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바알세불(3:20~35)

  예수께서 집으로 들어가셨다. 무리가 다시 모여들어 예수 일행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예수의 가족들이 이를 듣고 예수를 제지하러 왔다. 가족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바알세불에 사로잡혔다!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말씀하셨다. "고발자가 어떻게 고발자를 쫓아낼 수 있느냐? 나라가 둘로 쪼개지면 지속되지 못한다. 가정이 둘로 쪼개지면 지속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고발자도 스스로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둘로 쪼개지면 지속되지 못한다. 그의 때는 끝난다! 하지만 기억하라.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산을 훔치려면 먼저 힘센 자를 묶어야 한다. 그래야 그 집을 약탈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모든 죄와 온갖 신성모독은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죄를 지은 것이다."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그들의 주장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집 밖에서 기다리면서 사람을 보내 예수를 불렀다.

  예수의 주위에 앉아 있던 무리가 말했다. "보십시오!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냐? 누가 내 형제냐?"

  예수께서 그곳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쳐다보시며 말씀하셨다. "내 어머니가 여기 있다! 내 형제들이 여기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다 내 형제와 자매요 어머니다!"



0.


  그리고 우리는 이제, 시작을 지나 부르심을 지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내용으로 들어왔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예수님의 비유가 시작됩니다. 다음의 비유들이 등장합니다.


고발자의 비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 받침대 위에 세운 등불 비유

또다른 씨의 비유


  그리고 이 모든 비유들은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을 염두하고 비유들을 읽어나가면,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 다스리심의 원리와 질서들을 눈 앞에 보여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고발자의 비유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고발자의 비유는 예수의 가족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 가족




  예수께서 집으로 들어가셨다. 무리가 다시 모여들어 예수 일행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예수의 가족들이 이를 듣고 예수를 제지하러 왔다. 가족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가족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사회를 이루는 가장 최소 공동체 단위가 가족이니까요. 가족이 중요하지 않던 시대와 나라는 없습니다. 특히 유대사회에서 가족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하나님과 핏줄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가족이라는 것은 곧 언약 안에 있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유대 가족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의미, 곧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가족'은 목숨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가족들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하는 소리가, "아, 우리 가족 예수가 제정신이 아니다"입니다. 왜 일까요? 왜 그들은 예수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요?


-우리나라의 단군 이야기와 비교


  아마도 이 가족들은, 예수가 걱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을 메시아라 주장하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며, -그래서 '귀신들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 더럽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추잡한 사람들과 함께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는 예수. 그 예수를 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가난하고,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의 인격을 온전하게 하는 일은 이상하게도 대결을 불러왔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자들이 그들을 살린 예수를 못마땅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과, 예수와 예수를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껍데기를 붙잡고 있느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격이 짓밟히고 있는 매일의 현실을 그저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이 바로 '유대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여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예수가 걱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가 이 '유대 가족'을 공격하는 것이 몹시 걱정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빨리 안전한 '유대가족'의 품 안으로 예수를 데려오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데리러 왔습니다.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그런데, 정말 이 가족의 품은 따뜻한 것입니까? 그 가족들의 말대로, 유대가족을 비판하는 예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습니까? 가족들이 그를 찾아 왔을 때 예수가, '아,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지'하면서, 그 가던 길을 돌려 자신의 집으로 향했습니까? "다시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뒤엉켜 있는 바로 그 세상"을 그저 그렇게 내버려 둔 채 등을 돌리고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혹시 이럴수는 없는 것입니까? 예수가 말하는 것처럼, 유대가족이 완전히 잘못되어 버린 건 아닐까요? 그들이 속한 세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이 잘못되어버린, 변질된 유대 가족에 속해 있는 것이 더 이상 구원이 아닌 것은 아닐까요?


