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4:1~20)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큰 무리가 모여 들었다. 예수께서 배에 올라타 바다 쪽에 앉으셨고, 무리는 바다 쪽을 바라보며 바닷가에 있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잘 들어라! 옛날에 씨 뿌리는 사람이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뿌린 씨가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는데,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는데, 흙이 깊지 않아서 금세 싹이 올라왔다. 하지만 해가 뜨자 시들더니 말라죽어 버렸다. 뿌리가 깊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졌는데, 덤불이 자라면서 그 기운을 막아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다. 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소출이 있었는데, 자라고 퍼져서 수확이 컸다. 어떤 경우는 30배 어떤 경우는 60배, 어떤 경우는 100배를 거두었다."
예수께서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그들이 따로 있을 때 예수 주위에 둘러 있던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비유에 대해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너희에게는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다 비유로만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해서, 돌이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면 어떻게 모든 비유를 이해하겠느냐?
씨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뿌린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지만 곧바로 고발자가 와서 거기에 뿌려진 말씀을 가져가 버리는 사람들이다. 바위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잠시 열광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말씀 때문에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박해를 당하면 금세 환상에서 깨어난다. 가시덤불 사이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지만 현 시대의 걱정과 돈의 유혹과 다른 것들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 말씀이 질식당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받아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30배, 어떤 사람들은 60배, 어떤 사람들은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0.
저번 주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문제있는 사회"
예수의 가족이 와서, 예수가 미쳤다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이 와서, 예수가 똥신에 사로잡혔다 말했습니다.
이 가족과 유대 사회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추구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였습니다.
2. "인질 구출 작전"
그가 하는 일은 똥처럼 여겨지는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사탄의 세계 안에서의 인질 구출작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일이 사탄과 한통속이 되어 하는 일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새로운 사회 안에서는 명예가, 사람이 정한 높고 낮음이, 학벌이, 병이, 왜곡된 인격이, 그리고 죽음이
더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음을 가르침으로, 치유로,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를 미쳤다 말한 가족들, 똥신이라 부른 율법학자들은,
무언가 지금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3. "이것을 막지마라"
예수는 말합니다. 사탄의 세계에서 인질이 구출되는 것을 막지 말라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출애굽입니다.
이 출애굽을 막는 것은, 자신이 바로의 군대가 되는 것이며,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로 인해 고침받는 것을 원치 않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위에서 행하시는 바로 그 일을 한낱 인간이 막으려는 것입니다.
성령 모독죄 입니다.
4. "새로운 사회"
이후 예수는 진정한 가족, 진정한 사회를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 입니다.
이것은 곧 새로운 사회의 출범입니다.
New Society! 새로운 사회! 이것을 마다할 자 누가 있겠습니까.
나약하고 힘없는 자, 비겁하고 비천한 자, 아무런 소망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소식!
그것은 왕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사회의 소식이었습니다.
New Society. 새로운 사회의 출범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피조물들이 고대해왔던 왕의 귀환. 그 왕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사회.
그 왕은 이전의 왕과는 달라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백성들의 가장 낮은 곳에 스스로 내려와, 백성들을 위해 자신이 착취 당하는 왕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낯설어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낯설어 사람들은 비웃으며, 때로는 돌을 던졌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싫어서 사람들은 그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오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하셨습니다.
1. 첫장면, 바다다!
그리고 이제 그 유명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것의 첫장면을 놓칠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체에서 빠져도 되는 부분은 부분이 아니라 말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에도 적용될 말이지만, 성서해석에도 분명히 적용되어야 할 말입니다.
성서에 빠져도 되는 부분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런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이 첫장면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사회를 선언하신 예수, 그리고 그 예수가 서 계신 장소로, 이 비유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큰 무리가 모여 들었다.
예수께서 배에 올라타 바다 쪽에 앉으셨고,
무리는 바다 쪽을 바라보며 바닷가에 있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똥신 논란 이후, 예수가 말하는 새로운 사회에 매료된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들을 다시 바다로 인도하십니다.
사람들은 바다 쪽을 바라보며 바닷가에 있고, 예수는 배에 올라타서 바다 위에 계십니다.
우리는 이 바다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바다는 죽음입니다. 노아 시대 때 전인류를 수장시킨 죽음의 물입니다.
