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0.
'설교'입니다. 우리는 매주 어떤 이유에서이든지,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왜 우리는 이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고대 문서를 펴놓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설교 시간은 악보를 읽는 법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매일 공연을 하고 있는 시립 합창단 단원들이고요. 물론 그 악보를 배운다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목소리는 모두 다르고, 우리는 맡은 역할도 모두 다릅니다. 누구는 소프라노, 누구는 엘토, 누구는 테너, 누구는 베이스, 누구는 솔로, 누구는 나래이션,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개성이 있고, 성격이 다르고, 생김새가 달라도, 하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양하지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 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눈 앞에 놓여있는 악보를 읽어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모여 있습니다.
누군가 이 악보를 싫어하는 분 있습니까? 누군가 이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악보를 제대로 읽지 않고, 자기가 내고 싶은대로 목소리를 내는 것을 결코 '자유'라 부르지 않습니다. '개성'이라 부를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불협화음일 뿐입니다.
삶이라는 매일의 공연을 준비하는 합창 단원들인 여러분,
신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노래를 부릅시다. 우리는 위대한 합창단의 단원들입니다. 이 시간 악보를 함께 읽으십시다. 그렇게 하나되어, 우리 각자의 목소리이나, 그것이 하나되어 울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기대합시다.
오늘 우리가 배울 곡은, "손마른 사람을 치유하시다" 입니다.
손마른 사람을 치유하시다(3:1~6)
예수께서 다시 회당으로 가셨다. 그곳에 손마른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께 혐의를 씌우려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를 고치실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손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이리로 나와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 아니면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맞느냐, 죽이는 것이 맞느냐?"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을 보시고 매우 언짢아하시며 성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손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 보아라." 그가 손을 내밀자 손이 회복되었다. 바리새인들은 곧바로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면 예수를 없앨까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1. 이합집산 : 생명을 짓이기는 톱니바퀴
1s 예수께서 다시 회당으로 가셨다. 그곳에 손마른 사람이 있었다.
3먹의 이야기가 끝나고, 즉, 1) 레위와 함께 먹으시고, 2) 지금이 포로생활 종결의 때임을 말씀하시며, 3) 도망자 왕으로부터 찾아오는 우주적 안식을 보여주신 이후, 그는 다시 회당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한 쪽 손의 근육이 완전히 망가져, 점점 한 쪽 방향으로 손이 오그라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일어나는 일이 마가복음 3장 1~6절입니다. 오늘 이것을 역순으로 강해하겠습니다.
6s 바리새인들은 곧바로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면 예수를 없앨까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거꾸로 6절부터 보면, 우리는 다음의 두 집단을 만납니다. 하나는 바리새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헤롯당입니다. 이 두 집단이 모여 하나의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 논의는, "어떻게 하면 예수를 없앨까" 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이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헤롯당을 원수처럼 생각하고, 헤롯당은 바리새인들을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이방민족을 쳐부수고 유대민족을 구원하실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헤롯당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헤롯의 지지자들입니다. 우리가 배웠듯, 헤롯은 로마의 일임을 받아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분봉왕입니다. 즉, 로마라는 이방제국의 하수인입니다. 당연히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헤롯을 비판하기 바빴고, 헤롯당원들은 바리새인들을 못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톰과 제리가, 서로 손을 잡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마치 이들은 맞물려가는 톱니바퀴와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고,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인듯 보이지만, 이들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내가 잘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잘되는 것에 방해가 되는 무언가가 나타나면 누구와도 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잘되는 것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되는 것이 방해가 되는 무언가가 나타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 내가 잘되기를 갈망하는 동력으로 돌리는 톱니바퀴 틈에서 그것을 분쇄해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SK나 KT나 LG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듯 보이고,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인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핸드폰은 mp3를 재생하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이상한 운영체제가 탑재되어 있고, 이어폰을 꽃으려면 따로 젠더를 사야하는 불편한 핸드폰을 전국민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왜 였을까요? 그러다 아이폰이 출시되었고, 사람들은 '아, 핸드폰을 저렇게 편하게 만들수도 있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폰이 우리나라에 바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통신사들이 모두 손을 잡았거든요. 합심해서 아이폰 국내출시를 막았죠. 그리고 사실 이 기업들은 모두 결혼으로 맺어진 친인척 관계이기도 합니다.
