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0편
감사의 시.
온 누리야!
주께 환호성을 지르라.
주께 기쁨으로 섬기라.
주께 노래하며 그 앞에 나아가라!
[2]
주를 알라!
그가 하나님이시다.
바로 그 분이 우리를 지으신 분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것이 아니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3]
들어가라!
감사하며 그의 성문으로,
찬송하며 그의 뜰 안으로.
그에게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높히라!
왜냐하면 주는 '좋음'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자비는 끝이 없고,
그의 진리는 모든 세대에 이른다.
감사의 시.
오늘은 시편 100편을 보겠습니다. 시편 100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감사의 시'. '시편'이란 말은 시들을 모아놓았다는 말입니다. 시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시(詩)'라는 말에 대해서 1번 뜻으로 나오는 것이 "<기독교> 구약 성경 <시편>의 글" 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두번째 뜻이, "<문학> 문학의 한 장르.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다"라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시가 참 많은데, 시편은 인류의 처음 시에 해당하는 시의 원형들입니다. 그래서 사전에서도 시에 관해서 '시편'을 먼저 언급하는 것입니다.
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억'입니다. 기억하기 위해 쓰는 글이 시입니다. 시에는 라임과 플로우가 있습니다. 라임은 단어들을 비슷하게 맞추는 것이고, 플로우는 우리말로 하면 호흡입니다. 즉 호흡에 따라 외우기 쉬운 단어들을 나열해서 사람이 읊으면서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든 글이 시입니다. 왜 기억하도록 합니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글이 흔하고 저장매체가 발달했지만, 옛날에는 그러지 않습니다. 종이마저도 귀했던 시절이니, 무언가 후세에 전수해야 하는 것, 이건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을 시로 읊어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음세대로, 그 다음세대로 전수되어 내려갔습니다. 이 점은 민족 공통이라, 우리도 구지가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어 먹으리"가 가야국의 건국신화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백성들에게 꼭 가르쳐야 했습니다. 이거 한자로 하면 "구하구하 수기현야 약불현야 번작이끽야"로, 라임이 딱 들어 맞습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기억해서 전수하기 위해.
시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워 기억해서 전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시편은 시인데, 이 시를 번역하는 과정 중에서 일단 플로우가 날라갔습니다. 그리고 단어가 라임이 안맞게 되었고, 또 제 위치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외우기 위해서 플로우를 만들고, 단어를 맞추어놓은 것인데 번역을 하다보니 오히려 외우기 어려운 형태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시편을 펴보면 전혀 시 같지 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시를 우리나라 시처럼 만드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해는 됩니다만,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쳐본다고 했는데,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외워서 다른 이에게 전달, 전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부분씩 살펴봅시다.
[1]
온 누리야!
주께 환호성을 지르라.
주께 기쁨으로 섬기라.
주께 노래하며 그 앞에 나아가라!
그 시작은 이러합니다. "온 누리야!" "기독교인들아", 아니면 "선한 사람들아" 하지 않고, 이 시를 들어야 할 수신자는 온 누리입니다. 모든 세계, 곧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주께 환호성을 지르라! 주께 기쁨으로 섬겨라! 주께 노래 하며 그 앞에 나아가라!" 앞에는 "주께"로 시작하고, 뒤는 "지르라", "섬기라", "나아가라"입니다.
환호성은 언제 지르는 것일까요? 월드컵 기간에 날 더워서 베란다문 열어놓고 집에서 텔레비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골이 들어갈뻔하면 아파트 전체에서 "워우" 하는 그 진동이 느껴집니다. 그러다가 골이라도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소리 지르고 난리 납니다. 이게 환호성이지요. 환호성은 그냥 지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뻐할만한 무슨 일이 벌어지고, 그 일에 대해서 환호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온누리야, 주께 환호성을 지르라!" 이 말은 온누리가 기뻐할 만한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말입니다. 온누리가 환호성을 지를만한 일이 벌여졌기 때문에 온누리가 기쁨으로 주를 섬길 수 있습니다. 온누리가 환호성을 지를만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온누리가 노래하며 그 분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환호성을 논하며 1945년 8월 15일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이 민족이 자유를 얻었던 것과 같이, 온누리를 압박하고 있었던 죽음이 패배하고, 모든 이들이 부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어떠한 사건입니까? 한 사람의 무덤이 빈 무덤으로 발견된 사건입니다. 그 무덤에 누워있던 이는 죽음을 깨고 다시 일어나,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하고, 하나님이 죽음으로부터 예수를 일으키셨다는 이 소식을 온누리에 전하라 하셨습니다. 바로 이 사건입니다.
