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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두 번째 '먹'입니다. 우리는 '먹' 3부작 이야기를 보자고 했었죠. 이 '먹' 이야기는, 이 3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모일 때,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그 두 번째 '먹 이'야기. 이것은 하나님의 양인 당신을 위한 '먹이'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첫번째 '먹' 이야기부터 정리를 해봅시다.
우리는 지난주 레위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 세리입니다. 세리는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세리, 사람들의 머리 속에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고 못박아 두었던 세리, 그 세리와 함께 예수님은 밥을 먹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그리고 충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주일 2부 예배 때 목사님이 먼저 하시더라고요. 이 세리 레위의 다른 이름은 바로 마태입니다. 네. 마태복음을 쓴 그 마태가 맞습니다. 레위가 복음서의 저자가 됩니다. 그것도 마태복음의 저자가 됩니다. 마태복음은 특별한 복음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입니다. 유대인이 누구입니까? 레위의 마음을 다 헤집어놓고, 레위를 죽일듯이, 집어 삼킬듯이, 원수보듯이 하던 바로 그 유대인들입니다. 레위를 세리라 손가락질 하던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그 레위가 예수를 따라, 예수와 함께 먹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 레위는 자신을 향한 원망과 미움의 시선을 복음으로 덮는 마태가 되어갑니다. 이게 무슨 뜻인줄 알아요? 찌질이가, 하나님이 원하시던 바로 그 사람이 되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와 함께 먹는 자가 되었을 때, 예수의 친구가 되었을 때, 정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 충격적인 일이 현실에 정말로 벌어졌고, 역사가 기록했습니다. 정말 찌질이였던 저 역시 이것을 증명합니다.
금식에 대한 질문들(2:18~2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와서 예수께 물었다.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을 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신랑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결혼식 하객이 금식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같이 있는 동안에는 그들은 금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머지않아 신랑을 빼앗길 것이다. 그때는 그들도 분명 금식을 할 것이다.
한 번도 빨지 않은 새 천을 낡은 외투에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조각이 낡은 외투를 찢고, 결국 구멍은 더 커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낡은 포도주 부대에 새 포도주를 붓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 때문에 부대가 터지고, 포도주의 부대를 다 잃을 것이다.
새 포도주에는 새 부대가 필요하다."
이 본문은 2먹! 그리고 바로 <금식에 대한 질문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해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해석은 그냥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트에서 산 재료들을 그 자리에서 우걱우걱 씹어먹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조리의 과정이 필요하죠. 먼저 재료들부터 살펴봅시다. 신약성서의 재료들은 대부분 구약에서 난 것인데요. 문제는 우리가 구약을 몰라서, 신약성경이 어떤 구약의 재료로 쓰였는지 모른다는데 있지요. 그런데 이 말은 반대로, 이것을 알면, 신약의 진하고 풍성한 맛을 우려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금식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 필요한 첫번째 재료는 이스라엘의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금식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역사를 헤집고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사실 성서의 모든 본문들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금식도 이렇게 의미가 밝혀질테니,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1. 열방의 빛, 이스라엘 이야기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를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계는 악으로 가득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타락의 반전을 이루시기 위해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이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자손을 통해 그 타락의 반전, 인간과 세계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 위대한 회복을 이루시겠다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유였습니다. 즉, 사명입니다.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순종함으로, 타락한 이 세계의 한 가운데서 그들을 치유해나가는 것, 그래서 종국에는 이 세계 전체의 회복을 가져오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빛"이라 표현했습니다. 이사야서 60장을 봅시다.
(사 60:1)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
예루살렘, 즉, 이스라엘에게 일어나서 빛을 비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빛이, 바로 이스라엘이 받은 사명입니다. 타락을 뒤집는 하나님이 뜻입니다. 그 뒤의 구절을 읽으면 더욱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사 60:2)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어둠, 짙은 어둠이 땅, 즉, 인간의 세계를 덮고 민족들을 덮었습니다. 그런데 그 민족의 한 가운데서 주님께서 떠오르십니다. 그의 영광이 너, 즉, 이스라엘의 위에 나타나게 됩니다.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이스라엘, 빛 앞에서 어둠은 사라지고,
(사 60:3)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
그 빛을 보고, 이방 나라들이 그 빛을 향해 나아옵니다. "그 빛"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따라 순종하는 삶! 그것이 빛입니다. 이것을 보고 이 땅위에 어둠이 물러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도 읽어봅시다.