LTE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와이브로라는 국내 통신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기술은 중소기업이 로열티를 가지고 있는, 속도도 LTE에 버금가는 국내기술입니다. 물론 대기업 기술은 아니고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기업들은 아무도 와이브로를 쓰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신선한 기술은 외국에 팔려갔고, 우리나라는 모두 LTE가 깔렸습니다. 이 LTE는 3대 통신사가 독점하고 있습니다.
LTE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와이브로라는 국내 통신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기술은 중소기업이 로열티를 가지고 있는, 속도도 LTE에 버금가는 국내기술입니다. 물론 대기업 기술은 아니고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기업들은 아무도 와이브로를 쓰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신선한 기술은 외국에 팔려갔고, 우리나라는 모두 LTE가 깔렸습니다. 이 LTE는 3대 통신사가 독점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이 목적 아래, 어제의 적도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습니다. 목적에 따라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합니다. 헤롯당과 바리새인들, 서로 까기에 바빴지만, 이제 예수가 나타났으니 손을 잡아야죠. 헤롯이 진짜 왕이 아니라, 자신이 진짜 왕이라 말하는 예수,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멀쩡해보이나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졌다고 말하는 예수. 죽여야죠. 그 두 원수들은 이제 동지가 됩니다.
이러한 헤롯당도 바리새인도 지금 회당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당안에는 한 쪽 손 근육을 완전히 쓰지 못하게 되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버러지 같은 인생을 살아온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헤롯당도 바리새인도 이 사람의 병이 낫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이 낫기를 바래서가 아닙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입니다. 병이 나으면, 안식일을 어겼다고 예수를 공의회에 고발할 것입니다. 병이 낫지 않으면,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신원하고 병을 고쳐준다고 예언된 메시아가 아니었다고 떠벌리고 다닐 것입니다. 왜 입니까?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쌓아온 것들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헤롯이 쌓아온 것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신선한 다스림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손을 잡습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한 사람을 살인하는 일에 공모자들이 됩니다. 그 와중에 손 마른 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2. 물을 파는 진짜 이유
물 한방울 나지 않은 건조하고 푸석푸석한 어느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 물장수가 들어왔습니다. 물장수는 차를 끌고 옆 마을 개천에서 물을 길어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이웃 마을 까지 물을 얻으러 먼 길을 다녀야 했던 마을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이 물장수에게 물을 사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마을에서 샘물이 터지는 날이 올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건조하고 푸석푸석한 삶 속에 그 예언은 거짓말처럼 여겨졌고, 사람들은 그저 이렇게 물을 사먹기만 한다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물장수는 물값을 조금씩 올려보기 시작했습니다. 물 값을 조금 올렸을 뿐인데, 엄청난 수입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자, 그의 욕심과 마음이 결합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물값 올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물을 먹으려면 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그 돈을 물값으로 내야 했습니다. 더불어 물장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점점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봤습니다. 마음에 캥기는 것이 조금 있었지만, '뭐 마을 사람들은 나 때문에 물을 편하게 먹을 수 있는거 아니겠어' 생각하며 애써 웃었습니다. 그렇게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물장수에 욕망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노동의 댓가를 가져다 부어야 했고, 물장수의 욕망은 채워지기는 커녕 날마다 빈공간으로 더욱 휑해졌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물값은 계속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의 갈증은, 물장수가 들어오기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습니다.
그런데 샘이 터졌습니다. 거짓말 같이 샘이 터졌습니다. 내려오는 예언은 사실이었습니다. 끝도 없이 맑은 물이 마을 한 가운데에서 터져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너도 나도 물을 마셨습니다. 그래도 그 물은 멈출줄 모르고 계속 흘러넘치고 어느덧 마을에는 작은 강이 졸졸 흐르고 그 강 주변으로 풀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물장수는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물장수를 때려치고, 자신도 이 물을 마실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음모를 꾸밀 것인지. 물장수의 결정은 후자였습니다.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이 새로운 샘물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소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이 새로운 샘물의 근원에 콘크리트를 부어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콘크리트를 부어버리면, 다시 이 마을의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이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마을에서 샘물이 터지는 날이 올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건조하고 푸석푸석한 삶 속에 그 예언은 거짓말처럼 여겨졌고, 사람들은 그저 이렇게 물을 사먹기만 한다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물장수는 물값을 조금씩 올려보기 시작했습니다. 물 값을 조금 올렸을 뿐인데, 엄청난 수입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자, 그의 욕심과 마음이 결합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물값 올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물을 먹으려면 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그 돈을 물값으로 내야 했습니다. 더불어 물장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점점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봤습니다. 마음에 캥기는 것이 조금 있었지만, '뭐 마을 사람들은 나 때문에 물을 편하게 먹을 수 있는거 아니겠어' 생각하며 애써 웃었습니다. 그렇게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물장수에 욕망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노동의 댓가를 가져다 부어야 했고, 물장수의 욕망은 채워지기는 커녕 날마다 빈공간으로 더욱 휑해졌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물값은 계속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의 갈증은, 물장수가 들어오기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습니다.