바다는 악입니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앞에서도, 요단 앞에서도 번번히 앞을 가로 막은 거대한 힘입니다.
그러나 구약 말고, 우리는 신약에 들어와 드러난, 이 바다에 대한 새로운 그림들도 알고 있습니다.
바다에게 명령하여 잔잔케 하시는 예수의 그림 말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바다를 밟고 걸으시는 예수의 그림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지금, 바다 위에 계십니다.
마치 바다가 예수의 발등상인 것처럼.
이 그림을, '새로운 사회의 출범'이라는 바로 앞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해봅시다.
새로운 사회를 만드시는 예수 그 분이 그 새로운 사회의 비유에 앞서,
자신이 악을 밟고 선 분임을 선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 분이 만들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미래는,
악을 심판 하신 그 분 위에 세워집니다.
악을 밟고 선 자가 만드는 새로운 사회.
그 안에서 악이 정의로운 통치 안에서 사라집니다.
죄로 가득한 그 곳에, 은혜가 넘치고, 모든 죄가 용서됩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인격이 왜곡된 자, 진정한 인간됨을 얻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봅니다.
이 새로운 사회! 이것은 오직 한 사람, 악을 완전히 정복한 자만이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오직 한 사람! 악에 감염되지 않고, 악을 밟고 서 있는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분이, 악을 밟고서 말씀하십니다. 그 분의 음성에 귀 기울여봅시다.
2. 영생의 씨앗
"잘 들어라! 옛날에 씨 뿌리는 사람이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뿌린 씨가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는데,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는데, 흙이 깊지 않아서 금세 싹이 올라왔다.
하지만 해가 뜨자 시들더니 말라죽어 버렸다. 뿌리가 깊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졌는데, 덤불이 자라면서 그 기운을 막아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다.
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소출이 있었는데, 자라고 퍼져서 수확이 컸다.
어떤 경우는 30배 어떤 경우는 60배, 어떤 경우는 100배를 거두었다."
예수께서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영생의 말씀
"새로운 사회의 출범" 이 맥락 위에서 악을 밟으신 자의 이야기를 이해해봅시다.
여기서의 씨는 말씀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 밭에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가 뿌리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바로 "영생의 말씀"입니다.
영생이라는 단어의 뜻은, 우리가 죽어서 살게 될 곳에서 영원히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생은, 올 시대입니다. The Age to come 입니다. 즉, 오게 될 새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new era는 '새 시대'란 의미
그렇기 때문에,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시간을 영원히 쭈욱 늘린다는 말도 아니고,
내가 죽어서 갈 어느 장소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이 땅에 반드시 오게 될 새로운 시대를 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 "새로운 사회" 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성서의 표현을 빌어쓰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낡은 시대는 지나고,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악은 패배했고, 새시대의 주인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 시대의 기쁜 소식이, 새로운 사회의 시작이, 새로운 출애굽의 감격이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예수로부터 부어진 새로운 시대에 대한 확신과 갈망, 이것은 마치 씨앗과 같습니다.
영생의 씨앗,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 밭마다 떨어졌습니다.
-종교와 소식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영생의 씨앗을 '종교'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마음 마다 영생의 씨앗이 떨어진 것은 종교를 갖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종교는 무엇입니까? 팀 켈러 목사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종교의 기능은, 조언이다."
종교는 말합니다. "신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신 앞에 설 자격을 얻는다" 이런 식의 조언입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이 나와서, 나는 이렇게 살았노 말합니다.
그럼 사람들이 '아,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 결심합니다. 삶에 조언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언을 통해 자기 삶에 대해서 더 나은 방향을 찾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영생의 씨앗이 떨어졌다는 말은, 조언을 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종교라는 단어로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조언이 아니라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즉, 영생의 씨앗은, 역사 속에 분명히 일어난 어떠한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인생 살이에 대한 좋은 조언을 들으면, '아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것은 고려의 현종 임금이, 거란에 의해 나라가 멸망할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바로 그 거란군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강감찬의 소식을 접했을 때의 감격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영원한 소망, 참된 기쁨, 그것은 조언이 아니라 소식에 있습니다.
그 소식은 이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나를 위해서 사형틀 위에서 나의 죄를 뒤집어쓰고 홀로 죽으셨다는 말도 안되는 소식입니다.
