

에베소서 1:20
...하늘들 안에 계신 그의 오른쪽...

  메시아가 계신 곳을 "하늘들"이라 말한다. 그 하늘들은 성막으로 재현되는데, 곧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하늘들에 계신 메시아를 만나는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2:6,7
그리고 (우리를) 함께 일으키시고
메시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들 안에 앉히셨다,
이는 오는 시대들 안에서 그이의 은혜의 과도한 넘침을 알리고자 함이다,
메시아 예수 안의 우리에게의 최고의 유용성 안에 있는(그이의 은혜를)


  그리고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 안에서 에클레시아를 "하늘들 안에 앉히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하늘들 안에 앉음은 "최고의 유용성"과 연결된다. 이 유용성(
χρηστότης)을 땅과 무관한 것이라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에베소서 3:10
...이는 이제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늘들에 있는 지도자들과 권세들에게
에클레시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의 다채로움을...

  하늘들에 있는 지도자들과 권세들에게, 지혜의 다채로움을 알게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 에클레시아인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하늘에의 부르심"에서 '하늘'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새로운 차원이며, 부르심의 출처이자, 부르심의 목적지인 것이다. 이때 붙는 에피는 근접성이다. 완전히 하늘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하늘과 무관하지도 않은 그 하늘과의 근접성이 '에피'로 표현된 것이다. 이 에피는 사도이자 대제사장이신 메시아 예수로부터 얻는 하늘과의 접점이다. 에클레시아는 하늘과의 접점으로서 하늘들과 관여하는 것이다. 접점.

-접점, 매개 : 그 사도 곧 대제사장
  예수를 사도라 부른다고 낯설어할 필요없다. 본문의 사도, 곧 대제사장이란 표현은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하늘과 땅의 긴밀한 관계를 '연결'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보냄받은 자'란 뜻으로, 메시아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았다고 자주 얘기한 바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자를 통해서 하늘과 땅의 연결이 폭로된다.
  대제사장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갖는다. 그는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성막의 가장 깊숙한 내부인 지성소로 들어가 이스라엘의 죄를 하나님께 가져가는데, 이로써 하늘과 땅은 대제사장의 매개를 통해 연결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용서가 이뤄진다.

  그런데 유대인에게 이 매개의 역할로 대표되는 사람은 '모세'이기 때문에, 기자는 모세와 예수를 비교하고자 한다. 마치 앞에서 천사와 예수를 비교했던 바와 같이.

왜냐하면 모세보다도 더 넘치는 영광의 그이가
합당하셨기 때문이다, 다음을 따라서 말이다,
  그 집에 속하는 더 넘치는 영예는,
  그것을 틀 잡으신 이가 갖는다는.


왜냐하면 모든 집은 누군가에 의해서 틀 잡히는데,
모든 것을 틀 잡으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기자는 예수를 "그 집의 틀 잡으신 이"라고 말한다. "틀 잡다"라고 번역한 단어는 '카타스케우아조(κατασκευάζω)'인데, 갖추도록 하고 집의 구조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틀 잡으시는 "그 집"이란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킨다. 하나님 자신의 집, 곧 성전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성전의 영예는 그 성전의 건축자가 갖는데, 그이가 바로 예수요, 히브리서 기자는 그를 하나님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 건축자이자 하나님이신 예수가 "모세보다 더 넘치는 영광"을 갖는다. "더 넘치는 영광"이므로, 모세도 영광이 있다. 이는 마치 고린도후서 3장에서의 바울의 논리와 유사하다.

고린도후서 3:7~11, 개인번역
판결의 섬김에 영광이 있다면, 의의 섬김은 더욱 많은 영광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즉 바로 그 부분 안에서 영광스러웠던 것은 영광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압도하는 영광 때문에 말입니다. 만일 폐지되었던 것도 영광을 통해 있었다면, 영광 안에 머무는 것은 훨씬 더 한 것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모세는 그분의 온 집 안에서 신실했지만
(미래에) 말 될 것들의 증거를 위한 시종으로서였고,
다른 한편으로 메시아는, 그분의 온 집의 아들로서(였다).
(우리가 그 집이다, 만일 우리가 파레시아와 희망의 찬양을
끝들 까지(
μέχρι τέλους) 확고하게 붙들고 있다면 반드시).

  그러나 모세는 그 집의 틀 잡은 이가 아니라, 그 집 안에서 봉사했던 시종이었다. 물론 '시종(θεράπων, 신약성경에서 여기 한 곳에서만 나온다)'이라 해서 경멸의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께 신실한 종'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민수기 12:7, 개역한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다만 그 집의 틀을 잡고, 게다가 그 집 전체를 상속받을 아들과 그 집의 시종은 분명히 다르다. 기자는 모세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치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압도하는 영광의 메시아이신 예수를 드러내고자 한다.