(사 60:4)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아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너에게로 오고 있다. 너의 아들들이 먼 곳으로부터 오며, 너의 딸들이 팔에 안겨서 올 것이다.
(사 60:5) 그 때에 이것을 보는 너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치고, 흥분한 너의 가슴은 설레고, 기쁨에 벅찬 가슴은 터질 듯 할 것이다. 풍부한 재물이 뱃길로 너에게로 오며, 이방 나라의 재산이 너에게로 들어올 것이다.
(사 60:6) 많은 낙타들이 너의 땅을 덮을 것이며,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너의 땅을 뒤덮을 것이다. 스바의 모든 사람이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할 것이다.
(사 60:7) 게달의 모든 양 떼가 다 너에게로 모여들며, 네가 느바욧의 숫양들을 제물로 쓸 것이다. "내가 내 성전을 이전보다 더욱 영화롭게 할 때에, 이것들이 내 제단 위에 합당한 제물로 오를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은 열방의 빛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2. 열방의 빛이 어둠에 잠기었을 때
-포로기 이야기
그리고 이제 두번째 재료 입니다. 첫번째 재료가 흥분되고, 기대되는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재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음울한 이야기입니다. 재료로 치면 해산물같은, 오징어 먹물 파스타 같은, 그 외계생명체 같은...
이스라엘이 이 열방의 빛이 되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열방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열방의 어둠의 한 점이 되어 살았던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라가 찢기고 이방 제국들에게 짓밟히고 그들의 성전이 박살나며, 이방 제국의 포로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길고 긴 포로기가 시작됩니다.
대부분의 예언서들은 다 포로기 때 쓰인거에요. 우리 포로기 시절에 쓰인 글을 하나 더 보자구요. 역시나 이사야입니다.
(사 58:1) "목소리를 크게 내어 힘껏 외쳐라. 주저하지 말아라. 너의 목소리를 나팔 소리처럼 높여서 나의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알리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려라.
(사 58:2) 그들이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열방의 빛으로 살아가는 사명을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잔뜩 비꼬고 있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그들의 죄를 알려라. 그들이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나를 찾는다고 하고, 나의 길 알기를 좋아한다고 한단다."
(사 58:3) 주님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합니까? 주님께서 알아 주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행을 하겠습니까?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포로인데, 우리가 금식해도 우리를 포로생활에서 건져주지 않으시네. 금식해봐야 소용없잖아"
여기에는 충격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된 시절, 그들이 다시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한 것이 금식입니다. 하나님이 금식하라 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않고, 무슨 하나님을 달래는 수단처럼 금식을 생각합니다. “금식했으면 좀 들어줘야되는거 아닙니까?” 이거 방 문 틀어 잠그고, 부모에게 시위하는 사춘기 소년 소녀의 모습 아닙니까? 나 밥 안먹을거야. 그러니까 내 요구를 들어줘. 누가 먹지 말래?
지금 핵심은 당장 이방제국의 포로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죠. 그들이 하나님에게 순정을 바치지 않은 것이 문제죠. 그럼 그들이 다시 하나님 한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의 뜻이 이 땅의 현실이 되는 그 일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문제 아닙니까. 이방제국은 바로 그 사실을 가르쳐주기위한 하나님의 도구이지,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장난감을 사주냐 안사주냐가 문제가 아니라, 부모님의 사랑을 모르는 니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 58:4)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사 58: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님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제 금식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금식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밥을 굶는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애시당초 얘네가 밥을 굶자 한 것은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고, 포로가 된 것은 열방의 빛이라는 부르심이 소명을 깡글이 말아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금식하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되요? 열방의 빛으로 사는 소명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의 금식은, 그들의 존재 이유와 전혀 상관없는 금식입니다. 슬퍼하는 척하고, 상복을 걸쳐 입었으나, 그들의 일상은 변할 줄 모릅니다. 그들의 삶은 그대로 서로 다투고 싸우고, 못된 주먹질이나 하면서, 아직도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을 거두지 않았으면서 금식합니다. 열방의 빛으로서 사랑과 평화, 용서와 자비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금식합니다. 그러한 금식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이제 다음 구절에 진정한 금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사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사 58:7)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입니다. 이것은 열방의 빛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입니다.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입니다.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 그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돈이 필요한 친척들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입니다! 핵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입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돕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열방의 빛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살면,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증명한 것입니까? 우리가 바로 열방의 빛임을 증명한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실패한 자들의, 자발적, 금식의 이유입니다. 금식은 바로 이러한 삶 때문에 존재합니다. 다시 열방의 빛이 되고자 함입니다.
