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우리는 언젠가부터 이야기를 연결하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한 단어에는 집중할 줄 알고, 한 문장은 가슴에 새길줄 알아도, 이야기를 마음 속에 품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것입니다. "Carpe diem", "Seize the day",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현실에 최선을 다하자." 카톡 프로필을 보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경구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런 문장들은 뭔가 있어보이지만 사실 아무 것도 없는 말입니다. 그냥 자기 현실에 대한 자기 긍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합니다. 그저 현실의 절망을 다소간 보지 못하게 하는 단기적인 마비상태는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쓰잘데기 없는 문장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들을 연결해야 합니다. 그렇게 삶을 보여주는 거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 안에서 문장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문장이 의미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칠병이어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사건들은 어느 하나 따로따로 떨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각각의 사건들은 다른 사건을 이해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고, 그렇게 퍼즐을 맞추듯, 그렇게 집을 지어가듯 하나하나 자기 위치가 있었습니다.
칠병이어를 통해, 자신이 사람들을 위해 찢기는 빵임을 보여주신 예수. 그 분이 세상의 악을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해하고 있습니까? 고난을 통해서만이 이 세상의 악을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아의 진리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누룩에 대한 말씀에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마치 맹인을 두 단계에 걸쳐 보게 된 것처럼, 제자들도 한 번에는 아니더라도, 점차 알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건의 맥락 위에서 예수는 메시아라 고백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건간에, 그 말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금새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드러냅니다. 예수께서 고난 받는다는 말에 정색하며, 예수를 말렸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사탄이라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고 그 분이 말씀하신 '너희의 십자가'.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맞습니다. 그리고 역시, 이 본문 역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에 맞물려 있습니다.
변모(9:2~13)
일주일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거기서 예수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의 옷은 그 어떤 빨래도 그렇게 하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빛났다. 엘리야와 모세도 그들 앞에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보고 베드로가 말했다. "선생님, 여기에 오니, 정말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여기에 오두막을 셋 짓겠습니다. 하나는 선생님을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자 구름이 그들 위에 드리워졌고 그 가운데서 한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
그때 그들이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없고 예수만 남아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예수께서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그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셨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면서 그 말을 계속 생각했다.
제자들이 물었다. "그렇다면 왜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엘리야가 정말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러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느냐? 이 말을 들어보아라.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자기 마음대로 대했다. 성경이 그에 대해서 기록한 대로다."
1. 왜 고난 받을 수 없는가?
지금 예수께서는 "악의 문제를 고난으로 해결하기"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칠병이어 이후, 아니, 예수께서 광야에서 첫걸음을 떼신 이후, 예수는 줄곧 이 생각을 염두해두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질지언정, 이 고난이야 말로 악을 해결하는 탁월한 방식임은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 살펴보았던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켰던 데드먼드 투투의 '진리 화해 위원회'의 경우도 그러하고, 18세기 영국 흑인 노예 무역을 근절시킨 윌리엄 윌버포스도 그러했으며, 1980년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죽은 오스카 로메로 신부 역시 그러합니다. 그들은 고난 받기를 자처했고, 서로 죽이겠다고 으르렁 가리는 양 측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고난과 동침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 땅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들 뿐입니까? 예수의 십자가 이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역사 속 모든 문제의 해결방식이었고, 그것은 언제나 고난받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서, 악은 소멸되고, 사람들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었으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무기로 악과 싸우는 위대한 전투, 승리가 보장된 전투는 오늘도 사람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이 위대한 사실을 안다 말하면서도 그들과 같이 고난받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얼마전, 부모님이 보고 계신 드라마를 함께 본 적이 있습니다. '내 이웃의 아내'라는 드라마였습니다. 제목만 딱 봐도 알수 있듯이, 십계명 10번째 계명의 패러디입니다. 처음에는 '뭐 이런 드라마가 다 있나. 이웃의 아내랑 바람나는 드라마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이런류의 드라마는 흡인력이 굉장합니다. 저도 어느샌가 부모님 옆 자리에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에 빨려들어가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본 에피소드는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 남자는 의사입니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이 의사는 보호자가 없어서 수술받지 못하는 할머니를 대학병원 원장의 만류에도 무릅쓰고 수술하는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대학병원과 제약회사 사이의 모종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병원은 환자들에게 좋지 않은 약을 뇌물을 받고서 병원에 들여오고 있었고, 이것을 주인공은 알게 된 것입니다. 주인공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언론에 알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병원원장은 적반하장으로, "너 그럴거면 이 병원 나가"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주인공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나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 날 부인과 통화합니다. 그 통화 속에서, 주인공은 의사로서의 신념이냐, 아내가 그토록 걱정하고 있는 생계의 문제냐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병원원장을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이번 제약 납품건은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고난받을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는 것은 바로 그 문제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악의 수족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게끔 우리를 붙들어 놓는 바로 그 끈적끈적한 문제 말입니다. 바로 생존의 문제입니다.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한 고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필요로하고, 스스로, 홀로,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건희 회장 아들인 이재용씨 한 달 전기세가 2000만원을 육박합니다. 왜냐하면 그 가족 대대로 폐가 안좋기 때문에, 집안 공기를 365일 24시간 하와이 수준으로 유지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돈이 제일 많은 사람조차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무언가 끊임없이 필요로 합니다. 이 사실을 방송에서 알게 되었고, 방송에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강용석의 고소한 19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방송사는 XTM이에요. XTM의 가장 큰 광고 계열사는 삼성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내보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왜요? 이걸 내보내면, 광고가 짤릴 수 있습니다. 광고가 짤리면 이 방송사에는 막대한 금전적인 손해가 생길 것이고, 이것은 또 누군가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생존의 문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얽혀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할 말 못하고, 본 것을 말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생존을 중심으로한 거대한 피라미드. 거기서 중요한 것은 진실보다 생존입니다.
