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society


  society, 사회라는 단어는 라틴어 socius에서 왔습니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1. 친구. 동료,  
2. 무역국
3. 군사 동맹

  이 단어는 우리가 '사회'라 부르는 단어의 뜻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먼저는 친구들이 모인 것이 사회입니다. 그리고 같이 물건을 교환하며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사회입니다. 그리고 같이 싸울 수 있는 전우들의 모임이 사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 안에 살면서도, 우리의 친구도, 재화를 교환할 대상도, 같이 무언가를 위해 싸울 전우도 아닌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이번 주에 영등포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고려대학교 79학번, 동서식품 잠바를 입고 있는, 그러나 앞니가 두 개 빠져있고, 낮부터 술을 거나하게 잡순,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영등포 쪽방촌 근처를 걷던 저에게 불쑥 술냄새 풀풀 풍기는 그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뭐든지 물어봐, 내가 말해줄께" 제가 아무 말 안하고 걸으니까, "으유, 부모 등골 빼먹으면서 여기서 왜 방황하냐" 고 물었습니다. 이후 결혼은 했느냐, 왜 안했느냐, 나는 27에 장가갔다. 얘기를 줄줄 꺼냈습니다. 듣고 있다가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왜 도시는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빈곤은 사라지지 않습니까?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되요?" 아저씨가 한참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니가 배고프지 않아서 그래."

  막걸리 사달라는 아저씨를 애써 뿌리치고, 걸으면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저 아저씨는 이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society의 일원인가? 그러니까, 이런 말이죠. 
우리는 저 아저씨를 친구로 인정하는가? 
우리와 물건을 함께 써야할 사람으로 받아들이는가? 
우리는 저 아저씨와 무언가를 대항해서 함께 싸우고 있는가?

  "나는 저들의 배고픔을 알고 있는가?"

  만약 내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나는 저 아저씨를 society의 일원 아닌, 다른 무엇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답은 오래걸리지 않았습니다.
  
역겨운 냄새를 뿜어내는 그들은 내 친구가 아닙니다.
그들에게서 내가 얻을 것이 없는데 그들과 무엇을 교환하겠습니까?
그들과 손 잡고 함께 무언가와 싸운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치 똥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똥입니다.
냄새나고, 싸고 나면 다시 볼 일없는, 결코 어떤 일도 함께 할 수 없는,
그들은 똥입니다.



1. 똥들의 신

  
  그리고 우리는, 이 '똥들의 신'이라 불리우는 한 사람을 성서에서 만납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바알세불에 사로잡혔다!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똥신이라는 말입니다. 그 거룩하다는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왜 이렇게 불렀겠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마가복음 3장까지 읽어오면서 확인했던, 예수께서 하셨던 일들에 대해서 가만 생각해보면, 이 예수에게 이러한 명사가 붙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그는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병 걸린 사람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왜곡된 인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상대하기 싫은 사람들입니다.
  병들린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성전에도 들어올 수 없는 부정한 사람들입니다. 역시나 상대하기 싫은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그 중에는 세리도 있고, 무식쟁이 어부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그 위대한 예루살렘 성전에 반기를 든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역시나 상대하기 싫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다 무엇과 같습니까? 이 사람들은 사회의 똥과 같은 사람들 입니다. 이 똥들을 구해주고 다니는 저 맨 앞에 있는 사람은 그럼 누구입니까? 바알세불, 똥들의 신에 사로잡힌 사람이겠죠.
예수를 바알세불이라 부른다는 말은, 예수가 구해준 사람들은 곧 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똥들의 신에 사로잡혔다 불리우는 이 사람는, 그 사람들을 똥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가족'이라 부르고, '친구'라 부릅니다.
  또한 이 똥들의 신에 사로잡혔다 불리우는 이 사람은, 이 똥들과 함께 밥 먹는 것이 그의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우리는 3먹에서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 똥들의 신에 사로잡혔다 불리우는 이 사람은, 똥들과 함께 싸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닌, 
마치 수면 아래를 내리치는 무거운 검과 같이, 마음 깊은 곳에 놓인 끔찍한 죄를 가르는 위대한 전투를 함께 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 새로운 society를 말하고 있습니다.