그럼 그렇게 ‘다시’ 열방의 빛으로 살아가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사 58: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리하면"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니가 금식을 주기적으로 하면"이 아닙니다. 의미는 분명합니다. "니가 열방의 빛으로 살면" 입니다. 그럼 어떠한 일이 벌어집니까?
(사 58:9)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사 58:10)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사 58:11)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사 58:12) 너의 백성이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며, 대대로 버려 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 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포로생활이 종결됩니다. 포로생활 종결 안해준다고, 우리가 하는 금식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이스라엘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담에게, 노아에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언제나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는 포로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우리는 어떻게 불리우게 됩니까? 12절 입니다.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세상 사이의 갈라진 벽을 고친 왕,
우리보다 먼저, 이렇게 불리신 한 분이 계십니다. 왕이 오실 길을 내어서, 사람이 하나님과 살 수 있도록 한 왕. 이제 등장합니다.
3. 예수 패거리들은 금식도 안하냐? 안한다!
금식에 대한 질문들(2:18~2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와서 예수께 물었다.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을 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신랑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결혼식 하객이 금식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같이 있는 동안에는 그들은 금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머지않아 신랑을 빼앗길 것이다. 그때는 그들도 분명 금식을 할 것이다.
한 번도 빨지 않은 새 천을 낡은 외투에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조각이 낡은 외투를 찢고, 결국 구멍은 더 커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낡은 포도주 부대에 새 포도주를 붓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 때문에 부대가 터지고, 포도주의 부대를 다 잃을 것이다. 새 포도주에는 새 부대가 필요하다."
정리해봅시다. 금식은 무엇입니까? 실패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무엇에 실패했습니까?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빛의 자녀의 삶은 어떠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삶의 본보기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긍정적인 삶을 산다는 뜻도 아닙니다. 열방의 빛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실제적으로 돕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이것에 실패한 포로들이 하는 것이 뭐다? 금식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유일한 금식의 이유입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금식하는 자는 아직 포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에 실패한 포로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 금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금식의 이유는 다소 이상합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잘 들여다 보세요.
사람들이 와서 예수께 물었다.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을 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다시 A.D. 1세기입니다. 왜 이들은 금식하는 것입니까? 성전을 잃어버리고, 가나안 땅을 빼앗긴, 자신들이 포로이기 때문에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들은 포로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빛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명에 실패한 포로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이게 어떠한 질문인지 아시겠습니까? "지금 우리 이스라엘 상황이 처참한데, 당신들도 금식해야죠.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안살다가, 땅 뺏기고, 성전 무너지고, 오늘날 이 모양 이꼴 포로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금식도 안하고, 지금 제정신이요?"
지금 이 끔찍한 상황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하나님 뜻 따라 다시 살기 위해 하는 간절한 바람인 금식이, 나와 다른 누군가를 손가락질할 수 있는 무언가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금식을 한다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이 썩어버린 질문에 대해, "갈라진 벽을 고치는,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 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신랑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결혼식 하객이 금식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같이 있는 동안에는 그들은 금식할 수가 없다.
“금식할 수 없다” 하, 이 답변이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금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금식할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포로생활 끝났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이 금식하면서 고대하던, 다시 열방의 빛으로 살아갈 그 날이 마침내 찾아왔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예수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열방의 빛 이야기와 함께 우리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요리를 위한 마지막 재료입니다. 그것은 출애굽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출애굽의 왕입니다. 출애굽의 왕은 세상왕을 파멸시키고, 언약 백성의 포로생활을 종결 지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포로가 아니기 때문에, 금식을 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분은 먹습니다. 포로가 아닌 그 분은 먹습니다. 이 식사는 그냥 식사가 아닙니다. 잔치입니다. 잔치!
