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 속으로 급하게 여러분이 누스로부터 휩쓸리지 않기를 (말입니다), 두려워하지도 않기, 생각으로부터도 숨결을 통해서도 로고스를 통해서도 우리를 통해 (받았다는), '주의 날이 이미 섰다'는 내용의 편지를 통해서도.
누군가 여러분을 어떤 방식으로도 속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만일 아포스타시아 방식이 오지 않고, 무법의 사람이 드러나지도 않으면,
분명 (그 날은 오지 않기 때문인데), 그는 그 멸망의 아들,
모든 이야기되는 신이나 숭배대상과 맞놓여 추앙받는 자이며,
그래서 그는 그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그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지 못합니까,
그때 내가 여러분을 향해 모든 것을 여려분에게 말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 그 '억제하는 자'에 관해 여러분은
그가 자신의 카이로스 안에서 드러남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법의 뮈스테리온이 이미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억제하는 자가 지금까지 가운데로부터 되었습니다.
그 뒤에 무법자는 드러날 것입니다,
그를 주 예수께서 그이의 입의 숨결로 들어버리실 것이고
그이의 '파루시아의 나타남'으로 그를 무력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의 파루시아는 사탄의 작동을 따라 있습니다,
모든 잠재력과 표적들과 거짓 기적들과 모든 불의의 속임 안에서 멸망당할 이들에게,
(그들은 그 멸망하는 이들과 맞서 있는,
그들을 온전케 하기 위한 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그러진 작동을 보내어 그들이 거짓에 신실하게 하십니다, 이는 참에 신실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로 좋게 여겼던 모두가 판단/심판받기 위함입니다.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2017년 5월 30일에 번역해놓았던 본문의 해설을 쓴다.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고, 그간 나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다양한 정보들을 접하게 하셨다는 사실에 벅차오르는 감사와 찬송을 억누를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함께 할 우리가 누구인지가 분명해지는 카이로스 속에서. 오늘 한 분의 질문이 모든 퍼즐을 연결시켰다. 그 질문은 이러하다.
'왜 회개한 아합의 재앙이 그의 아들 때에 주어지는가?'
열왕기상 21:29, 새번역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겸손해진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손해졌기 때문에, 나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고,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가문에 재앙을 내리겠다."
이 구절을 통해 추론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아합은 곧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대표자다. 그의 악행은 이스라엘 전체를 망쳐놨다. 따라서 그의 회개가 곧 그가 망쳐놓은 이스라엘 전체의 치유가 될 수는 없다. 그 병든 이스라엘 안에서, 그의 아들이 대표자가 된다.
-"여로보암의 길"은 타락한 인간의 default level.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아버지의 일을 들었을텐데도 완고하다. 별 다른 일이 없는 한, 대표자의 타락을 보며 자란 다음 대표자는 그 타락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나 아합은 회개했고, 그것은 엘리야에게조차 의아한 것이었다. 극악의 악인이 회개하는 예외상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회개는 재앙을 자신의 때로부터 '연기'시켰다.
-아합의 회개가 예외상황이었다면, 아하시야에게도 다음의 예외상황을 적용해보자. 아하시야가 그의 아버지처럼 회개했다면 그의 때에 떨어지기로 한 재앙은 어찌되었을 것인가? 대답은 어렵지않다. 연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합마저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졌기 때문에 재앙을 연기할 수 있었다면, 회개한 아합의 역할은 분명히, 카테콘(ὁ κατέχων, "억제하는 자", 개역성경은 "막는 것"으로 오역)이다. 아브라함, 모세, 바울이 보여준 카테콘적 면모를 아합이 보여준 것이다. 아브라함이 소돔에 재앙을 지연시키려했듯, 모세가 금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에게 떨어질 심판을 막으려했듯, 바울이 완고한 유대인을 참고 견디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로마서 11:22)를 보았듯, 겸손해진 아합 때문에, 당대의 이스라엘은 재앙을 면한 것이다.
이 아합의 경우는 '메시아의 시간'을 보여준다.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현시대의 틀에 맞출 수 없는 변신'을 요구한 까닭은, 아감벤이 그의 에세이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던 것처럼, 에클레시아는 현시대와 붙어있으면서도 현시대와 단절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카테콘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심판이 임박한 현시대가 담아낼 수 없는 '잉여'를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예외가, 잉여가,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다.