2. 암덩이냐, 새로운 몸이냐



  이 새로운 society. 똥처럼 여겨지는 사람도, 친구로, 물건을 함께 쓸 사람으로, 악에 대항하는 전우로 여기는 새로운 society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회의 암덩이와 같습니다. 암이 뭐에요? 우리 몸에 기생해서, 영양분을 먹고 크다가, 결국 몸을 집어삼키는 끔찍한 병 아닙니까?
사회에 생긴 예수 일당은 암덩이와 같습니다. 이 사회에 기생해서,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결국 사회를 온통 집어삼키고 말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의 존재는 이 사회의 가치들을 모두 뒤집어 버립니다. 예컨데, 이 사회는 '열심히 일해서 일한 만큼만 먹고 사는 것'이 미덕인 사회입니다. 
그래서 노숙인들에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은, 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버린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일하지 않은 저들은 먹을 자격도 없다 말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한만큼 먹고 사는 것이 미덕이면서, 이 사회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가 일한 것보다, 혹은 일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얻고 싶어하고, 
실제로 이 사회의 높으신 분들은, 자기들의 노력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하고, 어쨋든 표면상으로 우리는, 노력한 만큼 얻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회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렇다면 어떨까요? 노가다 판에서 그 날 쓸 일용직을 구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나는 새벽 다섯시 반에 왔어요. 내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한참 뒤에, 점심도 훨씬 지난 오후 네 시쯤, 한 사람이 공사판에 나와서 나랑 같이 벽돌을 날랐습니다. 노가다는 저녁 6시면 집에 가거든요? 6시가 되어서, 그 날 일당을 받고 집에 가려고 합니다. 노가다 일당은 7만원이고, 소개비 10%를 떼면 6만 3천원이에요. 그런데 내 옆에 친구, 네시에 온 친구 봉투를 보니 어? 이 친구도 6만 3천원이에요! 그래서 혹시나 싶어, 내 봉투도 열어보니 내 봉투도 6만 3천원이에요.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바로 그 기분입니다. 이것이 '일한 만큼 얻은 것'입니까?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의 일꾼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20:10~12 
그런데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은 받고 나서,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지금 이 사회의 똥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기분이 딱 이렇습니다. 내가 똥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예수와 친구가 되었고, 예수와 함께 먹으며, 예수와 함께 진정 인간다운 삶을 얻었습니다. 아무런 댓가없이, 아무런 공로없이, 아무런 노력없이 말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자신이 똥 아니라 말하는 사람들의 기분이, 바로 이 기분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가 거슬립니다.

  기껏 자신들이 말하는 법을 다 지켜야 인간다운 것이라고 가르쳐 놨더니, 사람들은 단번에 예수를 통해서 인간다움을 얻었습니다. 
  기껏 사람들이 자기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도록 만들어놨더니, 더이상 사람들은 계급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기껏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경쟁하도록 만들어놨더니, 사람들은 경쟁이 아니라 삶의 진실한 의미를 위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죽도록 일하지 않으면 불안하게끔 만들어놨더니,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고 안식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뜬금없이 예수가 나타났고, 그 이후, 계급도 없이, 일도 없이, 생계에 대한 고민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러니, 이 어찌 예수 일당이 계급과 돈과 명예로 돌아가는 사회의 암덩이가 아니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자베르로 가득한 세상에서 장발장이란 사람은 정말로 위험인물인 것입니다. 자베르들이 살아온 삶의 가치들을 모두 붕괴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범죄로 가득한 고담시에서 배트맨의 존재는 정말로 위험인물인 것입니다. 그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예수로 인해 붕괴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병자든 노예든 귀신들린 사람이든, 예수로 인해 다 나음을 입어, 높고 낮음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어졌고,
  서로 가진 것들을 나눠 쓰기 시작하더니, 모두가 풍족하게 먹고 마시게 되었습니다.
  생계에 대해 고민은 사라지니, 이제 서로 싸울 일이 없습니다. 이제 각자 내면의 욕심과 싸우며, 너도 나도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 인생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암덩이들의 삶...어? 근데 이게 원래 인간다운 삶 아닙니까? 
원래 인간은 높고 낮음이 없고, 
미친듯이 일하지 않아야 하며, 
생계 때문에 어찌어찌 사는 문제 때문에 서로 경쟁하고 싸우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삶의 의미를 쫓아, 진실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인간다운 사람 아닙니까?

  아, 그렇다면, 이 예수와 똥덩이들은 이 사회의 암덩어리가 아니군요. 이렇게 부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회의 새로운 몸입니다!
암덩이인줄 알았더니, 이 암덩이는 몸 전체를 새롭게하는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럼 예수의 정신이 이 땅을 집어 삼키는 것을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원하고 그것을 기도해야겠군요! 그리고 나 역시 참여해야겠군요!



3. 성령 모독죄


  그런데 이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로 인해 인간다운 삶이 사회 속에서 점점 커져가는데, 이것이 고까운 사람이 있습니다. 사회의 새로운 몸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보다, 자신이 더 바라는 게 있다는 소리겠죠. 오늘 우리의 이야기에서는 율법학자로 대변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요? 자신의 권위? 돈? 자신의 명예? 직업?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놓아버리고, 예수를 붙잡으면, 자신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텐데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건, 인간답지 않은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말씀하셨다.
"고발자가 어떻게 고발자를 쫓아낼 수 있느냐? 
나라가 둘로 쪼개지면 지속되지 못한다. 
가정이 둘로 쪼개지면 지속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고발자도 스스로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둘로 쪼개지면 지속되지 못한다. 
그의 때는 끝난다! 하지만 기억하라.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산을 훔치려면 먼저 힘센 자를 묶어야 한다. 
그래야 그 집을 약탈할 수 있다.

