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길을 내신 이'다.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의 오시는 길을 마련했고, 그 이후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가신다. 즉 '기름 부음 받은 이'가 '내시는 기름 바른 길'이다. '올'이 바른 길이다. '그리스도'의 '기름길'이다.
그렇다면 기름 부음받으신 이가 내시는 기름 바른 길은 어떠한 길일까? 그 길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끊음, 숨트임, 말, 먹음, 먹힘, 살아남.' 요약하면 '숨아들'이다.
[1]
탯줄 끊어지고, 잠깐 숨 쉴 수 없었네.
울음과 함께 숨 터지니 곧 하나님의 숨아들, 그리스도라.
시작은 '끊음'다.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앞서 끊어 내셨다. 무엇을 끊어내셨나? 사탄이다. 곧 허튼 생각이다. 허튼 생각을 끊는 것부터가 기름 바른 길의 시작이다.
그럼 무엇이 허튼 생각이란 말인가? 먼저는 먹고 사는 문제요, 이 먹고 사는 문제로 대중의 인기를 얻음이다. 물론 먹고 사는 일은 늘 중요한 문제요, 해결되어야 할 문제지만, 이것은 예수님 가시는 길의 궁극적인 목적(텔로스)가 아니다. 먹고 사는 문제 자체를 해결하기 위해선 더 깊은 차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우선은 끊어야 한다.
둘은 높은 자들로부터 받는 인정과 친분이다. 곧 권력이다. 예수께서 가시는 길은 권세자들과 손잡고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다. 대중에게 인정받는 것도 아니요, 권세자들에게 인정받음도 아니다. 그래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잠도 아니고,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잠도 아니다. 피라미드에 정점에서 아랫것들을 굽어보며 이루는 변화가 아닌 것이다.
셋은 폭력의 철저한 거부이다. 폭력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을 통째로 얻는다해도, 그리스도의 기름 바른 길은 걸을 수도, 이룰 수도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죽이고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참일리 없으며, 누군가를 죽이면서 걷는 길의 끝에는 나도 죽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로부터 끊어라. 줄이면 생존과 남들로부터의 인정과 폭력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끊어내면 우리는 죽을 것 같다. 그러나 진리는 이것을 끊으라 말한다. 생존의 문제와 상관없이 살 수 있는가? 남들의 푸대접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어떠한 폭력에도 비폭력으로 대할 수 있는가? 정녕 진리의 길은 우리를 죽이는 길인가?
그렇다. 죽이는 길이다. 허나 아주 죽이는 길이 아니다. 아주 잠시간 죽는다. 앞에서 말했던 생존과 남들로부터의 인정과 폭력은 우리의 목숨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 세 가지로 바벨을 쌓아올렸다. 하루라도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남들의 인정이 곧 돈이 되며, 다른 나라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위에 '선진국'이 세워졌다. 그런데 이 목숨줄은 마치 탯줄과도 같다. 영원히 붙어 있을 수 없으니 우선 우리의 생각에서부터 끊어버리자는 것이다. 예수는 사탄에게서 시험받는 40일간 이 탯줄을 말씀의 칼로 뭉텅 끊어버리셨다. 사탄은 그 길로 떠났다.
탯줄을 끊으면 아기가 죽는가? 죽는다. 탯줄을 끊어 최초로 폐를 열어 숨을 쉬기까지 아기는 죽어있다. 그러나 간호사가 숨없는 아이의 엉덩이를 때려주면, 아이는 비로소 폐를 열어 생애 최초로 숨을 받아들인다. 울음과 함께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폐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더이상 탯줄로부터가 아니라, 폐로 숨쉬고, 위장으로 먹는, 진짜 사람이 된다.
세례는 그러한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탯줄을 고집하던 옛사람은 이제 물로부터 나와 성령숨 쉬는 사람으로 거듭난다.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든, 거듭남이다. 예수는 인간 대표.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이 길을 걸어야 한다. 거듭나야 한다. 그 길의 초입은 끊음과 숨쉼이다. 하나님 앞에 아기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성령숨쉬는 숨 아들로서. '그리스도'는 그러한 사람이다.
[2]
숨에 말 붙이니,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가 말숨이요,
먹음에 너와 내가 없으니, 가는 곳곳마다 한 몸이요,
먹힘으로 폭력에 맞서니, 힘으로는 당할 자가 없어라.
사탄에게 시험받으심은 '탯줄 끊음'이요, 세례 받으심은 '숨통 트임'이다. 그럼 이제 아기는 말하기 시작한다. 숨에 말을 붙여 의미를 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끊어지고 트인 이후에는 '말'이다.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말은 통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함께 있는 너와 나는 숨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숨따라 말하면 너와 나는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숨과 무관하게 말하면, 그 말은 숨 막히는 말이다. 통하지 않는 말이다.
끊어, 숨쉬는 예수의 말은 말이 아니라 말숨이다. 그래서 통한다. 그의 말은 숨을 싣고서, 숨 쉬지 않는 이에게 진리를 전하는 인공호흡이다. 그저 이 말이 맞는지 아닌지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말로서 숨을 전하잠이다. 대중 앞에서 말씀하실 때만 그러하지 않았다. 그 분의 모든 일상의 말이 말숨이다. 숨쉬는 이는 능히 그러하다. 한 맥으로 뚫리는 말하기, 진리와 무관한 말을 뱉지 않으신다.
