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받침대 위에 세운 등불(4:21~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에 등불을 가져와서 양동이 밑이나 침대 밑에 놓는 사람이 있느냐? 당연히 그러지 않는다! 등불은 등 받침대 위에 놓는다. 숨겨둔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듣는 말에 주의해라. 너희가 사용하는 척도가 너희에게 적용될 것이고, 그보다 더 주어질 것이다. 어느 정도 가진 사람은 더 받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0. 동화같은 이야기
앞에 보이는 그래프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세상 모든 이야기의 그래프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이 그래프대로 그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우리 일전에 살펴봤었던 아이언맨을 다시 떠올려봅시다. 아이언맨이 있습니다. 그가 만다린을 도발합니다. 점점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자신의 집이 박살나고, 아이언맨은 물속에 수장될 최대 위기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는 구출되고, 적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위용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도 똑같은 내용입니다. 배트맨이 고담시에 있습니다. 그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결국 그는 베인에게 허리가 부러져 재기불능의 나락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는 수련을 통해 부상을 극복하고, 다시 적들 앞에 나타나는 반전을 가져옵니다.
전래동화인 햇님과 달님도 그렇습니다. 오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들의 최대 위기는, 나무위에 도망갔을 때였습니다. 어린이 동화치고는 섬뜩하게, 호랑이가 도끼로 나무를 찍으며 아이들을 잡아먹으려고 올라옵니다. 그 때, 반전이 벌어집니다. 동아줄이 내려오고, 햇님 달님은 하늘로, 그리고 호랑이는 땅에 떨어져 피범벅이 되는, 역시나 아이들 동화치고는 섬뜩한 결말로 마무리 됩니다.
이건 영화나 전래동화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스포츠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야구 경기를 보면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점수를 계속 상대팀에게 내줍니다. 내주고 내주고 내주다. 스코어는 6-9! 거기다 9회말 투아웃, 이 위기 속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건 뭐다? 만루홈런의 반전 아닙니까.
이 그래프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이야기.
그런데 어른들의 이야기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위기까지는 똑같이 흘러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에는 반전이 없습니다. '아,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돈이 없어서 큰 일이네.' '우린 안될거야.' 이 현실을 뛰어넘는 최후의 한 점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징은, 이걸 애들한테 들려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 호랑이가 오누이를 추격해서 나무 아래까지 왔는데, 그 나무를 도끼로 찍고 철컥철컥 올라오더니, 아이들의 팔다리를 하나씩 뜯어먹고, 아이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더라. 아니면,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그렇게 자다가 뇌사상태에 빠졌더라. 이런 것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없는 잔혹한 이야기를, 우리는 어쩌면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전 있는 이야기, 아이들에게, 그리고 어른들에게, 남녀노소 할 것없이 모두에게, 진정한 꿈과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이야기에는 모두 이 반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들 중에 하나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등불 이야기였습니다.
1. 다윗의 등불 이야기
-등불 탄생
등불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등불은,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7:20,21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다가 등불을 켜게 하되, 그 등불은 늘 켜 두어라.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것을 회막 안의 증거궤 앞에 쳐놓은 휘장 밖에 켜 두어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서 꺼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그리고 그 등불은 곧 '하나님의 등불'이라 불렸습니다.
사무엘상 3:3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른 새벽,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환하게 밝혀져 있을 때에,
-'다윗의 등불'
그런데 한 사람의 등장이후, 그 등불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21:17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즉, 다윗입니다. 이 다윗은, 이스라엘의 등불로 여겨졌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렇게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사무엘하 22: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하나님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1:36
한 지파는 솔로몬의 아들에게 주어서 다스리게 할 것이다. 그러면 그가, 내 이름을 기리도록 내가 선택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다스릴 것이고, 내 종 다윗에게 준 불씨가 꺼지지 않을 것이다.
역대하 21:7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
이스라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등불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그 불씨를 다윗에게 주었으며,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항상 그 등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정작 다윗 자신은, 하나님이 나의 등불이라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떨까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그 기름으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 다윗, 그 다윗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등불이었습니다. 더불어 이 등불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사, 등불은 단 한 차례도 꺼지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운명도 그렇게 밝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바람 앞의 등불
그러나 다윗이 죽고나서 이 등불은 곧장 위기를 맞습니다. 마치 바람 앞의 등불 마냥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등불을 꺼뜨린 바람의 정체를 확인해봅시다.
