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씨의 비유들(4:26~3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심었다.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는데, 그는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 처음에는 줄기가 나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그러고는 이삭에 온전한 곡식이 맺힌다. 그러나 일단 곡식이 익으면 곧바로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말할까? 어떤 그림으로 그것을 나타낼까? 그것은 마치 겨자씨와도 같다. 땅에 심길 때는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지만, 일단 심기면 쑥쑥 올라와 가장 풍성한 덤불이 된다. 나중에는 큰 가지를 내어 그 그늘에 '공중의 새가 둥지를 튼다'"
 예수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이러한 비유를 많이 들려주셨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주셨다.



0. 살인의 추억


  어제, 그러니까 금요일이죠.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 살인의 추억에 대한 리뷰를 읽다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들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이 장면. 저도 극장에서 살인의 추억 봤습니다. 그 때, 저는 송강호가 마지막에 관객석을 보면서, 어디선가 영화를 보고 있을, 아직 붙잡히지 않은, 그 살인 용의자를 응시하는 장면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봤던 리뷰는 제가 생각했던 결론을 완전히 뒤집고 있었습니다. 그 리뷰를 읽으니까, 살인의 추억이 어느샌가 반전영화가 되어서 저를 충격의 도가니로 빠뜨렸습니다.

  내용은 이러한 것입니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메뚜기 잡는 소년이 있습니다. 이 소년은 메뚜기를 잡아다 병에 넣어 죽이는 아이입니다. 경찰들이 나타났을 때, 그 죽은 메뚜기가 들어있는 병을 숨겼던 바로 그 소년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곧 송강호 자신입니다. 감독은 송강호와 비슷한 머리스타일, 비슷한 색의 옷을 입혀놨습니다. 즉, 메뚜기가 상징하는 것은 죽임당한 여성들이고, 이 소년 자신은 범인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범인을 상징하는 것은? 송강호입니다. 극중에서의 이름은 '두만'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만'은 '전두환'을 상징합니다. 빨간색 옷 입은 여자만을 골라죽이는 그는, 빨갱이를 혐오하는 그 입니다. 폭력적이고 비과학적인 수사로 범인을 놓치는 그는 폭력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를 놓치게 만드는 그 입니다. 번번히 그가 운전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자동차는 고장이 나기 일쑤고, 마을 아이들의 돌까지 맞습니다. 미국에서의 연락에 목을 맬 뿐, 정작 사건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그 입니다. 즉, 사람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살인 사건 속에서, 범인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제 5공화국의 공권력이 진짜 살인의 방조자요 범인이라는 것이, 이 영화의 새로운 해석입니다.



  
  게다가 이 그림은 전두환의 부인인 이순자 여사의 그림과, 송강호의 그림을 같이 보여줍니다. 게다가 결혼반지처럼 보이는 저 박카스 뚜껑은,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만약, 이 해석이 들어 맞는다면, 송강호의 마지막 표정의 눈빛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범인을 주시하는 형사의 표정이 아닌, 자신이 범인임을 들켜버린 표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 리뷰는, 네이버 영화, 살인의 추억에 들어가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은 추천수를 받은 리뷰가, 제가 봤던 리뷰입니다. 그 리뷰를 보면, 봉준호 감독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범인이 누구인지를, 그 숨겨놓았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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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뜬금없이 살인의 추억을 이야기했는가. 예수님의 말씀도 이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야기는 상징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상징들을 따라나가면, 이전에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새로운 결론이 되어 다시 조각이 맞춰집니다. 즉, 예수님은 이야기를 각색하는데 달인이셨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에 메시지를 분명히 남기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예들을 몇 번이고 살펴봤습니다. 그는 인자의 이야기를 알고 계셨고, 도망자 다윗의 이야기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바다를 건너는 출애굽,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산, 구약의 역사의 이야기를 아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저번 주에는 그 분이 등불 이야기를 사용하시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자신의 이야기에 적절하게 더하셨습니다. 이렇듯, 그 분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가져와서, 그 이야기를 비트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결말의 흔적들을 보여주십니다. 그것도 온 몸으로 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마가복음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에서 왔고, 예수님은 이것을 어떻게 비트시는지, 함께 확인해봅시다. 우리 마음에 그의 메시지가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새로운 결말의 흔적들을 온 몸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심었다.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는데, 
  그는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 
  처음에는 줄기가 나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그러고는 이삭에 온전한 곡식이 맺힌다. 
  그러나 일단 곡식이 익으면 곧바로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들리십니까? 예수님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십니까? 
  