왜 잔치입니까? 포로생활이 끝난, 유월절이 일어난, 마치, 오랫동안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에게 마침내 신랑이 찾아온 그 날처럼, 오랫동안 열방의 빛으로 다시 살아갈 소망을 품고 금식한 자들에게 찾아온, 출애굽의 왕! 그는 포로생활을 종결하시고, 마침내, 금식의 이유가 사라진, 자유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금식이 필요 없으십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1먹과 2먹의 위대한 연결점을 보지요! 포로들이 구출된 이 위대한 잔치, 더 이상 금식이 필요없는 이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 면면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 위대한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죄인과 세리와 병자들입니다. 당시 사람 취급도 못받던 여자와 어린아이들입니다. 다들 자신들이 뭔가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일이었습니다. 금식일이 기쁨의 잔치로 바뀌고, 그 날은 성실과 평화를 추구하는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8:19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넷째 달의 금식일과, 다섯째 달의 금식일과, 일곱째 달의 금식일과, 열째 달의 금식일이 바뀌어서, 유다 백성에게 기쁘고 즐겁고 유쾌한 절기가 될 것이다. 너희는 마땅히 성실을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해야 한다.
4. 남겨진 질문
그런데 옆에서 누가 그런다구, "에, 무슨 포로생활이 종결되요. 로마는 저렇게 건재한데요? 예수님 뻥치는거죠?"
포로생활이 완전히 종료되는 그림을 우리는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다 말할 수 는 없습니다. 좀 더 그림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도 빨지 않은 새 천을 낡은 외투에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조각이 낡은 외투를 찢고, 결국 구멍은 더 커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낡은 포도주 부대에 새 포도주를 붓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 때문에 부대가 터지고, 포도주의 부대를 다 잃을 것이다. 새 포도주에는 새 부대가 필요하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통해 포로생활이 종결되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금식을 멈춰지고,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 충격적인 생각은, 정말 새로운 생각입니다. 어느 정도 새로운 생각이냐하면, 기존의 그 어떤 생각과도 들어맞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지금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에둘러 말하자면 이러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포로생활은 로마에게 붙잡힌 포로생활이었으나, 예수가 바라본 진짜 포로됨은, 모든 인간 자체가 죄의 문제에 빠져버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민족과 민족이 전쟁합니다. 로마도 문제이나, 이것의 본질적인 해결은, 인간 죄의 문제의 해결, 바로 거기서부터 출애굽이 벌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력한 어둠, 모든 사람이 관여하고 있는 어둠, 즉, 죄로부터의 포로생활이 종결되는 것이, 예수가 바라본 자유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바로 이것을 종결지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감히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싸우는 두 친구가 있습니다. 한 친구는 다른 친구가 죽도록 밉습니다. 그런데 어떤 어른이 씩씩대고 있는 이 두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너희들 왜 싸우니?" 한 아이가 말합니다. "쟤가 먼저 이렇고, 저렇고요, 이렇고, 나는 잘못한게 없는데, 쟤는..." 그럼 이 어른이 해야할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래, 니 말이 맞으니까, 너에게 잘못한 저 아이를 같이 패주자꾸나." 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라고 있던 것은 그거에요. "우리는 하나님 잘 섬겼는데, 하나님 뜻대로 살았는데, 저 로마 좀 보세요. 쟤네 좀 패주세요. 제발좀요"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상대방 친구를 혼내주는 것이 아닌, 그 마음에서의 미움을 이기는 새로운 마음이 생겨나는 일이었습니다. 서로의 잘못을 넘어서 용서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한 친구를 없애야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미움과 질투와 살인의지를 이길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 바로 싸움 그 자체를 없앨 수 있는 가장 바른 길 아닙니까? 그 새로운 마음 무엇입니까?
이 일이 예수를 통해 가능해집니다. 인간은 새로운 길을 걷습니다. 화해와 용서의, 인간을 포로로 잡고 있던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길은, 이전의 생각과, 이전의 법과, 이전의 사고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쟤가 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바로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악이 있음을 보여주셨고, 그 악으로부터 해방을 얻는 길을 열어 재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새로운 옷감이라, 이전의 낡은 옷에 기워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포도주라, 낡지 않은 새로운 포도주 자루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청소년 여러분, 그리고 선생님 여러분,
여러분은 이 새로운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악'이 여러분 안에 있고, 내가 미워하는 누군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 누군가를 향한 미움 그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실 것입니까? 그리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이 상식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새로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실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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