  뒤에 이어지는 그 집의 정체는 충격을 안겨준다. 모세가 섬겼던, 그리고 그이가 골조를 세웠던 그 하나님의 집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었던 것이다.

-파레시아
 파레시아(παῤῥησία)는 흔히 '담대함'이라 번역되는데, 이 단어는 발언의 자유를 의미한다. 말하는데 있어서의 담대함, 곧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음(παν+ρησις)'이다.

사도행전 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파레시아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파레시아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28:31
담대히(모든 파레시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에베소서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골로새서 2:15, 개인번역
지도자들과 권세들을 벗겨,
파레시아 안에서 구경거리로 내보이셨다,
그 안에서 그들을 이기어 행진하셨다.

디모데전서 3: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요한일서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즉 사람들이 말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곧 파레시아이다. 유대 세계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은 모세를 넘어선 권위자였고, 로마 세계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은 황제를 넘어선 권위자였다. 모세와 황제가 말하는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권위는 불허되었고, 이것이 유대와 로마의 충돌 원인이기도 했다. 즉 모세의 추종자들과 황제의 추종자들에게 완충지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레시아가 필요하다. 모세와 황제를 뛰어넘어, 서로를 하나되게 할 수 있는 신적 권위를 말하는 것이 곧 파레시아이며, 그 내용은 메시아 예수에 대한 선언이다. 때로 이러한 파레시아는 터문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며, 바보 취급을 당할수도 있는데 이는 이미 예수가 예견한 상황이다.

마태복음 5:13, 개인번역

너희들은 그 코스모스의 그 소금이다.
만일 그 소금이 바보 취급을 당하면,
무엇에게 소금으로 뿌려질 수 있겠느냐?
어떤 것에게도 그것은 여전히 강하지 않다,
밖으로 던져져 그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것 말고는.

  따라서 파레시아를 '담대함', '말하기 위한 용기'라 이해한다면, 이것은 바보 취급당할 용기로 이해할 수 있다. 파레시아는 현실을 두동강내는 양날검과도 같다. 파레시아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뉜다(그렇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파레시아하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거나 그 입을 막아버리려는 사람들로 또 나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파레시아의 말을 듣고나서는, 그 말 없는 현실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 말에 대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해야 한다. 현실의 두 가지 차원을 갈라 보여주는 말이 파레시아이다. 

  기자는 이 메시아 예수의 "더한 영광"에 관한 담대한 말하기가 파레시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파레시아를 수행하는 것은 '집'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 집은, 현실을 두동강내는 말을 하며 함께 바보 취급당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파레시아는, 앞에서 "더욱 많은 영광"을 말하던 고린도후서 3:7~11이후, 12절에서 등장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고린도후서 3:12,13, 개인번역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파레시아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자신의 얼굴에 베일을 (덮어) 놓았던 것과는 달리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아들들이 그 폐지된 것의 끝을 향해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즉 바울에게 모세는, 끝까지 담대하게 말하지 않고 율법의 폐지에 관해 감춰놓은 사람이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그 모세가 감추어놓았던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파레시아의 사람들이다. 그 파레시아의 내용이 모세의 영광을 압도하는 더 한 영광이고, 그 영광이 메시아의 드러남인 것이다. 기자가 파레시아 옆에 "희망의 찬양"을 덧붙여 놓은 것은 바로 그 더 한 영광의 드러남을 소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히브리서 3:1~6, 개인번역

여기서부터, 거룩한 형제들이여,
하늘에의 부르심의 참여자들이여!
생각하라, 그 사도 곧 대제사장
우리가 한 가지로 말하는 예수를,
그이를 임명하신 분께 신실한 이,
마치 모세도 그이의 온 집 안에서 신실했던 바와 같이.

왜냐하면 모세보다도 더 넘치는 영광의 그이가
합당하셨기 때문이다, 다음을 따라서 말이다,
  그 집에 속하는 더 넘치는 영예는,
  그것을 틀 잡으신 이가 갖는다는.


왜냐하면 모든 집은 누군가에 의해서 틀 잡히는데,
모든 것을 틀 잡으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한편으로 모세는 그분의 온 집 안에서 신실했지만
(미래에) 말 될 것들의 증거를 위한 시종으로서였고,
다른 한편으로 메시아는, 그분의 온 집의 아들로서(였다).
(우리가 그 집이다, 만일 우리가 파레시아와 희망의 찬양을
끝의 굳건함에 이르도록 붙들고 있다면 반드시).

히브리서 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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