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일행이 밤낮으로 기도하는 기도제목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원인으로 사탄을 지목했습니다. 이 '사탄적 상황'은 바울의 기도 면면에 깔려 있습니다. 즉 둘로 분열되어 하나되지 못하는 망가진 인격이, 씻어난 이들의 사역과 만남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탄을 이기고, 다시 모든 일이 순리에 따라 돌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우리 아빠와, 우리 주 예수이십니다! 사탄은 사람 맘을 온통 찢어놓아 갈림길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 맘이 찢어지니 몸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맘을 싸매십니다. 마음이 연결되면, 몸도 자연스레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곧게 인도한다'는 표현은 배의 키잡이가 된다는 말입니다. 온통 둘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로 인도하는 키잡이가, 하나님 아빠와 아들 예수십니다.
[2]
그 인도를 따르면, 사랑이 흘러넘칩니다. 사랑은 다른 게 아니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타인을 세워주려는 것입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것이 옳다는 것을 사람은 누구나 압니다.
오늘 꿈에 제가 제레미 밴덤에 대해서 말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사람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양적 공리주의를 말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그 동안 이 사람을 여러 차례 비판했는데, 꿈 속에서의 저는 이 사람의 옹호자 역할이었습니다. 저는 극소수가 이익을 독차지하는 사탄적 상황 속에서, 이 사람이 나름대로 제시한 '사람다운 삶'이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완전한 방법이 아닌지라, 소수 마저 챙길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제가 막 얘기를 하던 중 잠에서 깼습니다.
밴덤의 방법이 미완인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근본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에덤 스미스의 국부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이기적이다'라는 전제 위에서, 이것을 고치지 않고, 이 이기심을 잘 배열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사실만큼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신념 위에서 사상을 전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혹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 두 사람은 좋은 의도에서 이론을 만들어냈지만, 그 어떤 방법도 인간의 이기심을 통해 세상을 조화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최대다수는 커녕, 상위 1%가 부의 50%를 독점하는 중입니다.
사랑 밖에 없습니다. 이기심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사람이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면 결국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데서' 세상을 바로잡는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도, '사람은 바뀔 수 없다'는 말을 공리처럼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 자신을 들여다보더라도, 바꾸고자 했으나 그럴수 없었던 지난 날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만의 힘으로 바꾸자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기도의 시작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와 예수 그리스도"! 이기적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새로워질 수 있음은 신적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신적 능력에 달려있다고 우리는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기독'을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더러봤습니다. 허나 <성경>이 말하는 능력은, 힘은, 곧 '숨'입니다. 이 '숨'은 우리의 밖에도 있으나, 우리 속에도 있습니다. 그 힘의 근원이 밖에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면 수동태로 말할 것이요, 그 힘을 들이 마셔야함을 강조하려면 능동태로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냐' 아니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냐'는 서로 싸울 일이 아닙니다. 그 힘이 밖에만 있다고 주장할 것도 아니고, 제 속에만 있다고 주장할 것도 아닙니다. 그저 숨입니다. 같은 숨을 들이 마시고, 함께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서로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이 어찌 가능한가'를 논쟁하느라 사랑할 시간들을 흘려보내는 것만큼 미련한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참 믿음'이란 '사람이 바뀔 수 있는가, 없는가'에서부터 갈라져 나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 아닌 다른 것들을 붙잡는 쪽과,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람에게 희망을 걸어보는 쪽 말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범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기심을 극복하려는 애씀은 점점 그 범위를 확장해갑니다. 먼저는 '서로에 대해서' 입니다. 여기서의 '서로'는 공동체 식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보면, 인류애를 열렬히 주장하지만, 옆 집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이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기심을 극복하여, 사랑하는 일이 실제적인 차원에서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작은 공동체에서 그쳐서도 아니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해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씻어난 이'는 전체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가족은 인류 전체를 돌보기 위해서 먼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요, 오늘날의 기독인들도 우리가 같은 사명을 짊어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전체를 위해 죽는 그 십자가를 우리가 짊어졌습니다.
[3]
바울은 결말을 내비칩니다. 그 결말은 이러합니다. 왕이 오십니다. 본문의 '다시 나타나실 때'라는 말은 '재림'의 의미를 풀어본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점령지역들은 인구문제, 식량문제, 정치적 문제로 온통 골머리를 썩여야 했습니다.(팍스 로마나를 주창했지만, 로마는 결코 평화로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 지역의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은 오직 하나, '왕의 재림'이었습니다. 즉 새로운 왕이 나타나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상황은 이스라엘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포로기를 겪고 있던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독립을 가져다줄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 메시아의 나타남이 곧 재림이었습니다.
원어로는 '파루시아'말을 씁니다. '곁에 있음'이라는 말입니다. 흔히 '재림'이라 하면, 위로부터의 하강을 생각하지만, 만일 하늘이 그저 우리 위에 있는 푸른 하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원'이라 생각하면 달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없다가, 위에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그가 곁에 계심이 이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재림입니다! 하늘로 가셔서, 지금은 보이지 않는 차원에 계신 예수께서, 이제 보이는 차원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날이 옵니다. 그 날이 파루시아 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날입니다. 사람에게는 부활이요,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이 새로워지는 날입니다. 곧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 날에 우리의 인격의 중심이, 하나님 우리 아빠 앞에서 거룩함으로 굳건히 서기를! 이 날을 맞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겠습니다. 날마다의 사랑하고자 애씀이, 우리를 흠없게 합니다. 그러니 숨을 크게 들이쉽시다.
바울의 짧은 기도 속에 어떠한 흐름이 있음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 우리 아빠와 예수로 시작해서, 2) 우리의 사랑을 지나, 3) 인간과 세계의 온전함으로 이루어지는 결말. 이 속에서 인간 이기심과 세계의 타락이 뒤집혀가고 있다는 확신, 그리고 그 확신대로 이뤄지는 스스로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