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온'이라는 표현은 '가운데'의 순우리말입니다. 서울 시청 앞에 가면 '한글 가온길'이라는 길도 있습니다. 계속 굳이 가온이라는 표현을 계속 쓰는 것은, '마음'이라는 번역어로는 모자르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희랍어로는 '카르디아'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는 심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심장은 몸의 중심이자, 몸 전체에 피를 공급하는 기관입니다. 그리고 피는 다시 가온으로 돌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가온은, 인격의 중심이자 그 중심으로부터 모든 실천이 시작되며, 그 실천은 어떠한 인상이 되어 다시 가온으로 돌아옵니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사람은 점점 달라집니다. 자신이 가온에 무엇을 품어, 무엇을 실천하고, 그 실천을 어찌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자아'를 스스로 규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가온은 그냥 가온이 아닙니다. 새롭게 된 가온입니다. 그 가온에는 피가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가온이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그 가온으로부터 새로운 피가 돕니다. 그 피는 예수의 피요, 그 피가 그 사람의 온 몸을 돌아 실천력이 됩니다. 구석구석 예수의 피가 돌아, 그 속에 생각한 것이 그의 모든 일상 속으로 흘러가며, 그 몸이 그 피로 인해 따뜻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피는 이 사람 안에서만 흐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나의 가온이 당신들을 떠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심장과 심장으로 연결되었다는 말이니, 즉 피로 연결된 관계라는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찌 피로 연결될 수 있습니까? 생각나는 건, 수혈. 그런데 수혈은 같은 피를 가진 사람들끼리만 제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니 패스. 모든 사람이 함께 피를 나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가족. (오늘 본문의 시작에, 바울이 데살로니가 공동체 사람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부부가 되었든 부모 자식이 되었든 서로 다른 두 인격의 살과 피가 섞이는 관계입니다. 바울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을 데살로니가 공동체 사람들의 아버지라 말합니다. 이 아버지는 '예수의 정신'과 '그의 실천력'을 가진 아버지, 곧 몸에 피가 돌고 있는 아버지이고, 이 아버지는 같은 정신과 같은 실천력으로 이 사람들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같은 피를 내뿜는 여러 개의 가온이 뛰고 있습니다. 서로 몸이 떨어져 있어도, 같은 심장으로 같은 피를 흘려보내니,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심장과 피로 묶인 아버지가 자식과 떨어져 있으니, 자식이 무척이나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 자식들은 아직 걸음마 중에 있습니다. 한창 양육이 필요한 자식들을 놓고서 아버지가 떠나왔으니 그 마음이 오죽 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든 이들을 보고자 애썼습니다.
[2]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몇 차례 시도했으나 그것들이 모두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현대인들이 믿지 않는 단어를 입에 올립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무엇일까요? 대체로 신학자들은 사탄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비인격적 실체'라는 말을 씁니다. 인격이라는 것은 사람답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비인격적 실체'라는 말은 사람다움이 없으면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름에서부터 몇 가지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고발자(The Accussor)'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관계 안에서 이간질 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공중 권세 잡은 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음의 그림을 생각해봅시다.
A-B
A와 B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A와 B가 함께 살다보면, 서로 책임을 미룰 때가 있습니다. 책임을 미룸은 서로에 대한 고발이 되고 이것은 관계의 파탄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있습니다. 제3의 존재입니다.
C
A-B
C는 A와 B의 관계를 중재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또한 A와 B가 어찌해야할지 가르쳐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또한 A와 B중에 억울함이 있다면 그것을 풀어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재판관의 역할입니다. 그것도 한 쪽만 살리는 중재자가 아니라, 양쪽 다 살릴 수 있는 중재자입니다. 만일 어떠한 범죄한 사람에게 부과할 수 있는 가장 막중한 처벌이 죽음이라면, 그리고 이 중재자는 양쪽을 다 살릴 수 있는 재판장이라면, 이 재판장의 모습은 어설픈 중립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이 재판장을 기억하고, 이 재판장의 뜻에 따라 A와 B는 관계를 만들어 갑니다. 그렇게 A-B가 점점 C와 가까워져서, C의 판단이 A-B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되면 싸울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네 삶 속에서는 끊임없는 A와 B의 싸움이 있습니다. 오죽 했으면 신채호 선생이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말했겠습니까? 끊임없는 A-B의 싸움. A가 개인이 되었든, 가정이 되었든, 지역 이기주의가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혹은 교회가 되었든. 끊임없는 관계의 분열 속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고, 서로를 속으로 고발하며, 미워하고, 용서와 사랑은 점점 일상에서 멀어집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C를 잊기 때문입니다.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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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
다시 사탄으로 돌아옵시다. '공중 권세 잡은 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의 이름은, 이러한 도식 위에서 나온 그림입니다. A-B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땅'입니다. C는 다들 짐작했겠지만,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한 재판장이 계신 곳은 '하늘'입니다. <성경>에서 '하늘'이라 함은 우리가 보는 푸른 하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원', '하나님의 신적 차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땅'은 '보이는 차원', '인간의 차원'입니다. 그 하늘과 땅 사이를 가리켜 '공중'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공중이 점령당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이 연결되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리를 이뤄가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이 가로 막혔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좋은 것들은 모두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 용서, 정의, 아름다움. 이러한 것들은 모두 아직 내 손에는 잡히지 않는 것들이지만 추구하기를 마다하지 말아야 할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공중 권세 잡은 세력'이 곧 사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에 붙잡혀서, 관계를 뒤틀리게 만드는 자 역시 예수께서는 사탄이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족이 다시 모이는 일을 방해하는 어떠한 세력이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의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을 원치않는 세력이 있습니다. 가온과 가온을 끊어놓고 싶어하는, 폭력과 전쟁의 근원이 있습니다. 옛 뱀이요, 곧 사탄입니다. 인격적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비인격적 존재.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하늘 잊음'입니다.
[3]
그러나 그 사탄은 끝이 있습니다. 공중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이 끝날 날이 있습니다. 바울이 바라는 바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올바르게 서는 일이요, 이 일을 기뻐하며, 나중에 이 일은 자랑할만한 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내게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과 충돌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참 사람되는 것이 바울의 소망이요, 이것을 이루실 분은 참된 정신과 실천력을 주시는 이입니다. 이 분 없이는 할 수 있는 없는 일입니다. 현시대가 완전히 종결되는 날, 데살로니가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자랑스러워함은 곧 주님에 대한 자랑스러움입니다. 그래서 뒤에 바로 이러한 구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 나타나실 때"
이 말은 바울이 [1]에서 말했던 "우리가 여러분의 시야에서 한 때 떠난 것은" 이란 말과도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날에 대해서는 <데살로니가전서> 뒷 부분에서도 계속 다룰 것이니, 이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그 날이 되면, 참된 관계가 이뤄진다는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B는 A를 뚜렷이 드러내고, A는 B를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A는 바울이요, B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입니다. 참된 관계는 A, B 만 있어서 이뤄질 수 없습니다. C 안에서 이뤄집니다. 그 안에 모든 보이지 않는 차원의 보물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고발하는 '---'이 끼어들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