역대하 29:7
그뿐만 아니라, 성전으로 드나드는 현관 앞 문들을 닫아 걸고, 등불도 끄고, 분향도 하지 않고, 성소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도 않았소.
여기에는 그저 '등불도 끄고' 라고만 쓰여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인지 우리는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꺼지지 말아야 할 이스라엘의 운명이, 누군가에 의해 꺼지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자신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있었고, 이것은 자신들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나타내는 다윗의 등불 앞에서 바람을 부는 격이었습니다.
이후부터, 성경 역시, 점점 이 등불의 꺼짐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욥기 18:6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욥기 21:17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나 그들을 곤고케 하심이나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나 그들을 곤고케 하심이나
그런데 그 와중에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윗이 부른 노래들이 남아 있긴 했습니다. 그 다윗이 부른 노래는, 현실과 다른 내용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시편 18:28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잠언 24: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그리고 예레미야에 와서는, 즉, 바벨론에 와서는 등불의 빛이 끊어진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예언됩니다.
예레미야 25:10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소리와 등불 빛이 끊쳐지게 하리니
그리고는 정말, 그 등불이 꺼졌습니다. B.C. 587년 성전은 모두 돌덩이가 되어 무너졌고, 이스라엘의 등불은 꺼졌습니다. 민족의 운명을 상징하던 등불은 이제 키고 싶어도 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다윗의 등불은, 이제 촛대까지 뽑혀 다시는 빛을 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쓰러지던 그 날 밤 고려의 정신이 끝장났던 것과 같이, 다윗의 등불이 꺼졌을 때, 이스라엘의 운명도 끝장났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등불 이야기, 다윗의 등불 이야기입니다.
2. 예수, 이야기의 새로운 반전.
만약, 이 다윗의 등불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난다면, 이 이야기는 어른들의 이야기와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반전없는 이야기, 절망뿐인 이야기, 현실에서 답을 찾지 못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런 얘기 배워서 뭐합니까? 우리에게 아무런 소망도 줄 수 없다면.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이 이야기의 충격적인 반전을 확인하게 됩니다.
등 받침대 위에 세운 등불(4:21~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에 등불을 가져와서 양동이 밑이나 침대 밑에 놓는 사람이 있느냐? 당연히 그러지 않는다! 등불은 등 받침대 위에 놓는다. 숨겨둔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듣는 말에 주의해라. 너희가 사용하는 척도가 너희에게 적용될 것이고, 그보다 더 주어질 것이다. 어느 정도 가진 사람은 더 받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이 사람들이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지금도, 성전에는 등불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가 허락해줘서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등불이었고, 그 등불이 켜있다한들, 이스라엘이 바라는 진짜 다윗의 등불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등불이 타고 있는 성전은, 에돔 사람인 헤롯, 로마의 하수인인 헤롯이 리모델링하는 성전 안의 등불이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 다윗의 등불이 아니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항상 등불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를 말입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악을 밟고 선 채, 새 시대의 소식, 영생의 씨앗을 말했던 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에 등불을 가져와서 양동이 밑이나 침대 밑에 놓는 사람이 있느냐? 당연히 그러지 않는다! 등불은 등 받침대 위에 놓는다. 숨겨둔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등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타올랐습니다. 그것도, 그 등불이 일곱 촛대위에 올라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방 안을 환히 밝힙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왕의 귀환. 정확히는 다윗 왕의 귀환입니다. 아니 다윗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다윗보다 더 큰 이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 등불이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의 반전, 세계 역사의 반전, 모든 이들에게 찾아온 새로운 운명이었습니다.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인생에 절망했던 사람들에게, 그는 완벽한 반전으로서 나타났습니다. 꺼저버린 등불 앞에서 절망했던 이들에게, 등불은 스스로 걸어왔습니다.
"등불이 등 받침대 위에 올라왔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다윗의 등불은, 한 사람의 모습 속에서 영원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인간과 세계가 새롭게 되는 그 비밀스러운 시작이,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역사의 반전. 바로 예수이십니다.
함석헌 선생은, 이익에 눈이 먼 민족은 이상을 잃어버린 민족이라 하였습니다. 이 이상은 별빛과 같아서, 손에 잡히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바라보고 따라가면 그 별빛은 길을 알려준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함석헌의 표현대로 하자면, 예수는 우리의 손에 떨어진 별빛입니다. 잡힐 수 없을 것 같았던 희망이,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상이 우리에게 스스로 찾아왔습니다. 이 동화같은 이야기가, 우리에게 실제로 벌어진 것입니다.
