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47日.

from 치부책 2015. 5. 15. 08:40


0.


  저는 '그래도 나 정도면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 잘 하고 있지'라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그래도 나 정도면 제법 괜찮은 사람이네' 이런 생각 말입니다. 허나 '나 정도면' 이나 '내가 제법'이라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은 아직 덜 된 사람입니다. 아직 한참 남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정도(modus)'일 수 없고, '제 스스로 법(法)'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 정도에, 법에 어떻게든 가까워지려고 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사람만 그런게 아니라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던히 잘 하고 있어' 하는 것이 병입니다. 정말 좋은 공동체라면, '잘 한다 잘 한다' 하지 않고, 우리에게서 어떤 아픔이 있는지부터 들여다 볼 것입니다. 세상 살이에 아픔 없을 수는 없으니, 끊임없이 아픔을 싸매고 고치는데 힘을 낼 것입니다. '내가, 우리가 무던히 잘 하고 있다'는 병 걸린 생각은, 애시당초 탁 집어다가 휙 치웁시다. 저는 오늘 본문을 설교해야겠다고 진작부터 마음 먹었는데, 이러한 병걸린 증세들을 이번 일박이일을 통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예배 잘 드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잘 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1. 용서의 3단계


마태복음 18:15~20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누군가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때 예수 공동체가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하는지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무언가 잘못한 사람이 있고, 그 잘못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이 있을 때, 일단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을 아프게 한 사람에게 찾아가 말해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꼭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두 사람 안에서 문제를 꺼내놓아야 합니다. '나 너 때문에 아퍼. 너 잘못했어' 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부터가 시작입니다. 


  그런데 잘못한 사람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뉘우치지도 않습니다. 계속 자신은 무던히 잘 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럼 어떡합니까? 한 두 사람을 데려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추가된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보고, 문제를 함께 해결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를 겪는 당사자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능동적으로 불러야 합니다. 문제를 자기들끼리 숨겨서는 될 일도 안됩니다. 그런데 꼭 숨기다가, 슬금슬금 서로 눈치만 보고, 걔랑은 놀지도 못하면서 꼭 자기 맘에 드는 사람들끼리 편을 만듭니다. 그럼 그 양쪽이 같이 놀겠어요, 안놀겠어요? 그럼 공동체 전체가 어찌 되겠습니까? 빨간약 바르면 나을 것을 수술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이런 사단이 벌어지기 전에, 얼른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를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야지요.


  이렇게 여럿이 찾아가서 말했는데도, 그 사람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공동체 전체에 말해야 합니다. 하나된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의 문제는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공동체 전체에서 이 문제를 말했는데도 콧방귀 뀐다면,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출교'입니다. 더이상 예수 공동체 식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 공동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고, 이것을 줄여서 '용서'라고 부릅니다. 공동체는 문제에 용서로 대처합니다. 그런데 용서에는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하나라도 없으면 용서가 아닙니다. 1) 하나는 피해자의 용기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와 일단 해결해보자 하는 마음입니다. 2) 둘은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얘네들의 문제가 얘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임일 알고서 돕는 사람입니다. 말그대로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함께 움직이는 몸이기에,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문제도 곧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3) 셋은 처벌입니다. 끝까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이 사람을 돕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마음 바꾸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그 분의 기다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잘못에 대한 분명한 처벌이 있습니다. 만일 잘못에 대해 처벌이 없다면, 용서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해봐야 소용없는 용서가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0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각 사람은 몸으로 행한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자기가 행한 행위대로 거기에 알맞는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용서가 아닙니다. 흔히들 용서를 '봐주기'라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예수 공동체와 아무런 상관없는 단어 뜻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뉘우치지도 않았는데, 피해자 혼자서 '난 저 사람을 용서할거야'라고 하면 이것이 용서입니까? 뉘우치지 않는 사람에게 아무런 처벌도 없는데 용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용서는 문제 해결 방식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도 그것을 용서라 부른다면, 그것은 용서는 커녕 거짓말이란 죄를 보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인의 마음 편하려고 그렇게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것을 용서라 불러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은, 잘못했던 사람이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우리와 하나가 된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 형제가 죄를 버려서, 다시 우리를 얻지 못하면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사람을 얻어야 용서입니다.


2. 그 사람을 위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렇게 대처하는 것은 참 피곤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해야 합니다.누구를 위해서? 문제가 생겼을 때, 피해자가 곧장 공동체 전체에 말하지 않고 그 당사자에게만 말하라는 것이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도 그저 공동체 안에 유야무야 붙들어주지 않고 과감하게 내보내는 것이나, 모두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잘못을 저지른 그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꼴보기 싫으니 나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옳은 것을 옳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람이 제발 깨닫고, 잘못을 뉘우쳐 우리와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이, 곧 공동체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잘못을 되돌려서 다시 '올'이 바르게 되는 것이 공동체가 있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계속 데리고 있지 않는 것은, 공동체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공동체는 문제를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해결합니다. 공동체에게 용서할 일이 생긴 것은 기쁜 일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잘못을 고쳐줄 수 있고, 또한 공동체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앞으로 이렇게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 이렇게 하는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시니, 더더욱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이 두 세사람이 아까 말했던 용서의 3단계를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잘못한 사람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질문했습니다. "예수님,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몇 번이나 이러한 일을 해주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마태복음 18:22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몇 번입니까?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한 숫자입니다. 그런데 완전한 숫자 곱하기 완전한 숫자의 열배입니다. 그럼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 계속, 쭉. 즉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3. 용서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해야합니까? 왜 그저 쌩까고 살면 편할 것을, 그 잘못한 사람을 붙잡고, 그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킬 때까지 공동체 전체가 움직여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방금 전, 이렇게 하는 것이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우리 자신에게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렇게 물어야겠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누구이길래, 우리의 삶 전체가 용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주인에게 만 달란트 빚진 사람 이야기'입니다.


  교회든, 교회가 아니든 문제가 안생길 수는 없습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문제를 어찌 해결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제법이라 여기고, '나 정도면 괜찮지' 하는 공동체는 정작 문제 앞에서는 쩔쩔맬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괜찮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용서에 감격해서, 용서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입니다. 이 용서가 봐주기가 아님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반응형

'치부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751日,  (2) 2015.05.19
그대 내 품에 안겨 - 유재하  (2) 2015.05.17
용서에 관하여  (0) 2015.05.12
11740日.  (0) 2015.05.08
신정  (0) 2015.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