다른 것은 다 이해가 되겠는데, "그 앞에 나아가라"는 무슨 뜻일까요? 그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데, 그 앞은 어디이며,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앞에 선다는 것은, 어디로 이동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을 바꾼다는 말입니다. 생각을 바꾸어 예수를 온통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아가라"는 무엇입니까? 이 말은 "따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앞에 나아가라는 말은, 생각을 바꾸어, 그를 믿고 따르라는 말입니다. 그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가 내 생각을 버리고 그 분을 믿으면 그 분 앞에 선 것이요, 그 분을 믿기에 그 뜻대로 살면 그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즉, 이 첫번째 연은, 온누리가 환호성을 지를만한, 그 죽음을 깨뜨린 사건이 벌어졌으니, 그 예수를 모시고, 그를 노래하며, 믿고 따르라는 구절인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이기신 분과 점점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리도 죽음을 이기는 그 날이 가까워집니다.
[2]
주를 알라!
그가 하나님이시다.
바로 그 분이 우리를 지으신 분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것이 아니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둘째 연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를 알라!"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앞에서 말했던 주, 온누리가 환호할만한 일을 하신 바로 그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심을 알아라!
욥기에 보면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저는 지금부터 그 사람들을 깔테니 실명을 거론하지 않고 이니셜로 말하겠습니다. 먼저 욥의 친구 S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가난하고, 병걸리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돈 많고, 병이 없고, 어려움 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 사람이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그렇게 하시는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어려움의 끝판왕인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과 함께, 자기 눈앞에 있는 곤경을 극복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욥의 친구 E군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하나님이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봐야 관심도 없으시고, 우리의 잘못을 혼내시는데만 관심이 있으시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올곧게, 올바르게 사는 일을 무척이나 기뻐하십니다. 스바냐서에는 하나님이 우리가 올곧게 사는 그 일을, 가만히 있을 수 없을만큼 좋아하셔서 노래를 부르실정도라고 했습니다.
또 욥의 친구 S군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올바르게 살 수는 없을 것이라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오해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습니다. 그 길이 있습니다.
친구들 세 명이 이토록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도중, 욥 역시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욥이 생각했던 하나님은 고난 중에 함께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세상 문제에 관심이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 문제의 한 가운데서 죽음을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신데, 고난을 모르는 하나님이시라니 진실과 먼 소리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을 쉽게 오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오해할적 마다 한 분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 사람의 인격안에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가 하나님이십니다. 게다가 바로 그 분이 우리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니요?"하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이 소리 역시 하나님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우리가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맘이, 최후에는 우리의 몸까지 새로워집니다. 이것을 가리켜 새창조라 합니다. 이 새창조의 시작이 예수 이십니다. 그러니 그 분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요, 우리를 새로이 지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소유권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백성이라 말하기도 하고,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그 분은,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요, 양을 이끄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왕이자 목자되신 예수께서 자신의 백성과 양들을 어디로 이끌어가실까요?
[3]
들어가라!
감사하며 그의 성문으로,
찬송하며 그의 뜰 안으로.
그에게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높히라!
왜냐하면 주는 '좋음'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자비는 끝이 없고,
그의 진리는 모든 세대에 이른다.
그 왕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그 목자는 자신의 양들에게 들어가라 하십니다. 그 곳은 성문이기도 하고, 그 곳은 뜰 안이기도 합니다. 이 장소는 어디일까요? 이 시편 100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문과 뜰 안은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양이 성전에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 뿐입니다.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러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살점을 불로 태워드리고 하나님께 연기가 되어 닿기 위함입니다. 즉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죽으러 가는데 감사하고, 죽으러 가는데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죽으러 가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히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 뒤에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는 좋음이시기 때문입니다". 흔히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크신 것입니까? 선이 큰 것입니까? 선 이라는 속성이 더 커서 그 안에 하나님이 들어가 계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보다 큰 선은 없으며, 하나님 없이 있는 좋음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음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으면 좋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일상속에서 "좋다", "잘~", "착하다"라고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우리 하던 얘기로 돌아옵시다. 죽으러 가면서도 감사하고 기쁩니다. 주의 이름을 높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이 좋음이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그 좋음은 어떤 좋음일까요? 우리가 죽는데 도대체 무엇이 좋다는 말입니까? 이유는 하나 뿐입니다. 우리가 죽더라도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자비는 끝이 없고, 그의 진리는 모든 세대에 이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 온통 다 드려지고, 하나님의 불이 우리 안에 떨어져 우리를 온통 다 태웁니다. 성령으로 태워진 삶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삶의 연기를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향기로운 삶의 연기를 올려드린 제물은 다시 살아나서, 끝이 없는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부활의 진리가 모든 세대에 이르는 것은 모든 세대에 이르도록 내가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져, 성령이 불로 태워올린 그의 올곧은 삶은, 다시 살아나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100편의 '주'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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