3. 이것은 역사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들려드린 이야기는, 누가 지어낸 이야기도 아니고,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있었던 이야기요, 역사입니다.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이야기는 대부분 스토리가 비슷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발단을 지나 전개를 거쳐 위기와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전혀 이전에 예상하지 못한 반전의 결말이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전래동화, 배트맨, 아이언맨,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이러한 반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야기가 갖는 차별성은 어떠한 것입니까? 이 반전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모든 영화나 전래동화들은 분명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야기는 꾸며낸 결말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이 땅을 걸으셨고, 역사의 반전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결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나을 정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결말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은, 예수의 이야기에 빚져있습니다. 모두 복음의 그림자들입니다.
다윗의 등불로 오신, 그 예수께서 자신이 바로 그 등불임을 밝히시고, 그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는 말에 주의해라. 너희가 사용하는 척도가 너희에게 적용될 것이고, 그보다 더 주어질 것이다. 어느 정도 가진 사람은 더 받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만약, 그 분이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정말로 반전으로 오셨다면,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세심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 분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는 말에 주의하라! 너희가 사용하는 척도가 너희에게 적용될 것이고, 그보다 더 주어질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예수께서 '너희가 듣는 말'이라 말씀하신 것은, 바로 역사의 반전으로 오신 그 분의 말씀입니다. 새 시대의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듣고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왜 복음의 소식, 기쁜 소식을 듣고 우리가 이것을 주의해야 한단 말입니까?
왜냐하면, 그것으로 우리가 평가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의 평가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도덕불감증입니다. 안하무인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악을 밟으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인류의 등불이십니다. 다시 찾아온 역사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도, 그 말씀을 진실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분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 분이 악을 밟으셨다는 것도, 그가 온 세상을 밝히는 역사의 등불이라는 것도, 그가 이 시궁창같은 현실 속에서 반전을 이루셨다는 것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에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말 그 분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라 믿는다면, 주의해서 그 분의 말을 세심하게 들여다 봐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 속에, 분명 당신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과 해결들을, 그 분은 분명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은 당신의 문제해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그 분의 말씀을 주의하여 깊게 연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학생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사람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이 역사의 반전이며, 새 시대의 소식임을 믿는다 말하면서도, 그 분의 말씀을 이해하려 애쓰고, 그 분의 말씀을 세심하고 깊게 들여다 보는 사람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그저 좋은 얘기, 좋은 결론, 나에게 익숙한 얘기라 생각하지만, 그는 말씀을 주의하여 들여다보지 않기에, 그 안에서 정작, 실제로 벌어진 역사의 반전을 만날 수 없고, 따라서 자기 자신의 삶의 역사 속에서도 반전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글자가 살아서,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온 적이 있습니까? 말씀은 생명이라는데, 이것이 정말 내가 붙잡아야 할 진리라는 사실을 절절히 알게된 적이 있습니까?
아쉬운 일입니다.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것은 너무나 기대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그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려는 사람은, 그 안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한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저 구절은 곧 이러한 의미입니다. 그 뜻을 찾으려는 자는 정말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며, 가진 것 마저 빼앗기에 될 것입니다. 역사의 등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축복이자 저주입니다. 그 말씀을 진지하게 받고, 움직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갈라놓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절대적인 선에 반대되는 것은, 악이 아니라, 어설픈 선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너희도 그 분 앞에서 완전하라"는 부름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어설프게 착한 척 하면서, 우리가 그 분 앞에서 아무런 문제 없는 것처럼 살 수 없습니다. 그 분 앞에서 완전하십시오! 이 완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숙고하고 들여다 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제가 팁을 드립니다. 말씀을 필기부터 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일주일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해보십시오. 그럼 말씀의 새로운 차원이 열릴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등불이신 그 분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비추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바로 그 사람, 등불이신 예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비추는데 전심전력하는 사람에게, 예수의 목소리는 결코 속삭임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가슴을 고동치게하고, 하늘 높이 솟은 불길처럼 그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 그 분의 심정이 절절하게 들리게 될 것입니다. 들여다 보면 볼수록, 그 분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무릎꿇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깊게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깊게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있는 성경의 글자들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실지, 그 누구도 제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무한한 의미의 세계로 초대하십니다. 그 분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어찌 우리가 그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들은 바에 대해, 삼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움직이든지, 그 자리에 있든지. 이 등불의 의미가 당신의 삶 구석구석을 비추던지, 아니면 그저 흑암에 놓여있던지, 놀라우신 하나님은 이 선택을 당신에게 맡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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