그런데 샘이 터졌습니다. 거짓말 같이 샘이 터졌습니다. 내려오는 예언은 사실이었습니다. 끝도 없이 맑은 물이 마을 한 가운데에서 터져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너도 나도 물을 마셨습니다. 그래도 그 물은 멈출줄 모르고 계속 흘러넘치고 어느덧 마을에는 작은 강이 졸졸 흐르고 그 강 주변으로 풀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물장수는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물장수를 때려치고, 자신도 이 물을 마실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음모를 꾸밀 것인지. 물장수의 결정은 후자였습니다.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이 새로운 샘물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소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이 새로운 샘물의 근원에 콘크리트를 부어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콘크리트를 부어버리면, 다시 이 마을의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5s 예수는 화를 가지고 그들을 둘러보셨다가,
근심을 가지고 그들의 마음에 있는 완악함을 보셨다.
지금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 콘크리트를 부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에게 콘크리트를 부어버릴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리는 한 사람을 잊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손이 오그라든 사람입니다. 지금 회당에서 예수를 죽이고자 주목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사람을, 이 손이 오그라든 자를 잊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지금 회복이 갈급하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다들, 생명에는 무관심한 윤리적 괴물들이거나, 마치 스포츠 경기를 보듯 관전하면서, 우리편이 이기면 그만이라는 정치적 인간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 가엾은 한 사람의 회복에 관심이 없을 때, 이것은 이 한 사람만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유대 땅에 있는 모든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 이 세상의 약자와 헐벗은 자들의 회복을 잊은 것입니다. 열방의 빛으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이 이것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마가복음을 계속 봐왔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행동은 모두 충격적인 것이었고, 그 때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고, 바리새인들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예수께서는 꾸짖기는 하셔도 '이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리새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 자체가 '중산층 경건운동' 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공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 그것이 이들의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님 계시던 당시, 누구나 바리새인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의아해했습니다. 안식일을 어기는 예수님을 보고 누구나 "저 사람 왜 그러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평범한 거에요. 지극히 정상인 사람들. 오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마가복음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단 한차례 바리새인을 욕하신 적이 없습니다. 안식일 논쟁 때도, 금식논쟁때도, 왜 세리와 죄인들과 먹느냐고 따졌을 때도 예수님은 그들이 꾸짖으실 지언정 이 단어를 사용해서 그들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단어가 바로 '완악함'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악인이 되는 순간이 마가복음 3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이 중요합니다. 이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면서 예수님은 처음으로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을 탄식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2장에서 보이지 않았던 끔찍한 장면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자신이 잘 되길 바라는 것 때문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인격이 처참히 무시당하고 있는 바로 이 장면입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미끼로 이용되어, 회당에 널부러져 있는 한 사람의 인격입니다. 이것이 완악함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터져나오는 샘물을 기이히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저당잡아 이 터져나오는 샘물을 부정하려고 할 때, 이것은 완악함입니다. 이 완악함이라는 말은, 마음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사람을 미끼로 쓰고, 게다가 죽이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이 딱딱하게 굳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의 상상처럼, 모든 것을 봐주시고 눈감아주시는 아량넓은 옆집 아저씨가 아닙니다. 완악함에 대한 반응은 한 가지 뿐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반응은 아량이나, 눈감아 줌이나, '그럴 수도 있겠다'가 아닙니다. '화'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하 우리는 화를 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피상적 친절함을 갑옷처럼 두르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찌 생각할까 염려하는 것은, 예수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입니다. '거룩한 빡침'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려는 열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러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화를 냅시다. 예수처럼 화를 냅시다.
