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말했던 부분 중에 하나 정정해야겠습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전서>를 가지고 이동한 것이 아니라,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다녀온 이후 그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기록한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으, 죄송합니다)
이제 예수 공동체로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데살로니가 공동체, 그 공동체를 떠나 있는 아버지 바울, 그 바울에게 들려오는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대한 소문, 그래서 급히 디모데를 보내서 이들이 사탄에게 걸려 넘어진 것인지 확인하고서, 이제 <데살로니가전서>를 씁니다. 그 당시 바울은 고린도에 있었고, 그 곳에서 아테네와 고린도를 섬기는 와중에, 그 위쪽 지역인 데살로니가 지역에 편지를 썼던 것이라 추정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전해준 소식을 가리켜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바울이 생을 걸어 전하고 있는 왕의 소식입니다. 새로운 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 왕이 다스리는 지역 구석구석에 가서 알리는 것을 가리켜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써놓은 것을 인용합니다.
*좋은 소식 : 새로운 왕이 등극했다는 소식. 당시 로마는 인구 문제와 식량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새로운 통치자가 나타나서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 점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인지라, 자신들의 기나긴 포로생활을 종결내줄 새로운 왕이 나타나기를(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왕을 '메시아'나 '그리스도'라 부른다) 고대하고 있었다. 그 왕이 나타나났다는 소식이 '좋은 소식'.
그런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소식이 '복음'이라니요? 복음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 아닌가요? 바울이 그 왕을 안믿는 사람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게 아닙니다. 복음은 그저 왕의 소식입니다. 이 왕의 소식은 한 번 전하면 끝나는 것도 아니고, 믿고나면 불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실로 우리가 살면서 주고받은 이런 저런 소식들이 모두 복음 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왕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이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소식(消息)이란 말도 신기하지요. '사라질 소'에 '쉴 식'인데, 이 말은 <주역>에 나오는 단어로, 온 우주가 변해간다는 뜻입니다. 온 우주가 변하는 것을 '호흡(息)'으로 풀어놓은 것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숨'이잖아요?
식(息)은 '가온' 위에 '스스로 자(自)'가 놓이니 호흡이 됩니다. 自는 코를 본따 만든 글자입니다. 코로부터 시작해서 인격의 중심에 이르는 그 순환이 호흡입니다. 사람도 숨쉬고 온 우주도 숨쉬는데, 그 것을 알리는 것이 소식(消息)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흐느끼거나 거칠게 숨 쉰다는 소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평안히 숨쉬는 소식을 전하니, 이것은 숨님의 소식이요, 왕의 다스림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바르게 숨쉬며 살고 있다는 말이 복음이라면, 그 복음을 들숨과 날숨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들숨은 곧 믿음(忠)입니다. 보이지 않는 한 분께 마음을 열어 신선한 바람을 깊이 들이 마시는 것입니다. 날숨은 '사랑'입니다. 가온에 가득찬 숨으로 힘을 내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사랑'은 척추가 곧은 사람의 바른 호흡입니다. 호흡은 죽기 전에는 멈추는 바가 없으니, 계속 믿고 계속 사랑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이러한 호흡이 있었습니다. 참말로 그들이 예수 안에 있다 하겠습니다.
또한 나만 숨쉬려고 하지 않고, 다른 숨쉬는 사람들을 애뜻하게 여기는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즉 숨으로 연결된 사이, 가온으로 연결된 사이입니다. 예수 공동체는 예수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 이 한 몸 안에서 서로 숨으로 연결되어, 서로에 대한 애뜻함이 있으니 바울은 정말 복음을 들은 것입니다. 숨으로 연결된 우리는 참말로 하나입니다!
[2]
여기서 '사명'이라는 말은 '아낭케'라는 단어 입니다. '운명'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어떤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복음입니다. 곧 왕의 다스림 안에서 성령으로 숨쉬는 삶입니다. 이 삶으로 모든 인간사의 찢겨진 아픔들이 싸매지고, 아물어갑니다. 그러나 그 화해는 인간사에만 속한 화해가 아닙니다. 더 큰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의 화해입니다. 하늘과 땅의 하나됨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반드시 해야겠다고 걷다보니, 찾아오는 것은 고난입니다.(우리는 어제 이러한 고난에 대해서 들여다 봤습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 '아낭케'와 '고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통해 격려를 받습니다. "힘내!" 라고 하는 말뿐인 격려가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삶 자체가 이들이 짊어지고 가는 그 일의 열매입니다. 삶 전체로 보여주는 격려입니다. 바울일행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고 사랑하며 사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증명합니다! 바울일행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늘과 땅의 화해 속에 사는 사람이 또 태어났습니다. 바울의 이 말이 어찌 들리십니까?
여러분이 주 안에서 굳게 서있으니, 이제 우리가 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 '격려'라는 말이 숨님의 별칭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맙시다. 무언가 의미가 또 보이지 않습니까?
[3]
그들의 기쁨.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숨쉬며 너와 내가 하나된 기쁨.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바울과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이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대체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 수 있을까요?
'보답'이라는 단어는 '카타아포디도미'인데, 요새 공부할 때 자주 나오는 단어입니다. 의(義)와 상관이 있는 단어였습니다. '하나님께 보답과 의(義)'에 대해서 좀 더 배우고, 고민해보고 나중에라도 이 구절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