이러한 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신 말입니다. 세상에 숱한 신들의 이야기가 있으나, 자신의 목숨 다하여 사람을 사랑한 신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 사건은, 신화도, 철학도 아닌,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정말 역사 위에서 벌어졌습니다. 그 분은 정말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이 소식은, 우리를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밀어넣습니다. 마치, 이러한 것이죠. 나는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 바다에서 허우적 대지만 거친 파도에 조금도 나아갈 수 없고, 끊임없이 물을 먹으며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어떤 사람이 나타나, 나를 붙잡고 그 거친 파도를 뚫고 헤엄칩니다. 그래서 나는 뭍으로 나와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넘실 거리는 거친 파도와 그 파도 속에서 누군가의 절규가 들려올 뿐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파도는 거짓말처럼 멈추었고, 그는 해변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것을 보는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나의 목숨을 건졌기에,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우리를 비탄으로 몰아넣습니다. 나를 살려준 그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뻐 뛸 수 없습니다. 기쁘지만 슬픈, 사건의 현장에 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생의 말씀이라는 소식은 두 번째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 물에 빠져 싸늘한 시신이 되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거짓말처럼 그는 일어나, 우리를 찾아왔고, 빙긋 웃었습니다. 우리는 그 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요? 저는 그가 생명의 은인으로서의 댓가를 요구할까봐 다시 걱정에 빠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죽음을 넘어 끝까지 너를 사랑한다” 고 말합니다. 나는 그 사랑에 감격했습니다. 나는 그 사랑에 정복 되었습니다. 나는 그 사랑에 치유되었습니다. 나와 그의 관계 안에서, 모든 악이, 죽음이,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의 사랑에 빚진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에서 분명히 일어난 소식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랑의 화신인 예수는, 죽었고,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A.D. 1세기에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예수의 소식 전하는 것을, 인생의 과업, 시대의 사명으로 여겼고, 그 결과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 소식이 들려졌습니다.
나의 죄를 위해서 죽은 한 사람, 그리고 다시 일어난 한 사람,
그 사람으로부터 이 땅으로 돌입한 새로운 시대의 소식!
이것이 영생의 씨앗, 새 시대의 소식입니다.
이것은 누가 생각해낸 소설도 아니고, 그저 머리 속에서 만들어낸 공상이 아닌,
역사 입니다. 우리는 이 실제로 벌어진 역사의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다시 정리합시다.
새로운 사회의 출범.
그 사회를 이끄시는 왕이 예수이십니다.
그는 악을 밟고 서서 말씀하십니다.
조언이 아니라 소식을 말씀하십니다.
그 왕으로부터 얻어진 위대한 승리,
그 왕으로부터 얻어진 악의 파멸,
그 왕으로부터 얻어진 새로운 시대를 말씀하십니다.
그 소식이 사람들의 마음 한 가운데로 떨어졌습니다.
3. 그 소식을 듣고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영생의 씨앗이 마음에 떨어졌는데,
씨앗이 그렇듯, 이 씨앗은 곧장 열매 맺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면 어떻게 모든 비유를 이해하겠느냐?
씨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뿌린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지만 곧바로 고발자가 와서 거기에 뿌려진 말씀을 가져가 버리는 사람들이다.
바위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잠시 열광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말씀 때문에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박해를 당하면 금세 환상에서 깨어난다.
가시덤불 사이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지만 현 시대의 걱정과 돈의 유혹과 다른 것들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 말씀이 질식당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받아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30배, 어떤 사람들은 60배, 어떤 사람들은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오늘 이 본문에서 등장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음밭이 딱딱하여, 이 위대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아, 고발자, 즉, 사탄이 이 소식을 가져가버리는 자도 말씀을 듣습니다.
마음밭에 바위가 가득하여, 잠시 열광할뿐, 새시대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말씀을 듣습니다.
마음밭이 가시로 뒤덮혀서, "현 시대"의 걱정과, 돈의 유혹과, 다른 것들에 대한 욕망 때문에,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도,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새시대의 소식을 듣고, 감격스러운 열매를 성취하는 자들 역시 말씀을 듣습니다. 모두가 말씀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즉, 모두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의 시대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상태가 어찌 되었든, 말씀을 듣는 자들, 바로 우리니까요.