3. 참된 쉼은 생명을 구하는 것
4s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
아니면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맞느냐, 생명을 죽이는 것이 맞느냐?"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우리는 안식이 무슨 의미인지 확인했습니다. 안식은 쉼입니다. 이것은 도망자 왕으로부터 다시 찾아온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이 쉼이 점점 확장되어, 인간의 모든 시간을 덮습니다. 예수 안에서 그 시간이 완성됩니다. 예수, 그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창조됩니다. "주의 뜻 이뤄질 때", 즉,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질 때, "우리들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과 교제하며, 참된 쉼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서요? 아니요. 살아서요.
예수 안에서 모든 일은 일이 아니라 쉼이 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널부러져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님에게 편지쓰기가 학교 숙제일때는 이것이 일이 되지만,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히 넘쳐 흘려 든 펜은, 밤을 꼬박 새서 쓰더라도 일이 아닙니다. 이렇듯 일과 쉼에는, 일을 안하고 함에 있지 않습니다.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자발성과 사랑입니다. 도망자 왕이시자 인자이신 예수께서 쉼의 시간을 가져오시고 완성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자발성을 가지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일이 평가받고,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그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섬김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이가 쉼을 가져오는 방식입니다. 사람에게 자발성과 사랑을 주십니다. 이것이 사람을 일하지 않고, 쉬게 합니다. 그 쉼 속에서 지치지 않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 속에 지치지 않는 끝없는 사랑의 자발성을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어, 그 분의 쉼 속에 들어왔음에도, 다른 이의 삶을 저당잡고, 그들을 자유케 하기는 커녕 그들의 인생을 괴롭게 한다면, 그 사람은 쉼을 사는 사람이 아니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쉼은, 생명을 주는 삶, 선한 일을 하는 삶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발성과 사랑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포로생활이 종결되어, 이제 원하는 자는 그 쉼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쉼의 문 앞에서 우리는 무엇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안식일은 강박적으로 지켜야할 법이 아닌, 표지판같은 것입니다. 이 표지판은 예수께서 가져오실 자발성과 사랑의 시간을 가리켰습니다. 바로 그 표지판 앞에서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생명과 선한 일이냐, 죽음과 악한 일이냐!" 이 질문 앞에 우리는 결코 잠자코 있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3s 예수께서 손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한 가운데로 서라."
예수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이 질문을 던지니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 천잰데?"
그런데 그 말이 딱 맞습니다. 모든 순간 속에서, 예수는 샘물이 필요한 자, 가난하고, 병들고, 인격에 상처를 입은 자, 마음이 무너져 내린 자를 가운데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말그대로 천재입니다. 天은 하늘의 하나님이요, 才는 재주이니, 분명 하늘의 재주입니다. 이 땅의 재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마음이 무너져 내린 이들은 '가운데' 서 있어 본 적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그러한 사람을 가운데 세우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재주'입니다.
2s 사람들은 예수께 혐의를 씌우려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를 고치실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그를 비난하고, 혐의를 씌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증거가 됩니다. 생각해봅시다. 지금 예수에게 혐의를 씌우려고 하는 자들 역시, 이 일을 어딘가에서 증언하지 않겠습니까? 즉, 비천한 자의 회복은,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증인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 혐의를 씌우려고 하는 이 자들 역시, 예수의 회복에 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사역은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의 틈바구니에서도 한 사람의 인격을 올곧게 세우셨고, 이것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회복의 증인'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완악함에 침묵하는 자들 마저도, 회복의 증인삼는 충격적 반전입니다.
완악한 자들은 오늘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저는 이 완악함을 잘 나타내는 요즘의 단어를 알고 있습니다. '사이코패스'입니다. '공감 무능력자'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데, 그러한 사람과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이 곧 마음이 딱딱하게 굳은 사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싸이코 패스가 아니라고 안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만약 회복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그 와중에도 누가 이길지 편 가르고 있다면, 싸이코패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을 찾아서 일으키십시다. 그리고 가운데 세웁시다. 사람들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극단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사람의 회복입니다.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한 사람의 일어섬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께서 회당으로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1s 예수께서 다시 회당으로 가셨다. 그 곳에 손마른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 역시 사명이 있습니다. 이렇게 고쳐 읽어봅시다.
"우리가 다시 세상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
이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가 거꾸로 읽었던 이야기가 이제 다시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다시 제순서로 살도록,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니,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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