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라는 개념을 생각한다. 법정 스님은 이 용서에 대해서 수직적인 냄새가 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용서는 잘못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을 기준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윤리는,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 (이게 무너지면, 피해를 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테니, 모든 사람은 가해자 편에 서고 싶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처벌 윤리는 사실상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저 윤리대로 잘못을 처벌하는 과정 속에서(민사 소송이라 생각해보자), 한 쪽은 선택할 수 있고, 다른 한 쪽은 선택할 수 없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수직관계가 발생한다. 그러니 만일 용서한다면, 그 용서는 수직적 상황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법정 스님의 대안은 이러한 수직적 용서를 관용과 이해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물론 법정 스님의 말대로 사람과 사람 사이가 수직관계인 것은 좋지 않다. 사람과 사람은 평등하니까.(김수미의 젠틀맨 노래가 생각나는구나) 그러나 이 평등은 저 윤리가 사회적으로 인정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게다가 사람은 지구 전체에 있어, 민폐 그 자체라서, 끊임없이 타인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혹은 용서해야 하는 수직관계들을 만들어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럼 그 때, 수직관계를 없애는 이해와 관용이 우리의 답이 될 수 있을까?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 잘못에 대한 처벌과 보상이 이루어진 후) 피해자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용서'했을 때, '용서'라는 말은 그 둘의 관계가 다시 평등해졌다는 뜻이다. 따라서 용서는 '수직적 상황 속에서 수평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수직적 상황에서 수평관계로 넘어가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 것이다.
그리고 진짜 괴로운 것은, 피해를 입히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전혀 반성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우다.(우리는 이런 경우를 1년이 넘도록 보고 있다) 용서가 수직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이 수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잘못한 사람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윤리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의 토대로서 기능하는 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윤리를 무너뜨리는 요소들과 그와 연관된 사람들을 또 어찌 용서할지를 고민해야 한다.(이때 용서를 그저 봐주기로 읽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그 윤리의 토대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나는 이 문제가 기독교 신학이 고민했던 문제라 생각한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빚진 상태라고 말한다. 이 빚진 상태를 가리켜 '죄'라 하는데, 오늘날 현대인은 자신이 이러한 채무관계에 얽혀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신에게 빚져있는 상태. 즉 옳은 것을 알면서도 옳은 것을 실천할 수 없는 상태가, 우리가 신에게 빚진 상태다. 그리고 빚져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에 대해서 '을'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변명할 것도, 선택할 것도 없다. 다만 신에게 용서를 구할 뿐이다.
권위에 대한 도전을 통해서 역사의 진보를 이뤄온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수직적인 '신적 권위'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지만, 진실은 권위 자체는 배격해야 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 권위가 무엇을 이루기 위한 권위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적 권위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용서다. 수직을 평등으로 바꾸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인간은 신으로부터 힘을 얻어 전에 이루지 못하던 그 일을 이룬다. '올'이다. 인간의 올바름. 그리고 이것이 신이 인간을 용서하는 이유다.
그러나 용서는 구하는 쪽과 받아들이는 쪽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적도 없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과의 채무관계에서 탕감 받은 사람으로 봐도 좋은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신한테 용서받은 적이 없는데?' 하는 사람을, 저 사람도 '신에게 용서받은 사람'이니 용서하자고 말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던 용서의 요소들을 결여하고 있다. 바로 적절한 처벌과 뉘우침이다. 없는 사실을 만들어 용서해야 하는 구실로 삼는게 더 문제 아닐까? 이거야 말로 봐주기 아닌가?
성경은 오히려 정반대로 말한다. 저 사람이 용서받은 사람이라서 용서할 수 있는게 아니라, 다름 아닌 내가 용서받은 사람이기에,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신께서 나의 수직관계를 수평관계로 바꿔주셨기 때문에, 나 역시 타인과의 관계를 수직으로 놓지 않고, 수평으로 놓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만일 내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면, 나는 피해자여야 한다. 나는 나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를 용서하고자 애쓸 것이다. (그가 용서를 구하는 것은 처벌이 전제 되어있기 때문이고, 피해자는 가해자의 처벌에 대해 영향력을 갖는다) 그럼에도 만일 피해자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피해자에 대한 미안함도 없고,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받는 처벌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므로(앞으로도 올바르게 살지 않을 가능성이크다)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이 편이 그를 위해서도 좋다), 할래야 할 수도 없다. 가해자가 뉘우치지 않는 용서는 없기 때문이다. 용서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마태복음 18장 본문에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외인'처럼 여기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를 용서한다 하더라도 현시대 속에서 무너져가는 윤리의식에 기댄 용서라면 자신없다. 윤리에 비할 수 없이 튼튼한 토대가 있다면 그것은 역사요, 실존이다. 내가 용서 받았다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 때문에 용서하는 것만큼 확실한 용서의 이유가 있을까? 십자가의 예수. 신이 사람이 되어 고통당한 그 사건에서, 신과 인간의 수직이 수평관계로 뒤집힘을 본다. 이 뒤집힌 관계 안에 나도 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용서받은 나는 용서한다. 신과의 수직관계가 수평관계로 뒤집히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 역시 뉘우치는 가해자에게 수평관계를 허락한다. 뉘우치는 가해자를 피해자의 친구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그림이 내가 성경에서 배운 용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