  더 충격적인 것은, 이 예수의 길을 막아선, 예수의 가족이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주 익숙한 사람입니다. 크리스마스 덕분이죠. 방이 없어 여기저기를 헤매는 남편과 새댁, 마굿간에서 출산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젊은 부부, 누구입니까? 요셉과 마리아. 이들이 가족입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말하는 것입니다. "아, 예수는 제정신이 아니다.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라." 성녀라 불리는 마리아는 예수의 사역을 말리던, 그저 예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가족에 대한 예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인류의 시작은 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가족이 커져서 씨족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족사회가 부족 사회를 거쳐 오늘 이 문명이 이르기까지, 가족은 중요하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은 곧 곡식을 생산하는 생산력이요, 이웃 부족과 싸우는 군사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은 역사 속에서 부인된 적이 없는 가치입니다. 가족의 잘됨은 곧 부족과 씨족의 강성함이었고, 국가의 강함이었습니다. 가족이 잘 되어야 나라가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가족이 잘되는 것이 모든 것이 잘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전쟁터에 나가는 수많은 이 땅의 남자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위해 싸웠습니다. 자신들의 가족을 위해서, 다른 가족의 피 비린내를 맡았습니다. 가족이 잘되는 것이, 언제나 아름다운 평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역사가 말하는 가족은 마치 층간 소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 가족이 편하다고, 남의 가족까지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무조건 잘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가족이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생각해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최초의 가족은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입니다. 씨족과 부족으로 가족이 확대되기 전에 최초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에게는 사명이 있었으나 그 가족은 사명을 저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가 말하는 가족은 실패한 가족입니다. 따라서 가족의 잘됨이 무조건 옳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뜻 따라 사는 일에 실패한 가족이 무조건 잘되는 것이 뭐가 좋습니까?


  이후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가족의 실패를 뒤집고, 새로이 '유대가족'을 다시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열방의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가족의 사명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가족이 있는 이유입니다.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따라, 열방의 빛으로 사는 최소 공동체. 이것이 가족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족이 '열방의 빛'으로 사는 것은, 가족이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무한정 내 가족만 잘되길 바라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가족은, 다른 가족을 위해 희생할 것을, 진리를 위해 죽음을 각오할 것을 요구 받았습니다. 이 가족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이방 가족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이 가족은 세상을 위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즉, 남의 집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은 어떠합니까? 


  찢기고, 상한 가족, 소통이 되지 않는 가족, 부모와 대화하지 않는 아이들, 아이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부모, 가족은 찢기고 아파하는데, 그 안에 사랑이 흘러넘치지 않는데, 문제의 해결을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유대 가족이 그러했습니다. 가족이라 말하면서, 그 안에서 죄인이라 밀어내고, 귀신들렸다 밀어내고, 돈의 노예가 되어, 이방 제국의 힘에 매료되어, 그렇게 하나님과 상관없는 가족이 되었음에도,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그저 돈을 많이 벌면, 그저 이방제국들을 몰아내면, 그저 종교적인 열심을 내면 일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그저 그 금이 가고 찢긴 가족을 어떻게든 지키려고만 했지, 그것을 새롭게 회복시킬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저 어떻게든, 가족안에 안주하기만하면 그것이 구원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부모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2. 새로운 가족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바알세불에 사로잡혔다!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가족을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향해 말합니다. "예수는 바알세불에 사로잡혔다!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 '바알'이란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근동에서 섬겼던 그 신, 바알이고, '세불'은 똥이란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알세불'은 "이방 똥신" 정도가 되겠습니다. 즉, 예수를 사탄으로부터 온 힘을 가지고 흑마술을 부리는 정도라 조롱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애써 부정한채 말입니다.


  왜입니까? 왜 율법학자는 예수를 이방 똥신에게 사로잡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유대가족을 없애거나 해체해버리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셨다한들, 유대 가족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셨고, 자신이 유대인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유대 가족을 없애기는 커녕, 모든 사람을 유대 가족 안에 받아들이신 일입니다.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여자, 노예, 이방인, 전에는 하나님의 가족이라 여겨지지 않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이십니다. 인간이 지은 성전이 인정하지 않던 그 사람들을 성전 되신 예수께서 고치시고 인정해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누구나 하나님의 가족, 유대 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 가족의 주인이시기에 그러실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가족은 이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만 하나님의 가족이지, 저 사람들과 가족이 될 수는 없어!" 유대 가족은 애시당초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것인 유대 가족에 하나님이 인정하신 사람들을 들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시는 일에 몹쓸 짓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이름표를 붙이는 일입니다.


