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살몸으로 이 땅에 난지 11752일 되는 날입니다.
나는 살았습니다.
율법은 나를 죽이고, 성령은 나를 살립니다. 살기 위해 지키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어기는 자에게 죽음을 줍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 산다"는 모든 것은, '이렇게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강연이, 책이, 세상 권력들이, "이렇게 해야 산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어느 것 하나 실천할 수 없고, 그렇게 해봐야 나는 살지 못합니다. "이렇게 해야 산다"는 것들은 죄다 별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 조차도 생명을 주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해야 산다"는 어둠에 갇혀, "사람들을 이용해야 산다"는 이들에게 계속 이용당하고 착취당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준다는 모든 인과율이 예수의 십자가에서 산산조각 났습니다. 진실은 "이렇게 해야 산다"가 아니라, "이렇게 해도 죽는다"였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렇게"의 허위를 드러내시고, 예수는 장렬히 전사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죽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렇게 해야 산다" 앞에 나는 죽겠습니다. 나는 그러한 것들이 나를 살릴 수 없음을 압니다. 율법이 이루고자 했던 그 궁극적 목적이 "살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끝내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인간의 참상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살음"은 무언가를 하는데서 오지 않습니다. 십자가 이후 부활, 그리고 승천,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이 사람들 속으로 들어와, 새로운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넌 이미 살았어!"
나는 율법을 다 지키지 않고도, 율법의 열매를 얻었습니다. 그러니 나는 이제 "이렇게 해야 산다"가 아니라, "이미 살았으니 어떻게 할까?"가 되었습니다. 이미 살았다는 말은, 내가 부활했다는 말입니다. 새 창조는 무에서부터 만들어지지 않고, 죽음에서부터 이뤄진 창조입니다. 죽을 것이 분명했던 내가 다시 살았으니 이것은 부활이요, 먼 미래의 일이기만 했던 것이 나의 오늘이 되었습니다. 이제 '생존'은 나의 이룰 바가 아니라, 이미 이뤄진 토대이고, 따라서 저는 생존의 두려움 없이, 앞 일을 생각합니다. 세상은 行해야 生할 것이라 말하지만, 그리스도 덕분에 나는 行보다 生이 앞서게 되었으니, 나는 미래를 먼저 삽니다. 일을 해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해서 일어났으니, 이제 할 일을 죽을 걱정없이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나에게 생명을 거저 주신 분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당위는 잃었으나, 서사를 보존해왔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을 통해 전달된 그 내러티브를 따라 제2의 아담으로서, 예수 안에 있는 자로서, 자유롭게, 더불어 충실하게 세계를 다스리고자 합니다. 이 말이 I am what I am by His grace. 라고 말했던 바울이 뜻한바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살았습니다. 나도 살았습니다. 거저 살았습니다. 거룩한 숨결을 거저 받아, 내가 참말로 살았습니다. 죽어도 부활이요, 살아서도 부활입니다. 이제 새시대입니다. '올 시대(Age to come)'가 '온 시대(Age having came)'되었습니다. 다석의 표현대로라면 '산아이(The living child)'입니다. 요한복음 4장의 여인에게 주신다 하던 생수를 내가 받았습니다. 삶의 결여가 죽음이라면, 나에게는 삶이 흘러 넘칩니다. 오늘 기도하면서, "엄마, 내가 살았어요"라 고백했습니다. 엄마가 나에게 주셨던 복음이 오늘에서야 싹을 틔웠습니다. 비로소 오늘, 나는 깬사람, 산사람입니다. 사나이입니다.
갈라디아서 5:24
메시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습니다.
정욕과 탐심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언가해서 내 생명 부지해보고자 하는 모든 것이 정욕이요, 탐심입니다. 내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 중에 탐진치 아닌 것 없는 것은, 내가 살고자 그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생명은 무언가를 한다고 보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저 무언가에는 하나님의 토라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무언가해서 살 수 있는게 아닙니다. 뭘해도 죽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새로움이란, 이미 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입니다. 내 생명을 위한 인과율을 다 십자가에 못받아 죽이고, 내 생명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됩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죽어도 존재합니다. 나의 존재는 죽음의 파도가 범접할 수 없는 든든한 토대 위에 굳건히 세워졌습니다.
링크를 걸어놓은 글은 2009년의 글입니다(여기). 오늘 고린도후서 3:6으로 깨친 바가 2009년에 내가 했던 소리 그대로입니다. 나는 오히려 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저 말들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대로입니다. 먼 길 돌아왔으나 그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