1. 요엘의 예언 이야기


  이 이야기 해석의 키는 마지막 문장에 있습니다. "일단 곡식이 익으면 곧바로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냥 우리가 들으면, 별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뒤에는 요엘이란 사람의 예언의 흔적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요엘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흥분시키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이야기였습니다.

  요엘이라는 사람이 예언했습니다. 성서에 <요엘서>가 그 예언의 내용입니다. 요엘서 3장에서 우리는 이 마지막 단서가 되는 구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요엘서 3:13
"민족들아, 출발하여라. 여호사밧 골짜기로 오너라. 내가 거기에 머물면서 사방의 민족들을 모두 심판하겠다.
거두어들일 곡식이 다 익었으니, 너희는 낫을 가지고 와서 곡식을 거두어라.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마다 술이 넘칠 때까지 포도를 밟듯이, 그들을 짓밟아라. 그들의 죄가 크기 때문이다."

  이 요엘서 3장 13절이 어떠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엘서의 주제는 '주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모든 민족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은 거기서 곡식을 거두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던 사람들은 이제 그 고난의 때가 끝나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주의 영임하면." 이 가사가 요엘서에서 가져온 가사입니다. 이 '주의 날'은 예수님 당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소망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러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민족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을 믿어 고난을 견뎌왔던 자들에게는 성령이 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추수의 날인 것입니다.



2. 어떤 사람


    최소한의 단서를 얻었으니, 다시 오늘의 비유를 들여다 봅시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심었다.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는데, 
  그는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 
  처음에는 줄기가 나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그러고는 이삭에 온전한 곡식이 맺힌다. 
  그러나 일단 곡식이 익으면 곧바로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시는지 확인해봅시다. 그런데 우리는 맨 마지막 문장에서 이 비유 해석의 단서를 얻었으므로, 뒤에서부터 거꾸로 이 비유의 뜻을 하나하나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주의 날이 왔기 때문이다"
  "일단 곡식이 익으면 곧바로 낫을 대는 날"이 찾아옵니다. 
즉, 주의 날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날이 찾아옵니다. 그 날은 추수의 날입니다. 모든 민족들 중에서 고난받는 이들이 구원을 얻고, 그들이 성령을 받는 날입니다. 더불어 이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판결에 서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민족들은 심판을 받는 날입니다. 


2) "그 날에 어떻게 된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추수된다"
  그렇다면 추수되는 것의 정체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람'입니다. 주의 날에 추수되는 것은 사람입니다. 즉, 고난받던 이들, 하나님의 성령받은 이들이 바로 추수된 곡식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추수되기까지, 어떻게 자라났는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은 "밤낮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싹이 나고 자라버렸다" 고 말합니다. 즉, 누가 키워내거나, 길러내려고 애쓴 것이 아닙니다. 마치 바람과 같이, 어디서부터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성령으로 난 자가 생겨버린 것입니다.

1) "그들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씨앗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점에서, 본문의 가장 맨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 이 씨앗을 심는 이 '어떤 사람'의 정체 마저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새 시대의 소식,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뿌리는 씨앗은 사람들 마음 속에 떨어져 언제 자란지도 모르게 점점 커져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날이 되어, 이 사람이 뿌린 씨앗으로 열매를 맺은 자들이 추수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습니다. 그럼 이 '어떤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것은 마치 송강호가 전두환을 상징하는 인물임을 발견한 것 이상의 충격을 우리에게 앉겨 줍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 새 시대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야기를 비틀고 비틀었으나, 그 맥락은 분명한 결론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말에 의해서, 주의 날, 추수되느냐, 심판받느냐가 결정됩니다. 이 씨앗을 뿌리는 어떤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그 사람. 지금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자신입니다. 

  비유를 통해서 이것을 알게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평생 로마의 지배 아래서 고난받으면서, 주의 날을 고대하고 고대하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의 날'의 '주'입니다! 사람들이 받을 충격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이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그들 앞에 주가 서계십니다. 그 주는 화려하지 않고, 천군천사를 대동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복음의 새 소식과, 성령과, 주의 날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복음의 새 소식과, 성령과, 주의 날이 들려졌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방식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추수되는 일만 중요합니다. 당신이 성령받는 일만 중요합니다.