  지금 예수는 이 세계의 힘센 자를 자신이 묶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그 집에서 재산들을 약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권위? 돈? 인간의 명예? 생계? 이 세계를 지배하던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로 인해 그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는 마치 모세를 통해 이집트의 우상들이 그저 피조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님을 밝히시는 하나님과 같이, 이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 사실 보잘 것 없는 것임을 밝히시고, 진짜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를 시작으로, "이 세상 지배자의 때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 지배자의 세계에서 약탈이 시작됩니다. 이 세계에서 악한 권위가 붙잡고 있었던, 돈이 붙잡고 있었던, 명예가 붙잡고 있었던, 생계에 대한 걱정이 붙잡고 있었던, 이 세계의 진짜 보물들을 마침내 우리가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똥입니다. 이 사회가 똥이라 말했던 그것.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그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물입니다. 
고려대학교 79학번, 동서식품 잠바를 입고 있는, 그러나 앞니가 두 개 빠져있고, 낮부터 술을 거나하게 잡순, 아저씨가, 이 사회의 똥이 아니라, 사실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그 아저씨의 인간다운 삶으로의 회복"! 이것보다 귀한 보물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보다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회 속에서 똥처럼 여겼던 사람들 안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그 사람들과 친구하고, 함께 먹고, 함께 사랑하는 삶을 살며, 함께 악과 싸우는 것. 
이것이 예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보물인 것입니다.

누가복음12:33,34 
너희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이나 좀의 피해가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NIV 성서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Sell your possessions and give to the poor" 이것은 가난한 자가 뭔가 일을 했기 때문에 댓가로 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냥 주는거에요. 
왜? 우리는 이렇게 사회를 개혁하는 사회의 암덩이, 아니, 새로운 몸들이기 때문입니다! 공로가 아닌 거저로, 매매가 아닌 은혜로, 
우리는 그렇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그토록 바라 마다하지 않는, 크리스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사회에 숨겨놓은 귀한 보물들을 찾아내는 인디아나 존스들인 것입니다.
  
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모든 죄와 온갖 신성모독은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죄를 지은 것이다."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그들의 주장에 에수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뒤에 무서운 말씀이 있는데, 용서받지 못할 죄가 등장합니다. 온갖 신성모독 조차도 용서를 받을텐데,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성서는 기록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죄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어떠한 죄일까요?

  이 예수로 시작된 이 거대한 움직임, 즉, 사회에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나고, 그것을 통해서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이 새롭게 삶의 소망을 얻는 이 일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신선한 바람이요, 두번째 출애굽이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를 쓰자면, 바로 구원입니다. 성령으로 인해 벌어지는 하나님의 구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다움이 새롭게 회복됩니다. 즉, 한 사람이 회복되는 것, 한 사람이 인간답게 살게 되는 것.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고깝게 여기고 가로 막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 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간다움보다, 내가 가진 무언가를 더 바라기에, 그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구출을 바라지 않기에, 정작 자신도 구출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은 마치 안쪽에서 잠긴 문과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바꿔, 스스로 열고 예수를 만나면 되지만, 그는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꺼내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됨을 바라지 않는 이에게, 그리스도 사랑의 댓가는 무가치합니다. 구해준다한들, 나를 왜 방에서 꺼냈느냐며 화를 낼 것입니다.
이기적이 되기로 결심한 자는, 무엇을 해줘도 불만으로 가득차있을 것이고, 그의 손에는, 사람의 생명보다 귀하다고 착각하는 무언가가 썩은내를 풍기며 쥐어져있을 것입니다.


4. The New Society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society. 
친구, 무역국, 전쟁 동맹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society는 가난한 사람도 포함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society는 병들고 귀신들렸던 자들도 포함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society는 이 사회의 똥처럼 여겨지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보물이라고 말합니다.
더러운 가치들은 예수로 인해 묶였고, 이제 우리는 그 보물을 차지할 일만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되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쪽이 절박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친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악에 대해서 처절하게 경험해본 친구가 필요하고, 절망에서 회복을 경험한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우리를 역으로 구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과 우리가 가진 것들을 나눠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는 무역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그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싸워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사회 안에 있는 편견과 거짓과 빈곤을 몰아내는 일에 함께 해야 합니다.
이 일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예수로부터. 

  그렇습니다. 이 예수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사회.
그것은, 모든 사람을 우리의 society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사람들과 우리의 가진 것을 나누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일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새로운 사회의 몸이, 이 낡은 사회 위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이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몸이 되는 것입니다.

  불가능하다고요? 두고보면 알 일입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2장 27절의 이해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1) "너희의 아들들"은 바리새인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도 출애굽을 기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출애굽은 귀신을 못쫓아냅니다. 즉, 진짜 악 앞에서 무력한 출애굽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는, "니네는 악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느냐?", "무엇이 악이라 생각하느냐?"


2) 재판관이란 말은 "그들로 인해 너희의 옳고 그름이 드러날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인자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인자가 어떤 메시아냐에 따라, 그들이 옳은지 그른지가 드러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악이라 보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들의 옳고 그름이 드러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을까요? 

즉,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이 믿던 출애굽을 끝까지 추구했다가 그들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난 사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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