또한 숨으로 모든 사람 통함을 아시니, 먹는데도 너와 내가 없다. 먹는데 너와 내가 있는 사람은 꼭 싸운다. 먹고 살기 위해 타인을 죽여, 나만 먹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의 먹음에는 너와 내가 없다. 세리도 좋고, 이방 사람도 좋고, 어린아이도 좋고, 심지어 바리새인도 좋다. 모두와 함께 먹는다. 그렇게 함께 먹으면 한 몸이다. 한 몸은 따로 먹지 않는다. 한 입으로 먹고, 그 입으로 먹은 것을 모든 지체가 공유하며 힘을 얻는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먹으면 예수와 한 몸이다. 한 숨 쉬고 함께 먹는 한 몸. 곧 그의 몸이요, 공동체다.
그가 모두와 통하게 말하고, 모두와 함께 먹으니, 불통함으로 권력삼고, 따로 먹음으로 위세높이던 이들이 뿔이 났다. 그들이 애써 세운 너와 나, 따로따로, 끼리끼리가 깨지게 생겼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해하려하고, 그를 없애려고 한다. 그들이 유지하던 구분을 신의 이름으로 지키려했다. 유대인과 이방인, 깨끗한 자와 더러운 자. 그러나 예수는 그들에게 먹혀주신다. 곧 십자가다. 예수는 왜 당해주셨는가? 왜 그들의 먹이가 되어 주셨는가? 왜 그들의 폭력에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셨는가? 그는 끝내 먹히셨다.
그러나 결국엔 누가 이겼는가?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가 죽고 모든 것이 끝났다면 예수의 승리는 껍데기밖에 없는 승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활했을 때, 폭력과 죽음은 패배했다. 너와 나를 편 나누지 않고, 원수를 위해서 먹힐 수 있는 그 분이 옳았다. 그 분이 이겼다. 그 분은 폭력보다, 죽음보다 강하셨다. 폭력을 이기시는 왕. 곧 사랑의 왕이요, 모든 것을 이기는 왕이시다. 예수를 통해서 사랑이 분명히 확실히 이긴다는 사실을 보라. 그 사랑이 몸을 다시 살게함을 보라.
이게 모든 글이 나타내는 진리요, 사람으로서 걸어야 할 길이요, 그리스도 걸으시는 기름 바른 길, 올바른 길이다. 숨통 트여 말하고 먹고 먹히며 살아나는 길이다.
[3]
숨 쉬니 알아, 숨쉬니 살아,
죽음도 덮을 수 없는 사람이어라, 사랑이어라.
아들은 믿었네, 무덤이 제 집 아님을,
뜻 드러내는데, 제 몸 아낄 이유 없음을.
숨쉬면 하나님을 안다. 그 숨결이 어디로부터 오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 숨이 나를 살게 함을 분명히 느낀다.
숨쉬면 하나님을 산다. 그 숨결이 죽음을 이기기에, 죽음을 깨뜨리는 날마다를 산다.
그렇게 숨아들은 죽지 않는다. 숨아들이 진리를 말하고, 모두와 함께 먹다가, 폭력에 먹혔는데, 그 아버지가 가만히 계실리 없지 않은가. 그 아들을 생각하시어 다시 살리셨으니 곧 '부활'이다. 아들은 죽기 전에도 죽음 이기는 자로 살았고, 죽어서도 죽음 이겼다. 정녕 그 믿음대로 되었다. 그래서 숨 쉬는 사람은 생존과 남들의 인정과 폭력 위에 있다. 하늘을 산다. 짓밟혀도 이기는 힘은 숨에 있다. 숨쉬면 살고, 죽어도 산다. 곧 하나님의 숨결로 산다함은 참 사람이요, 곧 사랑하는 사람이다.
숨아들은 이것을 분명히 믿었다. 무덤이 자신을 가둘 수 없음을. 그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 내가 살아날 것이다. 내가 살아날 것이다. 내가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는 정말 살아나셨다. 사람들은 숨이 어디있느냐 했지만, 그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심으로 정말 숨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리고 이 숨아들의 죽음과 사심을 통해 너희도 숨쉬고 살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도 이 뜻따라 길걸으라 하신다. 이 뜻드러내는데 숨아들은 몸 아낄 이유가 없었듯, 우리의 몸도 제물로 원하신다. 몸은 제물로 드려졌고, 하나님은 그 몸에 다시 숨결을 부어주셨고, 우리에게도 그리하실 것이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의 숨결로 산 영이 되었듯이, 예수께서 쉬셨던 그 숨으로 우리는 살리는 영으로 거듭난다.
끊고, 숨쉬어, 말하고, 함께 먹고, 대신 먹히는 이, 곧 사랑하는 이다. 그러한 사람을 아버지가 보고 기뻐하신다. 득남의 기쁨이다. 나와 당신이 하나님이 하나님 면전에서 그 분의 기쁨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