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과 골로새서 1:26~29

from 창고 2014. 8. 13. 12:22


  요즘 군대에서 벌어진 자살문제로 온 나라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금쪽같은 자식을 보내놨더니 거기서 구타당하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다가, 끝내 송장으로 돌아왔으니 이런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지하철에서도, 음식점엘 가도 커피숖엘 가도 이걸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기독인은 훨씬 더 많아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디나 매번 있습니다. 그럼 뭔가 동질의식을 느끼지요. 이 자살 문제 대해 성경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정말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살'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우리 기독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개인의 내성이 약해서"라고 말해선 안됩니다. 못쓰는 말입니다. 제가 이번 주에만 이 소리를 두 번이나 기독인의 입에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 사람이 내성이 약해서 자살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은 참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폭력과 따돌림에 견디지 못하는 내성은 '약한 내성'이 아니라, '아픈 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파서 목숨을 버린 사람을 우리는 나약해서 목숨을 버린 것이라 말하면 그 사람을 한 번 더 죽이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해줄 수 있습니까? 유족들을 생각한다면, 자살한 그 아이가 속이 약해서 자살했다고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유족들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자살을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살은 분명히 '죄'입니다. 다만 자살의 원인을 온통 개인에게만 돌려서는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자살율이 1위입니다. 인구대비 가장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자살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내성이 약하기 때문입니까? 사람들이 자기 목숨 끊는 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토록 대한민국의 자살율이 높은데에 대해서 개인 한 사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바로 이점,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해서도 안됩니다. "옛날에는 안그랬는데, 요즘 사람들은..." 왜냐하면 이 문제 앞에 옛날 사람, 요즘 사람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성 세대인 '우리'는 잘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못한다 소리 밖에 안됩니다. 이렇게 나이 가지고 편 나눠서는 하나될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군대에서 더 심한 구타가 있었는데도 자살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어느 어른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 있던 구타가 내려오고 내려와서 오늘날에 이르러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폭력을 근절한 것이 자랑이 되어야지, 폭력을 견딘게 자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요즘 세대 차이가 심하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세대 차이가 심한 것은 요즘 사회가 급변하기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옛날 사람', '요즘 사람' 갈라서 생각하는 그 사고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어른들이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젊은 애들은 뭘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으니 답답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자살이라는 문제 앞에서 생각하보면, 옛날 사람 젊은 사람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잘하고 못하고가 아닙니다. 함께 생각하고 해결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생각해보면,어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누군가에게 원인과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쟤 때문이에요!" 입니다. 언제부터 입니까? 아담과 하와 때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아담은 하와 때문이라하고, 하와는 뱀 때문이라 합니다. 가인은 아벨 때문이라 합니다. 기성세대는 젊은 애들이 문제라 하고, 젊은 사람들은 옛날에 다 잘못해놔서 그런 것이라 합니다. 이렇게 누구 책임이냐를 따져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책임이 아니라, 앞으로 어찌할 것이냐를 논해야 합니다. 필히 서로 쌍심지 켰던 눈썹을 풀고, 서로를 용납하며 함께 대화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누가 위고 아래고,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가 아니라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자살 문제를 가지고 "천국가느냐, 지옥가느냐" 말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자살 때문에 지옥간다는 말을 명시해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이에 자살은 가장 큰 죄고, 지옥간다는 생각이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이 생각은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온 것입니다. "자살은 회개하지 못하는 죄이기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로마 교회에서는 구원을 위해서는 회개, 즉 사제를 통한 고해성사가 필수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죽어버려서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는 자살은 대책없는 죄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회개를 하냐, 하지 않냐의 눈으로 보이는 인간적인 기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장로교를 세운 칼빈은 카톨릭에 의해 자살이 '대죄'로 여겨지던 시절이었음에도, 자살이 지옥간다는 말을 교회에 분명히 못박아두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억울해서 자살한 이가 천국갈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기 삶에 대한 애착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했습니다. 본인은 자신의 삶이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의 생각처럼 삶이 잘 꾸려지지 않으니까, 잘 꾸려지지 않을바에야 죽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이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럴수 있는 소망이 다 끊어져 절망하게 되니 삶도 버리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회가 자살율이 가장 높은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절망한 사람들이 우리 도처에 있을 것입니다. 잘 살고 싶은데, 잘 살 수 없다고 생각해서 이 오점 투성이의 인생 버리겠다고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면 안되는 세 가지. "그 사람이 약해서 그래", "옛날에는 안그랬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래", "그 사람 지옥가겠네" 이렇게 말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겠습니까? 소망을 말해야지요!


