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바울은 결정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공동체로 디모데를 보내기로. 마치 <골로새서>를 들고 가는 에바브라같이, <빌레몬서>를 들고 가는 오네시모같이, 디모데는 손에 <데살로니가전서>가 들려있습니다. 디모데의 임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들을 '굳건히 세우기' 2) '믿음'을 격려하기 과 3)'고난 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입니다. 오늘은 이 말들을 하나씩 생각해봅시다.
'굳건히 선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요? 굳건히 서려면 발 밑에 튼튼한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토대'지요. 예수님은 이 '사람살이의 토대'에 대해서 두 가지를 비유로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는 모래요, 다른 하나는 반석입니다. 굳건히 선다는 말은 반석 위에 선다는 말이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비유니까, 실제 모래와 반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니, 우리는 모래와 반석을 통해서 다른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 망막에 비치지 않는 것을 보자고 했으니, 다른 말로 하면 '생각하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모래와 반석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출애굽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 이집트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토대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눈에 보이는 다양한 것들을 믿었습니다. 예를 들면 개구리를 죽지 않는 영물이라 '생각'했고요, 나일강에는 하비신이 있어 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신은 이집트를 덮어주는 지붕이고, 곡식의 신도 이집트를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파라오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생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데에는 공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왕족들은 다양한 신화와 그림들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세뇌시켰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신들을 만들고, 그 신들이 자신을 섬기니, 너희들도 나를 섬겨야 한다는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이집트의 경제적 번영을 통해 정당화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이 만큼 잘 사니까, 내 말이 맞지? 내가 왕이지?" 이런 겁니다. 따라서 이집트에 살고 있는 사람의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파라오가 앉아 있습니다. 인식의 감옥이라 하겠습니다. 온통 둘러봐도 그의 세계는 파라오의 세계뿐입니다. 생각이 노예니, 진정 노예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모래 위에 선 사람과 같습니다. 모래는 하나가 아닙니다. 여럿입니다. 그래서 무너집니다. 이집트의 그 여럿의 신들의 정체는 결국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에 의해 숭배받아야 할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다스려야 할 피조물이었습니다. 이 피조물에 대한 여럿 숭배는 반드시 무너집니다.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나타나면 그림자는 있을 자리가 없는데, 빛은 여럿이 아닙니다. '한 빛'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른채 그림자들만 잔뜩 숭배하고 있으니, 이 사람의 생각은 참으로 어둡고, 이 사람이 숭배하는 것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래들일 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집트의 다신교가, 사실은 파라오의 독재를 위한 술수였듯, 오늘날의 모든 그림자 숭배들은 모두 사탄과 연결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어제와 달리 이 사탄을 '유혹자'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본래 단어는 '시도하는 자'입니다. 아마도 에덴 이야기를 배경으로 두고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자를 향한 뱀의 시도가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 시도는 다른 게 아니라, 보이는게 전부라 믿게 하는 시도였습니다. 선악과는 먹음직스러워 '보이고', 이뻐 '보이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토록 사탄의 시도로 인해, 인간은 보이는 것이 생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마치 파라오의 지배 아래 살던 노예처럼 말입니다.
[2]
이 세상 모든 그림자 숭배들이 이와 같습니다. 보이는 것만 가지고 생각하려고 하니, 이 노예의 삶은 사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은 정반대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뵈지 않음'이 '뵘'보다 더 큽니다. 하늘은 땅을 덮습니다. 우주만물은 그저 보이게 된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한 분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니 출애굽이 필요합니다. 이 출애굽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충성'입니다. 오늘 아침에 재미있는 말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불상이십니다.' 불상(佛像)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상(不象)입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이 말이 써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 그는 상(象)이 없습니다. 가시광선에 비추어 음영을 만들어낼 수 없으니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온통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같은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한 분을 따르겠다고 하니 이것 참 믿음입니다. 이집트에 살고 있는 노예가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의 말을 믿는 것 뿐입니다. 그에 따르는 것 뿐입니다. 다른 길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믿음은 출애굽입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이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땅에서 하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충(忠)'입니다.
저는 이 글자를 무척 좋아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탄을 표할 수 있는 한자가 '악(惡)'이라면, 그 반대는 '충(忠)'입니다. 가온이 온통 굽어서 막혀있으면 惡입니다. 그런데 가온이 위로부터 뚫려 하늘과 연결되어 있으면 忠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충성입니다. 출애굽 이야기로 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라 광야를 걷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을 만날지 모르지만 그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고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입니다. 그 길의 끝에 참 인간다움의 길임을 믿고서, 마치 탕자가 아버지를 만나는 걸음마냥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자주 했으니, 다른 설명을 해봅시다. "하나님을 예배합니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불상(不象)'이시니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배는 worship인데, 이 말은 worth에서 왔습니다. '가치'입니다. 즉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분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분의 가치를 인정했는데, 예배 시간 딱 끝나니 온통 보이는 것의 가치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말로 예배를 드린 겁니까? 아닌 겁니까?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까? 아닌 것입니까?
앞에서 '생각한다'는 말을 자꾸 반복했습니다. 생각은 방향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한 분으로부터 비롯된 생각은 그 방향이 곧습니다. 야고보의 말대로 위로부터 아버지께로 내려온 생각입니다. 그러니 忠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거꾸로 하니까 그 생각의 방향이 곧지 않습니다. 惡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惡한 세상 속에서 忠하려는 자는 당연히 어려움을 겪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따르겠다는데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위에서 지배하려는 자들은 이러한 사람을 싫어할 것이고, 그저 현실에 순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이 사람들을 비판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도 의견이 계속 부딪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은 바울이 진작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얘기했던 점입니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포기하면 되나요. 이겨나가야지요. 이겨나감은 다른게 아니라 C를 드러내기 위해 ---을 거둬내는 일입니다. 그렇게 A와 B가 C를 생각하며, 그에 따라 살아, 참된 관계를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그럼 이김입니다.
[3]
그런데 아까 하나님은 불상(不象)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상(象)'이 없으신 그 분을 어찌 드러낼 수 있습니까? 드러냄에는 '상(象)'이 필요합니다. 글자를 멋지게 써볼까요? 아니면 그림을 그려볼까요? 도대체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 그이를 이 땅에 드러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라고 우리에게 주신 기가막힌 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몸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입니다. 살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라고 우리에게 주신 상(象)입니다. 자신과 닮은 인격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살몸입은 삶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1]에 보면 데살로니가 예수 공동체 사람들의 믿음을 숨님처럼 격려하기 위해 디모데를 보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숨님이 그저 가시면 되는데, 왜 굳이 디모데가 가야 합니까? 왜 바울은, "너희들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서, 성령을 따라 문제를 잘 해결하고, 고난 속에서 잘 이겨가라!" 라고 하지 않고, 왜 굳이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까? 왜 디모데는 일행과 떨어져서 먼 길을 떠나는 것입니까?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상(象)'이기 때문입니다. 숨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숨님을 따라 살아서, 그 보이지 않는 숨님을 증거하는 보이는 증거가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숨님따라 사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려놓았던 사탄의 영향력은 이내 사라집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모세 앞에서, 파라오가 그토록 무력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오늘 출애굽의 그림이 완성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밖에 모르던 이집트의 노예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몸으로는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그렇게 광야길을 걸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라 忠! 그렇게 살다보니, 줄곧 내가 따라만 가던 구름이 어느새 내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을 속에 품고서 하나님을 드러내니, 나는 참으로 '성전'이라 하겠습니다. 어딜가든 약속의 땅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