왜 우리가 고난받을 수 없습니까? 생존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고난이라니요. 그걸 내가 누구 좋으라고 받습니까? 악의 문제요? 내 문제도 아니지 않습니까?
2. 땅에서 엿본 하늘, 메시아를 통해서
악의 문제 앞에서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무엇을 믿은 것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조차 고난 받음으로 악을 해결하는 것이 대해서 금시초문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이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들의 귀를 자르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를 산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현실의 창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일주일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거기서 예수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의 옷은 그 어떤 빨래도 그렇게 하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빛났다. 엘리야와 모세도 그들 앞에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보고 베드로가 말했다. "선생님, 여기에 오니, 정말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여기에 오두막을 셋 짓겠습니다. 하나는 선생님을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우리는 일전에 하늘과 땅에 대해서 배운 바가 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차원, 땅은 인간의 차원, 그러나 이것은 어느 분명한 경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중첩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장면이 이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산으로 데려가셨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이것은 땅의 차원에서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땅이자 하늘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현실에 존재하는 새로운 차원을 열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얄 수 없는 정도로 빛나는 예수의 모습. 그리고 그 예수와 함께 역사의 전달자들이 옆에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뻘소리를 합니다. "선생님, 여기에 오니, 정말 좋습니다. 여기서 오두막 짓고 우리 모두 살아요."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데리고 가신 곳만 하늘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하늘은 모든 땅을 덮고 있고, 우리는 예수를 따라 현실의 모든 곳에서 새로운 차원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실 저는 베드로를 무척 좋아합니다. 저번주에도 세족식 할 때 목사님이 베드로에 대한 구절을 읽어주셨습니다. 그 때 발을 씻어주신다는 예수님에게, "아, 어떻게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십니까? 안돼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너와 내가 상관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베드로 왈, "그럼 온 몸을 다 씻겨주세요! 예수님!" 이렇게 베드로는 단순하고 우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욱 좋습니다. 베드로의 반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반응, 그리고 그의 솔직함은 우리가 읽고 있는 문서가 거짓이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만약 복음서를 누가 지어낸 것이라면, 초대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를 이런 식으로 묘사했겠습니까?
베드로의 반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반응입니다. 만약 어떤 친구가 수련회에서 하늘을 엿봤다면, 그 친구가 다음 수련회를 또 학수고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마치 산에서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를 보자, 그들과 함께 그 자리에 눌러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베드로의 반응은 옳은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을 엿본 자가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구름이 그들 위에 드리워졌고 그 가운데서 한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
그때 그들이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없고 예수만 남아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예수께서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그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셨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면서 그 말을 계속 생각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따라 산에 올라왔고, 새로운 차원을 경험한 세 명의 제자. 이 사건의 의미하는 것은, 그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주제를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마가복음은 한결같은 그 주제 아래서 쓰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난을 통해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존의 문제 때문에 이것을 할 수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할 수 없다고 말한 정도가 아니라 생존을 버리려는 인자의 멱살을 잡을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을 산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현실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하늘이 보증하는 그 메시아가 말씀하십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나는 것"
3. 고난은 끝이 아니다-부활
예수를 따라 이 땅에서 하늘을 엿보고나니 부활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왜 고난이라는 가장 처참한 방식을 기꺼이 짊어지려고 하셨던 것입니까? 예수께서는 믿으셨습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날 것을 믿으셨습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그냥 죽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난을 감당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믿었던 인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악의 문제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것을 본 것입니다. 하늘의 다스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사람의 생존은 스스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이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 생존이 아닌 생명을 위해, 생존이 아닌 진실을 위해, 생존이 아닌 정의를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새로운 차원을 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처럼 말입니다.
제자들이 물었다. "그렇다면 왜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엘리야가 정말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러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느냐? 이 말을 들어보아라.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자기 마음대로 대했다. 성경이 그에 대해서 기록한 대로다."
당시 사람들은 말라기 4장을 보고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 메시아라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엘리야가 왔고, 메시아가 오실 길을 준비했으며, 헤롯 앞에서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 말한 이유로 목이 잘려 죽임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외치는 소리, 그가 말하는 준비에 대해서 무시했습니다. 예언의 성취로서 엘리야가 나타났으나 그들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가 엘리야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리고 그 세례요한은 생존이 아닌 생명을 위해, 생존이 아닌 진실을 위해, 생존이 아닌 정의를 위해, 하나님을 믿고 목숨을 내어놓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세례요한은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죄없는 한 사람이 고난으로 악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 첫번째 부활의 이후에라야, 세례요한의 부활도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활도 그렇게 찾아올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가장 기쁘게 들었던 자는 누구였을까요? 아마도 하늘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던 세례요한이 아니었을까요? 그는 아마도 하늘에서 예수의 부활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정말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존보다 하나님을 믿었던 그의 삶은 부활의 인정을 받게 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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