'원수사랑'은, 그 원수를 재앙으로부터 건져내고 싶은, 말 그대로 사랑이다. 로마서 1:18에 나오는, "사람들의 불의에 대해 하늘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는 원수를 향하고 있다. 그 원수를 구하는 길은, 주의 날의 도래를 억제시키고, 그에게 "아멘, 주 예수께서 어서 오시옵기"를 탄원하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 계시록 2:5의 "내가 네게 임하여"는 재림이 아닌, 현실 속에서의 메시아와의 조우를 의미하고, 이것은 진실로 속히 온다고 하셨던, 요한계시록 22:20의 의미인 것이다. 나의 겸손은 악을 억제하고, 나의 기도는 사람을 구해낸다. 이로서 '나'는 이 땅에서 카테콘적 성전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는 이 카테콘의 역할을 보여주었다. 1:18의 진노는 지연되어 11:26의 변화를 허용하는 배경이 된다. 그 배경 속에서 빛나는 것은, 심판을 지연시키며 사람을 구하는 카테콘적 모델이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 겸손해진 아합을 그 카테콘적 모델로 등장시키고 있다. 즉 아합이야말로, 악인마저도 새롭게 하시는 새창조의 전형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하시야는 카테콘이 될 수 있었을까? 있었다. 그러나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삶이라는 일체의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는 재앙을 연기시키는 집단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재앙이 연기되는 기간을 요한계시록은 "천년"이라 부르고, 이 기간동안 사탄은 억제되며, 사람들은 구출된다.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은, 이러한 카테콘의 실체를 보여준다. 악을 억제하며 사람을 구한다. 이 심판의 지연과 사람의 구출이, 메시아 예수의 파루시아로부터 시작되었고, 이 카테콘에 참여하는 이들이 곧 신실한 사람들로 불렸던 것이다.
로마서 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이것은 고급 윤리의 덕목이 아닌, 카테콘적 삶의 방식이다.
이상의 내용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바울은 에클레시아에게 요청한다. 그 에클레시아를 정의하기를, "메시아 예수의 파루시아" 즉 승천하신 인자의 곁에 이끌린 사람들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 그림은 유대인에게 말그대로 끝, 역사의 종언이었다. 역사의 종언을 맞닥뜨린 이들에게 바울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주의 날이 이미 섰다'는 편지는 심판이 지연되는 카테콘의 천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거짓말이다. (그레고리 비일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 들어온 거짓 주장이란, '성령을 통한 새로움이 곧 재림'일 것이라 말한다. 즉 "주의 날"이 성령받은 날이고, 예수의 재림과 심판은 없을 것이라 말하던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공동체를 속이려든 것이다. 이 주장은 '성자가 성령이 된 것'이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이나, 예수가 영으로 부활했다는 신천지의 주장과도 공명한다. 하루 이틀 있었던 거짓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울은 심판이 지연되는 이 천년이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지를 스케치한다. 먼저는 '아포스타시아(배교, 배척, 배신, 사도행전 21:21을 보라)'가, 그리고 무법의 존재가 등장할 것이다. 즉 배교를 통해 에클레시아가 더 이상 카테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때, 그때 천년은 끝나고 사탄은 발등상으로서 짓밟혀있다가 다시 일어난다. 물론 그의 재기는 곧장 영원한 멸망으로 이어진다(요한계시록 20장).
바울은 승천하신 인자 곁에 이끌린 이들에게 기억을 상기하라 말한다. 그 기억은 바로 '억제하는 자(카테콘)'에 대한 바울의 말이다. 그 억제하는 자는 적기(카이로스)를 맞아, 지금 이미 드러나있다. 이 억제하는 자는 누구인가? 지금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에클레시아 자신. 그 외에는 없다. 이미 그들의 시대에 카테콘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무질서가 작동하고 있었고, 에클레시아는 그 무질서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악을 선으로 갚으며.
로마서 16:19,20, 개인번역
그래서 여러분에 대해 나는 기뻐하고, 또한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닮는데 지혜롭고, 악과는 섞이지 않기를.
평화의 하나님께서 곧 사탄을여러분의 발 아래서 완전히박살내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의 힘주심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카테콘의 때가 끝나면, 무법의 비존재가 드러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 그 비존재는 예수의 입의 숨결로 궁극적인 처벌을 당한다. 그날이 "파루시아의 나타남", 즉 재림이다. 이미 파루시아를 이룬 그이가 우리의 두 눈 앞에 드러나는 순간인 것이다. 그날 사탄도 끝이다. 이 날을 가리켜 "주의 날"이라 부른다. '주의 날이 이미 왔다'는 편지가 거짓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천지의 배도-멸망-구원의 도식이 허위이면서도, 그들이 인용하고 있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은 중요한 본문이다. 이 중요한 본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파루시아(승천) - 카테콘적 에클레시아 - 멸망의 아들 나타남/파루시아의 나타남("주의 날")
사탄은 메시아의 파루시아의 통제 아래 있다. 즉 사탄의 기능은 역설적으로 인간다운 삶의 기능부전이고, 그러한 사탄을 기능하지 못하도록 다시 억누르고 있는 것이 에클레시아인 것이다. 그 기능부전을 발로 밟고 서 있는 메시아의 몸, 하늘에 앉은 왕들이다(시편 2편, 에베소서 2:6).
그리고 사탄의 기능부전의 기능을 따르는 이들은, 그 따름에 대한 공정한 심판을 받고 있으며 또한 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떨어질 재앙을 지연시키고 있는, 카테콘적 에클레시아의 고마움을 모른다. 지금 자신들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아주는 이들을 홀대한다. 그럼에도 에클레시아는 그들을 위해 선으로 악을 억누름으로 심판을 지연시키고, 긍휼로 그들을 건져내려한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엉키어 살아가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