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아래아다. 아래아는 태초의 소리, 태양보다 먼저 있던 소리. "빛이 있으라." 그렇담 그 빛은 대체 어떤 빛이었을까. 나중에 생긴 태양은 거짓 빛이 되었다. 태양 아래서 뵈이는 것은 거죽뿐이요, 속을 보이지 못한다. 속을 드러내지 않는 거죽은 삶의 진실을 속인다. 예수가 금요일 오전 아홉시에서 오후 세시까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태양이 가려진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뵈지 않는데, 그 자리에 빛이 있어, 폭력에 인이 박힌 전쟁 베테랑 백부장의 마음을 가장 먼저 깨치게 하는 빛이다. "저 사람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태양이 꺼진 자리에서 빛을 보았다.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창세기가 말하는 그 소리, 그리고 그 소리가 있지마자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첫 빛. 그 빛은 태양보다 먼저 있던 빛. 눈을 감아도 보이는 빛. '사랑'이라 말하면 될까. 그 빛과 소리는 사랑이었다. 없던 세상을 있게 했던 태초의 그 소리, 그 소리가 있어 생겨난 빛은 사랑이다. 사랑은 다른게 아니라, '상대가 온전히 있기를 바라는 맘'이 사랑이다. 상대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면 사랑 아니요, 죽길 바라는 마음은 사랑의 반대편에 있다. 세상이 온전히 있기를 바라다 못해 세상을 정말로 있게 하는 첫 소리. 그래서 그렇게 있게 된 세상을 비추는 그 최초의 빛. 사랑이다.
가온에 지켜
'가온'은 '가운데'라는 말이다. 사람의 가온은 어디인가? 몸과 맘의 중심, 인격의 중심 말이다. 몸과 상관없는 영혼이라 할 수도 없고, 보이지 않는 차원과 무관한 몸 어딘가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 신묘한 자리. 가온이다. 그 가온은 신을 모시는 자리요, 그래서 성막의 시은좌와 같은 곳이다.
그 가온에 태양 아래서 본 색(色)을 채워넣는 것이 인간이요, 그 속을 온갖 나에 대한 소리로만 채워 자기 중심으로 치닫는 것이 사람이다. 그런데 그 속에 첫 빛이 비추니, 가시광선은 사라지고, 나에 대한 소리가 아닌, 그에 대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빛과 소리를 마음에 단디 붙들어 지켜나간다. 이른바 희랍어로는 '아레떼', 속알(德)지킴이다. 본래 내 속에 채울 것은 세상의 색과 소리가 아니었다. 첫 빛과 그 소리였다.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만들고 그 소리와 비추는 그 빛이었다.
그 첫 빛과 그 소리가 세상의 시작이요, 중심이다. 이 빛과 소리가 中이요, 이 빛과 소리를 가온에 담아 지키는 마음이 忠이다. 충의 반대는 惡이다. 온통 어그러지고 굴절되어 진실을 왜곡시키는 것을 마음에 잔뜩 새겨놓은 것이 惡이다. 따라서 惡의 반댓말은 善이 아니다. 선은 좋음이요, 한 분이시다. 그 분과 악은 대전상대가 아니다. 악은 선에 기생할 뿐이요, 선의 드러남 앞에 두려워 떨 뿐이다.
한 사람 우로부터 세상에 가져온 숨으로
그 소리와 첫 빛이 진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다. 아는 사람 중에는 알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살과 숨에 있다.
한 사람이 하늘의 차원으로 가서 숨을 가져왔다. 그가 곧 '인자'다. 그 인자는 자신의 몸을 먹으라 했다. 그의 살점과 피를 우리의 위장에 넣고, 그가 가져온 하늘숨으로 숨쉬라 했다. 우리가 그를 먹고, 그 숨 쉬면, 그 숨이 그의 살점을 산화시킨다. 산화는 칼로리를 발생시킨다. 곧 힘이다. 세상을 살아낼 힘이다.
다시 말하면, 가온을 지켜 살아내기 위한 먹이가 곧 인자요, 먹은 인자를 태워 열량을 발생시키는 것이 숨이요, 이 인자와 숨의 순환을 통해서 오늘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간다. 어디에서 세상에서. 이것이 부활이요, 거듭남이다.
'숨'이란 글자의 자형을 보라. 사람이(ㅅ) 우로부터(ㅜ) 세상(ㅁ)에 가져온 것이 숨이다.
살아살아 죽어도 살림을 살아
그 인자는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한 것은 '빈 무덤 사건' 전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을 가리켜 '부활이다'라고 하였는가? 목숨 아니라 하늘숨으로 살고, 그 하늘숨으로 진리를 삭여 가온을 이루는 삶이 곧 부활이기 때문이다. 첫 빛과 그 소리에 반응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 살아, 죽더라도 좋다. 왜냐하면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하늘숨 쉬는 자를, 그 소리의 주재께서 살려내시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하시어 '있게' 하신 이가, 그를 사랑하시어 그의 존재 기반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사랑하여 있다. 사랑하여 죽음을 이긴다. 사랑하여 영원하다.
이렇게 사는 자는 다른 이를 살릴 수 있다. 그래서 살림이다.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자는, 자신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죽음에서부터 다른 이를 건져낼 수 없다. 그러니 인자를 먹어라, 하늘숨 쉬어라, 그렇게 나도 살고 너도 산다. 죽음은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게 된다. 이른바 '살림살이'다. '이'는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남을 살리고, 자신도 살아난 이가 '살림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