[1]

지금 나는 여러분을 위해 겪는 어려운 일들 속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인 그의 몸을 위하여 내 몸에 채우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집안일에 따라 내게 교회의 일꾼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 위에 넘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의 삶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온통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어려움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풍랑을 겪고, 감옥에 갖히고,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돌팔매를 당하고.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자기가 겪은 이러한 어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았으면 좋겠는데, 우리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가 무슨 말입니까? 어떤 번역본에서는 "'그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만큼 힘겨운 일"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 모두가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자살하는 사람들, 삶에 절망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살 소망 끊어짐이 바울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어려움을 만난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상황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왜 입니까?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절망을 이길 힘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에 견딜 수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어려움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소망으로 가는 길에 놓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뚫어야 하고, 마땅히 지나가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소망은 무엇입니까? 일단 바울 말로는 '여러분'입니다. 바울이 살아가는 소망은 바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들 위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 기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아시아의 그 환난 속에서도 버티고 견뎌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한 고난이 다 하나님의 뜻이다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네 부모님 같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모진 풍파 다 겪으시고, 그럼에도 자식들 재롱 하나에 미소지으시고, 자식을 위해서 모진 세월 겪은 것이, 나의 보람이다 말하는 어버이의 얼굴이 바울의 얼굴이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다만 바울이 말하는 '여러분'은 친자식이 아니었다는데 핵심이 있습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교회'입니다. 나의 혈육은 아니지만 나의 가족입니다. 혈육보다 더한 그리스도 보혈로 연결된 하나님의 새 가족입니다. 이 가족이 교회요, 바울의 '여러분'입니다. 바울이 어려움을 겪더라도 이겨내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로는 부족합니다.


[2]

시대와 세대로부터 감춰져있던 비밀이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민족들 가운데 드러남의 비밀이 

풍성하게 드러났음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이 비밀은 그리스도요, 여러분 안에 (마침내) 드러난 소망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와 세개로부터 감춰져있던 비밀이 그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들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모든 민족의 희망이 되게 하십니다. 그 희망은 그리스도요, 이 그리스도의 몸이 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소망의 정체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되는 것. 


  서로 찢어져 있던 지체를 봉합수술해서 다시 한 몸으로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일을 소망하기 때문에 수술이라는 고난을 겪어냅니다. 그리고 한 몸으로 이 땅에 일어나 함께 먹고 함께 숨쉬는 그리스도로서 우리가 살기를 바라고 또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고난을 달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자살에 대한 접근은, 자살을 못하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자살을 안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살을 안하게 하려면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삶의 풍파 속에서도, 심지어 죽음이 눈 앞에서 넘실거릴 때도, 결코 끊어놓을 수 없는 단단한 삼겹줄로 삶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절망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 소망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성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성도들의삶 속에서 그리스도가 풍성히 드러나는 것이 너무도 보고 싶은 바울의 소망이자, 또한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고야 말리라 하기 때문에 넘어져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더 끈끈해지고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을 기대하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를 이 땅에 드러냅니다. 세상에 드러난 이 그리스도의 몸을 보고 절망한 사람들이 희망을 얻습니다. 그들은 절망한 사람들을 정죄하지도, 편나누지도, 저주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 새희망을 보여주는 일만이 그들의 일입니다.


[3]

우리가 그를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권하며,

각 사람을 모든 지혜 속에서 가르치는 것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나도 힘써 일하고 있습니다.

그의 힘내시는 힘을 따라 내 속에서, 그 힘으로.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인 '우리가' 열심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를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권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이어 한 몸 되게 하시고, 함께 먹게 하시고, 한 숨결로 살게 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 말입니다. 그를 공동체 전체가 알리고 권합니다. 


  알리고 권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모든 지혜를 가지고 그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자살방지 대책, 절망하는 자들에 대한 대책입니다. 절망할 수 없게 하는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고, 소망을 단단히 붙잡을 사람으로 세워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리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일을 우리의 힘으로만 한다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요, 성취가 요원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힘을 낸다". 그런데 그 힘은 내 힘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힘을 내시는 그 힘을 따라서 나도 힘을 냅니다. 그런데 그 힘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 힘은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힘이 그의 힘이요, 그 힘이 바울 안에 있었듯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금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권합시다. 그리고 가르칩시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온전한 자로 세워,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비밀의 소망이 풍성하게 드러나도록 합시다. 이것 하기 위해서 우리 속에 계신 힘을 의지합시다. 그럼 할 수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이 절망의 땅이 다시금 소망으로 역전되는 것 보기를 갈망합시다. 이것 위해서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증인들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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