그러나 이 본문은 우리에게 불안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길가와 같아 씨앗이 심겨질 수 없는 마음,
돌이 많아 영생의 말씀이 삶에 뿌리 내릴 수 없는 마음,
가시덤불로 영생의 씨앗이 자랄 수 없게 만드는 마음이
바로 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런 마음을 가진 당신도, 분명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픔입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 깨닫습니다.
새 시대의 소식을 듣고, 그 씨앗을 열매 맺으려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확실히 알게 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이 새로운 소식에 합당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가져오는 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실망하고 절망합니다. 그 절망의 이유는 대개 둘 중에 하나입니다. 먼저는, 하나님 말씀이 인간이 살아낼 수 없을만큼 가혹하다 생각하는 절망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많습니다. '나는 예수는 믿지만 하나님 말씀대로는 죽어도 못살겠다. 너무 어렵다. 할 수 없다.' 심지어 크리스챤이라 말하는 자의 입에서도, ‘어떻게 말씀대로 살아요’ 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는 정말 절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믿음대로 말씀대로 살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대로 살아낼 수도 없는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일테니까요. 그러한 가혹한 하나님 아래서, 무능한 인간은 절망 밖에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절망은 이러한 것입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말씀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 앞에서 내가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의 절망입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살수록, 자기 안에 깊은 죄를 보기 때문에 하는 절망입니다.
자신이 뼛속까지 죄인이라 절망하여, 그 사랑에 염치 없고, 그 사랑받을 자격 없음을 아는 절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내는 예수를 붙들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음을 아는 절망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라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에 절망하여, 모든 삶의 기준을 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에게 절망하여, 모든 삶을 말씀에 헌신하겠습니까?
전자를 교만이라 말하고, 후자를 회개라 말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4. 절망에서 희망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문제가 있어 하는 절망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우리 자신들에 대한 절망합시다.
회개 합시다.
이것은 정말 절망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 자신들을 포기하자 말하는 것입니다.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어 그 분 외에 어떤 것도 우리의 소망삼지 말자 말하는 것입니다.
단연코,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어떠한 희망도 발견할 수 없다 말하는 것입니다.
악을 밟고 선 그 분 아니고서야, 우리는 모두 물 속에 수장되는 죄인일 뿐입니다.
건져주심 없이, 우리는 끝없이 악의 수심 아래로 가라앉을 뿐입니다.
너무도 감사한 것은,
새시대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말씀대로 살지 않은 신 앞에서의 반역자 같은 내 삶에,
아직도, 영생의 소식이, 복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기했을 때, 영생의 말씀은 그 찬란한 빛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은 그냥 삶에 좋은 조언으로서,
우리의 마음 밭을 옥토밭 만들자는 것일리 없습니다.
우리가 좋아보이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혹은 아니면 좀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설교를 잘 들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 본문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악을 밟고서, 사람들에게 씨를 뿌리는 예수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하나님 아닌 것을 붙들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고 포기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절망을 지나 부활의 온전한 소망을 이루신, 자신을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그 분이 말하는 영생의 말씀은, 바로 그렇게 열매 맺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는 어떻게 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격없는 우리 앞에 한없이 서계시는 그 예수 때문에,
우리는 다시 우리의 마음밭을 갈아 엎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격없는 우리에게 오늘도 새시대의 소망을 말씀하시는 그 예수 때문에,
우리는 다시 우리의 마음밭에 있는 말씀을 살아내지 못하게 하는 거친 돌들을 다 끄집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격없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전해주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다시 세상 걱정의 가시 덤불을 치워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가, 그의 소식이, 우리 삶을 변화시켜야 하는 유일한 이유요, 소망의 근거입니다.
그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양의 문이십니다.
그 분 때문에 여러분을 바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말함은, 결코 공허한 말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반성하는 마음을 갖고자 예수를 말하고, 이것을 무한정 반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변화 없이, 그 분의 이름을 공허하게 외칠 수 없습니다.
그 예수 때문에, 우리는 누구와도 차별없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예수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을 댓가없이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예수 때문에, 우리는 함께 악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되려는 것입니다.
이 귀한 자격을 우리의 일상에 흘려 버려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영생의 씨앗은 현실의 열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우리가, 예수를 온전히 의지함으로 이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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