  이름을 붙여버리면 참 편하죠. "새끼"라는 말이 참 신기한게, 전세계 공통입니다. '축소사'라고 하는데, 상대를 경멸할 때 쓰이는 말들은, 다 상대를 작고 질 떨어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일종의 이름표입니다. 이렇게 이름표를 붙여놓으면 이제 편해집니다. 걔는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가 아니라 '새끼'이니까, 경멸하고 욕하고 얕잡아봐도 되는 것입니다. 새끼만 그렇습니까? 모든 경멸적인 이름표들이 다 그러합니다. 우선은 붙여버리면 그만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에게 "똥신"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버렸습니다. 이름표를 붙여버리니까, 예수께서 해왔던 모든 사역이 귀신의 일이 됩니다.  '잘못된 이름을 붙이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아들의 사역을 귀신의 사역으로 정당화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했다면, 그 분의 사역이 불편했을지언정, 가치 없다고 여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전적 방법을 사용합니다. 가치를 떨어뜨리는 이름으로 불러버리는 것이죠. 그럼 마음이 편해집니다. 마음껏 예수를 욕하고 경멸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알세불'이고, '귀신의 왕'이니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를 '바알세불'이라 이름 붙여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악한 행위인지, 우리는 역사 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이름붙이기의 역사는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 2:19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아담은 최초의 언어 사용자이며, 그로 인해서 최초의 명사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피조물들이 인간에 의해서 이름이 붙습니다. 왜 이름을 붙입니까? 다스림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을 인간도 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뜻을 따라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름을 붙이는 일입니다. 즉, 명사를 만드는 일입니다. 어느 동물도 명사를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명사를 만들고, 대상에 이름을 붙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붙이기, 명사 만들기가, 상대를 경멸하고 파괴하는 일에 사용된다면,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창조의 역행입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거룩한 임무에 대한 망각입니다.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마태복음 5:21,22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이름 붙이는 일을 살인과 나란히 놓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름 붙이는 것에서부터 상대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이건 어마어마한 권리입니다. 신께서 이 땅을 다스리는 인간에게 부여한 다스림을 위한 기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 붙이는 일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율법학자들은, 유대 가족을 모든 이들에게 확장하시는 예수를 몰아내려, 그에게 '똥신'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오늘날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타인의 인격을 경멸하는 숱한 말들. 욕입니다. 욕. 


  오늘 이야기를 풀어 말한다면, 마치 이러한 것입니다. 

  학교에 끼리끼리가 있습니다. 어느 반이나 끼리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아이들과 다 만날 수는 없으니까, 친하고 덜 친한 아이들이 생기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놀고 있는 아이들 무리가, 특정 어떤 아이와 어울리기를 꺼려한다면, 그 아이들은 썩은 것입니다. 그러다, 어떤 아이가 일어나서 말합니다. "우리 반에 끼리끼리가 너무 심해, 왜 재덕이랑은 놀아주지 않는거야? 나는 앞으로 이 반에 소외받는 아이들과 가장 먼저 친해지겠어. 너희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계속 말하겠어!"  이렇게 말하는 순간, 주변에서 쑥덕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 저 새끼, 왜 이렇게 나대?" 순간, 그 아이는 "저 새끼"가 됩니다. 그리고 그가 말했던 말의 진의는 사라진 채, 그저 "나대는 아이"가 됩니다.


  욕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타인에게 이름을 제대로 붙여줍시다. 그의 인격을 경멸하고 깎아내리는 이름표를 우리 안에서 일소합시다. 이것은 또다른 살인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더러운 이름표를 타인에게 붙이기보다, 진리로 인해, 타인에 의해 더러운 이름표 붙는 것을 기뻐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고, 이것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태복음 5: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세상에 천하고, 다른 사람들이 대하기 싫어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가족 삼는 그 일을 합시다. 우리가 이 일에 미쳐있으면 세상이 우리를 이상하게 볼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를 욕할 것입니다. "너만 잘났어? 왜이렇게 나대? 착한척이야. 쟤랑 놀지마." 그러나 그러한 말들은 모두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그러한 이름표는 접착력이 없습니다. 곧, 진리로 인해 그 터무니없음이 드러나고 떨어집니다. 


  십자가로 모든 사람은 초대되었고, 인간이라면,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초대되었습니다. 함께 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조선족, 외국인 노동자, 왕따, 병 걸린 사람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 싸이코 패스, 북한 새터민, 전학생.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지나, 고생 끝에 낙이 옴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고생을 겪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예수가 못 고칠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욕하고,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가족 삼으신 하나님을 욕하는 일이 됩니다. 가족 밖에 있는 다른 가족을 욕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무지의 소치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심을 입었음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믿음 안에서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죠. 정전이 된 어느 집에, 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2층에서 자고 있던 아이가 1층에서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엄마, 아빠는 분명 어제 여행 가신다고 나가셨는데, 형 누나도 오늘 안들어오고 친구네서 논다고 했는데, 1층에 웬 인기척이 있을까, 점점 걱정이 되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삐그덕 거리는 계단을 밟고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빠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어, 인기척이 나는 부엌으로 갔습니다. 마루에 있는 불을 켜보았으나, 역시나 정전인지라 불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쪽에서도 어둠속에서 움직이는 나를 발견하고,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대치하고 있었는데, 팟 하고 불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치하고 있던 둘은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친구네서 자기로 했던 형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둘은 허탈하게 웃고,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만약 누군가를 우리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만약 누군가를 우리가 밀어내려 한다면, 누군가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전된 어둠 속을 걷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와 함께 걷는 것은, 그가 나와 가족임을 아는 것이에요.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가족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밝은 진리위에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3. 그 가족이 모이는 것을 막는 자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이제 비유의 시작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말씀하셨다. "고발자가 어떻게 고발자를 쫓아낼 수 있느냐? 나라가 둘로 쪼개지면 지속되지 못한다. 가정이 둘로 쪼개지면 지속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고발자도 스스로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둘로 쪼개지면 지속되지 못한다. 그의 때는 끝난다! 하지만 기억하라.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산을 훔치려면 먼저 힘센 자를 묶어야 한다. 그래야 그 집을 약탈할 수 있다.


