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무엇일까요? '믿을 신(信)'자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씀 옆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입니다. 즉 말씀을 항상 곁에두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저는 믿음을 감정이라고 자꾸 착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내 속에 따라 믿음이 얼마만큼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은 내 속에 얼마나 들어있는지 양으로 잴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러니 좋은 믿음, 나쁜 믿음도 없습니다. 믿음은 그저 말씀을 곁에두는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낮과 밤으로 묵상한다는 다윗의 말처럼 말입니다.
가수 박정현의 노래에 "만나러 가는 길"이란 곡이 있습니다. 그 노래에 보면 "그댄 호흡처럼 가까워요"라는 노래가사가 있습니다. 이 가사의 의미는 곱씹어봅니다.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아직 그 연인의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그를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 마음으로 제 속을 채우니, 아직 보이지 않는 그대가 내 곁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상 내 안을 채우고,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숨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댄 호흡처럼 가까워요" 입니다. 저는 이 노래가 하나님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셨고,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습니다만, 그이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이의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우리가 그의 성령으로 숨 쉴 때 마다 그이의 얼굴이 가까이 있음을 압니다. 그이는 호흡처럼 가까우니, 그의 얼굴도 우리 면전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얼굴 마저 보는 날이 오리라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실패를 고치시고, 우리에게 우주 전체를 다시 맡기셨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모세는 보지 못했던 그 얼굴을 우리는 죽지 않는 몸을 입고서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나니 그 하나님이 더욱 그립습니다. 더욱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꾸 그의 말씀을 또 생각합니다. 그의 말씀을 내 호흡처럼 두고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이 인생길에, 말씀은 그이를 그리워하는 나의 호흡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말숨'으로 읽어도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은 곧 나의 생명입니다. 이 숨결이 아담에게 생기를 주었듯, 이 숨결이 저에게 생명을 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닙니다. 말씀을 곁에 두어, 성령으로 끊임없이 호흡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주시고, 숨을 주신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몸에 베이게 만드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몸에 베이는 것이 곧 새로운 창조입니다. 모든 것이 죽음으로 치닫는 이 땅인데, 내 속에서부터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움터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숨 쉬고, 그 숨에 따라 몸을 굴복시키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이 땅을 다스리도록 맡기셨습니다. 아담이 아니라, 새로워진 아담들, 즉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이 우주 전체를 다시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주를 다시 맡아서 다스릴 제2의 아담들입니다.
바울은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지. 나는 꼭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지 하고 날마다 윤리적 덕목을 지키고자 결심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세계가 어찌 될 지를 알면, 내가 어찌 행동해야할지도 압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새롭게 하실 것을 믿으니, 그 세계의 새로움을 위해 먼저 일하자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복음 앞에서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을 날마다 눈으로 목격한 바울입니다. 그에게 새로운 삶은 나를 극복하는 투쟁이라기보단, 자연스러운 삶이었을 것 같습니다. 겉모습은 투쟁이나, 그의 속은 한없이 평안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 천지가 이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계를 새롭게 하실 것이란 사실 말입니다. 우리도 호흡할 때면, 그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이지만, 우리는 때때로 숨을 참고서 살아가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숨통을 트여서 깊이 그 거룩한 숨결을 들이마실 때입니다. 그러면 새로워진 인간과 세계가 분명하게 믿어집니다. 새로운 세계에 맞게 자신의 몸을 복종시키는 하루하루를 삽니다. 그것이 거칠고 치열한 삶이라, 매맞고 넝마를 걸치게 될지라도, 속은 편안하여 기쁨으로 견딜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우주 전체가 새로워질 그 날이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나실 바로 그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이 이야기 합니다. 지구는 중력 때문에 다 한 점으로 찌그러져서 멸망하던지, 밀어내는 힘 때문에 서로 멀어지다가 다 얼어버려서 멸망하던지. 그러나 제 속에 불어오는 하나님의 숨결은 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고 새로워질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제게 불어오는 바람은, 말씀을 믿는 제가 이 새로워질 세계의 상속자라 일러줍니다. 이는 마치 동틀 새벽에 먼저 일어나 일을 시작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믿는 이는 우주 전체의 새로움을 위해, 먼저 일어나 일합니다. 그는 벌써 부활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빛을 따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맡아 다스립니다. 예수와 함께 그 나라의 공동 상속자는 그리 삽니다.
에베소서 5:5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음행하는 자나 행실이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 숭배자여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몫이 없습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가 곧 피조세계 전체, 우주 전체입니다. 우주 전체에는 단 한 평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예수의 다스림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음행하는 사람들, 행실이 더러운 사람들,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입니다. 즉 말씀이 몸에 베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 자기 몸만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음행은 자기 자신의 몸만 기쁘게 하는게 음행입니다. 행실이 더럽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몸뚱이만 신경쓰는게 더러운 행실입니다. 탐욕은 자기 몸뚱이 먹일 생각만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의 몸만 신경쓰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무관하며, 그들은 가나안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다스림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셨을 때, 그 보화란 정말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이 사라진 새로운 우주를, 하나님과 함께 누리고 다스리는 권한이 바로 그 보물입니다. 허나 저는 이것을 자꾸 망각하고, 내 몸 하나 기쁘게 하는 일에 자꾸 몰두 합니다. 숨통을 제 스스로 틀어 막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이 자리에 모여서 여러분과 함께 숨을 쉽니다. 생각을 바로 하고,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인간으로서 다시 몸과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노자에 보니까 '공성명 수신퇴(功成名 收身退)'라는 말이 나옵니다. '공을 이루고 나면, 자기가 잘했다고 칭찬받지 말고 몸을 빼!'라는 말입니다. 참 신기한 말입니다. 왜 공을 이루고나서 몸을 뺍니까? 이 죽을 살몸은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그 옛날 중국에 살던 노인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몸을 빼자 합니다. 영광받을 만한 것이 아닌 이 몸뚱이에 대한 생각을 그만 두자 합니다. 오늘날은 '이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서', 또는 그저 나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말을 흔히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이 세상 전체를 상속받을 예수쟁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을 한다면, 그 일은 이 영광받지 못할 몸뚱이를 위한 일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일을 한단 말입니까? 예수의 이름입니다. 이 땅에 영광을 받을만한 것 하나가 남아 있는데, 이 하나 뿐입니다. 우리가 말숨으로 끊임없이 그리워 하는 이 이름, 우리의 육체를 복종시켜 섬기고자 하는 그 왕의 이름, 바로 이 이름이 우리의 죽을 몸을 빼고, 그 자리에 남겨야 할 것입니다. 죽지 않는 이름,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이름입니다.
예수 믿고 돌아가신 분들은 이미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들은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예수와 함께 돌아와 이 땅을 다시 통치할 그 날 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몫이 남았습니다. 아직 우리가 죽지 않고 목숨이 붙어있는 것은, 아직 저는 준비할 것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몸에 베이게 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에 걸맞는 우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