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54日,

from 치부책 2015. 5. 22. 22:14

  게임 얘기를 해봅시다. 저는 어릴 적에 게임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컴퓨터를 일찍 사주시는 바람에, 저는 어려서부터 게임 덕후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런 저런 게임기를 수집하기도 했습니다. 저희 집을 거쳐간 게임기가 몇 대인지 모를 만큼 다양한 기종들을 접해봤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아버지 손에 작살난 게임기도 있습니다만.


  게임은 참 매력적입니다. 게임 속 주인공이 달려갑니다. 항상 게임 속 주인공이 달려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적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까닥하다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산을 넘어야 하고, 물 속에 들어가기도 해야 하고, 보스가 나오면 보스가 쓰러질 때까지 싸워야 하기도 합니다. 이상하게도, 게임은 어려워야 재미있습니다. 깨기 쉬운 게임을 뭣 하러 합니까? 어려워야 맛입니다. 어려운 난관을 모두 극복하고서 조이스틱을 내려놓고 엔딩을 보는 그 쾌감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것 때문에 게임 합니다. 결국 악당은 죽고, 공주는 구출되며, 주인공이 승리합니다. 이것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죽어도 다시 일어나서 달리게 합니다. 몇 번을 쓰러져도 좋습니다. 다시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그 어려운 길을 즐거이 달려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것을 싫어합니다. 쉽게 쉽게 했으면 좋겠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다들 쉽게 살기를 바라는 이 세상은 정말 어렵기만 합니다. 힘들기만 합니다. 어려움을 만난다는 점에서는 게임과 삶은 똑같습니다만, 한 쪽은 지쳐서 쓰러지고, 다른 한쪽은 즐거이 다시 일어납니다. 게임의 주인공들은 모두 부활을 사는데, 왜 우리는 현실 속에서 힘차게 일어나지 못합니까?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차이는 엔딩에 있습니다. 게임을 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믿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어려운 길을 뚫고 나가면, 끝이 반드시 좋을 것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엔딩없는 게임은 없습니다. 몬스터랑 싸우는 것이 허무하지 않은 것은, 그 싸움 뒤에는 승리의 영광이, 평화로운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삶은 게임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삶의 엔딩은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별 볼일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을 것이 무엇있냐며 오히려 저에게 따져 묻습니다. 삶의 끝은 죽음이요, 헤어짐이요, 오늘 내가 최선을 다해서 이룰 것이 세상에 무엇이 있냐고 되묻습니다. 어차피 엔딩이 허무한 것이라면, 그 엔딩을 보기 위해 고생할 이유가 어디 있냐고 합니다. 그렇게 달려갈 이유를 잃어버린 마리오는 그저 그 자리에 따분하게 서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이 우주 전체의 엔딩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우주 전체가 하나의 작은 점으로 찌그러져서 망하던지, 아니면 죄다 꽁꽁 얼어버려서 망하던지, 아니면 우주는 둘째 치더라도 날아오는 행성에 의해서 (공룡이 그랬듯) 인류도 멸망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사람의 끝은 죽음이고, 우주의 끝은 멸망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의 엔딩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 엔딩을 믿지 않습니다. 과학은 아직도 우주가 찌그러지지도 않고, 얼어버리지도 않은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그저 미묘하게 조정되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죽음은 법칙이 아닙니다. 역사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예외적인 사건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주 속에서 죽음이 왕 노릇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 같지만, 우주가 집어삼키지 못한 한 사람의 이야기 말입니다. 역사는 그 충격적인 사건을 우리에게 목격자들을 통해 들려줍니다. 바로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일으키신 그 하나님은 우주가 멸망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주가 새로워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우주의 새로워짐이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하늘과 땅이 새로워진다는 말은, 곧 새로운 우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주가 버려지는게 아닙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새로워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활은 이 새로워짐의 시작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엔딩은 '부활'과 '새로운 우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극복해야 할 최종 보스는 죽음이고, 그 죽음을 이기는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제물 됨입니다. 살겠다고 죽음을 피해 보려는 게 아닙니다.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매순간 죽음 앞에 제물로 맞서는 것은, 나를 비우는 것이고, 나를 비우는 것은, 그 자리가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렇게 이깁니다.(왼뺨을 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이기는 사람들이 새로운 우주를 상속받습니다.


  이것이 기독인의 엔딩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 세계가 어떠한 엔딩을 맞을지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우주관을 가지고 있는지가,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주가 이렇게 될 것이 너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내 이길 것이라 믿는 사람은 죽음에 종 노릇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죽음의 종 노릇을 해도, 죽음은 당신에게 그 어떤 좋은 것도 주지 않는 악덕 고용주입니다. 그러나 나는 저 위용 넘치는 골리앗 같은 죽음이 결국 패배할 것을 믿는 작은 다윗입니다. 나는 죽음에 겁먹지 않습니다. 기꺼이 제물 됩니다. 내 살몸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이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김이 바로 올바름입니다. 정직입니다. 용서입니다. 사랑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사는 것이, 죽음을 이김이요, 믿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이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벌써 속에서부터 새로워졌습니다. 내 속에서 시작된 이 새로움이, 우주 전체를 덮을 것이 자명합니다. 이기는 동안 나는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삶에 절망하고 낙담한 이들, 죽음의 목전에서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달려가야 합니다. 속에 믿음 있는 이는, 하나님의 엔딩 전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제 속에서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들이 이 우주의 엔딩을 전하기 위해 달려갑니다. 


시편 73:28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과 우주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으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리오처럼, 쿠키런처럼 달려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안팎에 있는 삐뚤어짐을 이겨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곧 인류와 우주의 부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참 모습, 세계의 참 모습이 이러합니다. 

우리의 몸이 새로워질 그 날에 유리 바다 위에서 만납시다. 그 날에 우리 모두 악기에 따라, 이 위대한 일을 이루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외칩시다.


요한계시록 15:2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짐승 우상과 그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를 이긴 사람이, 하나님의 거문고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니 미리 노래 연습을 좀 해두어야겠습니다. 지금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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