  본문에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라는 표현이 다른 번역에서는 "비유로" 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유는 view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는, 자신에게 붙은, 말도 안되는 이름표를 걷어내십니다. 

  여기서 고발자는 곧 사탄입니다. 사탄이라는 말의 뜻이 The accuser 고발자입니다. 만약 율법학자들이 이름 붙여준 대로, 예수가 정말 '바알세불'이라면 그는 사탄과 한 편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하고 있는 일은 너무도 분명히, 악을 몰아내고, 악에 짓눌려 있는 자들을 구출하고 있었기에, 예수의 존재는 사탄의 세력들 안에서 생긴 내부분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두는 대번에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가 악과 같은 편일리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붙여놓은 바알세불이라는 이름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당신이 옳은 일 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이런 저런 평가에 귀 기울일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진짜 이름표는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붙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붙인 이름표는 곧 걷어집니다. 남들이 뭐라하든, 사람이 붙여준 이름표는 당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당신을 몰라요.


  남들이 붙여준 이름표를 떼신 예수는, 이제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산을 훔치려면 먼저 힘센 자를 묶어야 한다. 그래야 그 집을 약탈할 수 있다," 여기서 힘센 자가 등장합니다. 이 힘센 자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그를 묶습니다. 그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도록 묶어버립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다시 빼앗아옵니다. 여기서 힘센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The accuser입니다. 이 힘센 자를 묶은 더 힘센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예수입니다. 예수께서 사탄을 묶으셨습니다. 사탄은 그를 묶은 자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예수는 사탄을 결박하신 후, 그에게 저당 잡혀 있었던 사람들을 다시 구출해옵니다. 끼리끼리와 분파주의에 빠져있던 사람들을 위대한 하나 됨으로 불러내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그저 수사적 표현입니까? 아닙니다. 역사입니다. 언제입니까? 이 비유는, 분명한 사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험기사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을 시험하려던 사탄은 예수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그에게 오히려 묶였습니다. 악은 진리를 묶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사탄의 왕국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하시고, 사람들을 구출하셨습니다. 더 힘센 자가 사탄의 집에서 사탄을 묶고, 사탄이 끼리끼리와 분파주의로 망가뜨린 사람들의 인격을, 하나님 없는 가족됨으로 저당잡은 사람의 생명을, 다시 되찾아 살리시고, 구출해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모든 죄와 온갖 신성모독은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죄를 지은 것이다."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그들의 주장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런데 이 예수의 일. 사탄을 묶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도하는 이 일은 하나님의 일, 성령의 일입니다. 그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과거에 하나님을 얼마나 욕했던지, 모든 것은 다 용서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가 사람들을 차별없이 하나님 가족으로 인도하는 이 일을 막는 사람은 곧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출사건을 막으려하니, 그는 이 구출사건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출애굽을 막는 것은 스스로를 파라오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모독 죄입니다. 이 죄에는 용서함이 없습니다. 영원한 죄입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를 가로 막는 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이기도 합니다.




4. 새로운 가족이 되는 길, 예수




  이 이야기는 다시 가족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성경은 한 절 한 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이기 때문에, 모든 구절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족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가족으로 끝나는 것은 이것이 하나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론입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집 밖에서 기다리면서 사람을 보내 예수를 불렀다.

  예수의 주위에 앉아 있던 무리가 말했다. "보십시오!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형제들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그들을 보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냐? 누가 내 형제냐?"

  예수께서 그곳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쳐다보시며 말씀하셨다. "내 어머니가 여기 있다! 내 형제들이 여기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다 내 형제와 자매요 어머니다!"


  이것이 예수의 답변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는, 사람들을 유대가족으로 모두 불러모으시는 중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의 사역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두를 유대 가족으로 부르시고, 또한 이 유대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하십니다. 진정한 유대 가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예수님과 가족으로 연결된,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가족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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