3. 그럼 정말 이 일이 일어났는가? 



  그럼 이제 물어야 합니다. 정말 예수로 인해, 주의 날이 이 땅에 임했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어떤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성령 받은 사람들은 어떤 교육이나, 사람의 열심으로 된 것이 아니라 바람과 같이, 출처 없이, 마치 씨앗이 자라나듯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이뤄진 것이어야 합니다. 이 일이 정말 일어났습니까?

  네.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요한복음 3:18~21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주의 날은 예수의 날입니다. 이 날은 추수와 심판의 날입니다. 예수께서 그 심판의 날을 가져오셨습니다. 어떻게 그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 그 분은 아무 빛도 없는 방안에 들어온 등불과도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등불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인격이 부어지고, 그 성령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등불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어둠을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나아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더러운 것들이 빛 가운데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성서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 말합니다.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예수의 씨앗이 여러분에게 전해지는 지금 이 순간의 주의 날입니다. 성령과 심판이 나뉘는 바로 그 날입니다. 

  오늘 비유의 어떤 사람은 2000년을 넘어 오늘 여러분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 새 소식을 받아들여! 그리고 그 소식으로 살아!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삶입니다.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자마다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주의 날입니다. 반대로, 그 어떤 사람의 말씀 앞에 길가로, 돌밭으로, 가시덤불로 대하는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 날에 있어, 자신들이 심판받은 생명의 온기없는 차가운 백성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날은 주의 씨앗이 파종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를 받아들이고, 성령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를 거절하고, 심판을 받으시겠습니까? 이것이 말씀이 선언되는 매 순간 결정됩니다. 성령과 심판이 동시에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선언됩니다.

  우리가 예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날마다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세상에서 얻지 못한 새로운 근원을 갖게 됩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이 바람처럼 불어옵니다. 예수의 바람, 성령의 바람,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인격이 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어찌 삶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내기를 바라고 바라는 그러한 삶이, 지금 우리 앞에 여러분의 귓전에 울리고 있습니다.



4. 이 일의 결말



  그리고 그의 소식은 내 말들으면 살고 죽어에서 끝나는 협박이 아닙니다. 금덩이와 똥을 놓고 보여주면서 금 안가지면 안된다고 협박할 수 있습니까? 금의 가치를 알아보기만 하면, 이것은 협박이 아니라 위대한 선물이 됩니다. 그의 말씀을 듣는 것과 듣지 않는 것의 선택은, 결코 협박이 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 귀하고, 그것이 우리의 인격을 아름답게 하며, 그것이 역사를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시작이기에, 이것은 위대한 초대가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말할까? 어떤 그림으로 그것을 나타낼까? 
그것은 마치 겨자씨와도 같다. 땅에 심길 때는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지만, 
일단 심기면 쑥쑥 올라와 가장 풍성한 덤불이 된다. 
나중에는 큰 가지를 내어 그 그늘에 '공중의 새가 둥지를 튼다'"
 예수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이러한 비유를 많이 들려주셨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주셨다.

   그 씨를 뿌리는 어떤 사람,  예수가 계속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는, 이 주의 날에 벌어지는 일이 어떠한 결말을 맞게 될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마치 씨앗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씨앗을 자꾸 비유의 소재로 사용하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씨앗은 땅속에 묻힙니다. 그러나 곧 땅속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땅 속에 묻히지만, 곧 땅 속에서 일어나는 일 말입니다. 부활입니다. 즉, 예수는 우리에게 말씀을 심으십니다. 말씀이 심겨진 사람은, 영원하여, 죽음조차 그 사람을 막을 수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하기에," 말씀이 심겨진 그 사람은 영원하여, 반드시 부활합니다. 새로운 몸으로 죽음을 뚫고 일어섭니다. 예수와 똑같은 사건을 겪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듣는 말씀이 아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여러분을 부활하게 합니다. 그 부활은 너무도 위대한 일이라, 마치 아름드리 나무와 같이, 생명의 풍성함 그 자체, 죽음이 설 자리가 없는 완전한 몸 그 자체입니다. 어떤 사람의 파종으로 시작된 일이, 사람들의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결말을 가져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성령으로는 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제자들 아니고서야, 이 비유의 뜻을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비유 이후, 제자들이 무엇을 들었겠습니까? 여러분의 상상에 아니, 성령에 맡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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