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3먹!
이제 우리는 마가복음 2장으로 들어섰습니다. 2장 13절부터 2장 28절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레위를 부르신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금식에 대한 질문들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안식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떠한 공통점일까요? 바로 먹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레위의 이야기도 먹는 이야기입니다. 레위와 함께 예수께서 밥을 먹으신 이야기죠. 그 다음에 등장하는 금식 이야기도 먹는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니네는 금식 안하고 밥먹냐고 따지는 내용이니까요. 그리고 세번째 이야기인 안식일 이야기도, 예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에서 밀을 까먹는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즉, 이 세 가지 이야기는 "3먹!" 세 가지 먹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실을 염두해두고, 앞으로 3주에 걸쳐, 예수와 함께 먹으십시다. 이 "예수와 함께 먹는다"의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봅시다. 그 '3먹'의 첫번째 본문부터 확인합시다.
레위를 부르시다(2:13~17)
다시 한 번 예수께서 바닷가로 나가셨다. 무리가 다 예수께로 왔고 예수는 그들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통행료를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서 예수를 따랐다.
그렇게 해서 예수는 많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집에 앉으시게 되었다. 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는데,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가?"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다. 나는 선한 사람이 아니라 악한 사람을 부르러 왔다."
우리는 이 본문을 깨쳐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냥 들려주는데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보이는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읽혀지길 바라고서 200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니 허투로 다룰 수 있나요. 성서를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여러 차원을 염두해야 합니다. 그 중 첫째가 '역사'입니다. 성서가 쓰여진 당시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일제치하의 처참한 역사를 모르고, 기미 독립 선언서를 읽는다고 생각해봅시다. 마음에 와닿겠습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감이나 잡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당대의 이야기를 아는 것, 즉, 역사를 아는 것은 어떠한 글을 읽을 때나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문학'입니다. 여기 있는 글이 '문학'이라는 사실을 염두해둬야 합니다. '문학'이라는 말은, 생각을 언어로 표현했다는 뜻입니다. "성서는 문학이다"라는 말은 성서가 결코 거짓으로 날조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시를 쓸 때, 한 단어, 한 단어, 고민하고, 선택했기 때문에, 모든 글자 글자가 의미가 있듯이, 이 성서도 문학이기 때문에, 모든 글자와 문장들이 허투로 쓰인 것이 없고,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학적 방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학'입니다. 이 '신학'은 공동체가 성서를 해석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 공동체가 성서를 이해해왔던, 그리고 이해하는 방식이 신학입니다. 성서는 그저 나 혼자 읽고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예수 공동체는 이 본문을 어찌 이해해왔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 세 가지입니다. 정리해봅시다. 역사입니다. 그리고 문학입니다. 마지막으로 신학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이야기를 알아야 하고, 그리고 의미를 표현하려는 문학적 방식을 알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공동체가 이 본문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1. 통행세
이 본문이 쓰여진 당시의 시대상부터 함께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통행료를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
본문에 보면, '통행료'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왕은 누구였을까요? 헤롯입니다. 이 헤롯은 유명하죠. 무엇으로 유명합니까? 아이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던 자로 유명합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로부터 메시아의 출현 소식을 접한 헤롯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헤롯은 유대인은 아닌 에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죠. "메시아가 태어났다" 라는 말에서,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 입니까? 출애굽의 메시아 입니다. 이 출애굽의 메시아는 몇 가지 등장인물들을 필요로 합니다. 고통받는 백성들, 그리고 그 백성들을 구출해내는 왕, 그리고 파라오. 이 출애굽의 왕이 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헤롯은 식겁했겠죠. 왜냐하면 그 출애굽의 이야기가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 자신은 맡는 역할이 불을 보듯 뻔했거든요. 바로 파멸당하는 왕, 파라오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메시아의 출현을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요? 동방박사가 메시아가 태어난다고 말했던 베들레헴과 그 인근 지역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 아이들을 도륙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헤롯이 알고 있었으리라 저는 생각하지만, 이 헤롯이 벌이는 끔찍한 살인은, 그 옛날 어떤 장면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출애굽의 주인공인 모세가 태어났을 때도, 누군가가 유대 사내 아이들을 다 죽여서, 온 이스라엘이 어미들의 곡소리로 진동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나요? 파라오. 헤롯은, 스스로 자신이 파라오와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헤롯의 컴플렉스 였습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에돔 사람이죠. 거기에다 사람들은 메시아에 열광하죠. 어떻게든 진짜 메시아의 출현을 막고, 자신이 메시아의 자리, 유대인들을 통치하는 자리에 눌러 앉아 있으려는 것은 헤롯의 열망이자 컴플렉스였습니다. 메시아 관련된 일만 등장하면 헤롯은 과민반응합니다. 어쩌면 두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홍길동이 나타나는 고을의 사또가 느끼는 비슷한 두려움 말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로 인정받고 싶던 헤롯이 벌이는 또 하나의 쇼가 있죠? 무엇입니까? 제2 성전 리모델링. 스바냐서를 비롯한 예언서들에 기록되기를, 하나님께서 성전을 회복하실 것이라 했습니다. 당연히 메시아를 통해서겠죠. 이것을 모든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고, 헤롯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오실 메시아는 분명 성전을 회복하시는 사역을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 내가 지금 너희를 다스리고 있는 메시아임을 과시하고 싶어서, 막대한 돈을 들여, 제2성전을 리모델링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헤롯 성전'이 만들어집니다. 과부의 두 닙동전 마저도 삼키는 어마어마한 건물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런데 이 헤롯이 죽었어요. 세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것이 미쳐있었던 아버지를 닮은 그 아들들 역시, 유대인들을 다스리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나라는 하나인데, 아들은 세 명이에요. 나라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세 조각으로 나뉘어 집니다. 지도를 봅시다.
이렇게 나눠집니다. 그리고 돈 많은 재벌 아버지 돌아가시면, 그 밑에 있는 형제들은 사이가 좋아요, 안좋아요? 안좋아요. 이 헤롯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지가 다스리는 곳에서, 지 동생 다스리는 곳으로 넘어가려면, 누구든지 통행세를 내게끔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확인해야할 장소가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우리가 저번 주 중풍병들린 자가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내려온 바로 그 지역, 예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유해주신 바로 그 지역,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자유롭게 해주신 바로 그 지역, 예수님의 집이 있는 바로 그 지역, 바로 가버나움입니다. 이 지도의 어디입니까?
헤롯 안디바가 통치하는 노란 지역과, 헤롯 빌립2세가 통치하는 그 사이를 보시기 바랍니다. 갈릴리 호수가 있고, 그 왼편에 "CARPENAUM"이 있습니다. 이 문제의 장소 가버나움!
그리고 이 통행세는 다시 누구에게 전달될까요? 로마에게 전달됩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 헤롯 일가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 꽂아놓은 꼭두각시들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분봉왕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정리해봅시다. 헤롯이 죽었습니다. 아들 세 명 있었죠. 이름은 나중에 차차 외웁시다. 지금 중요한 건 그 아들들이 땅을 세 개로 분할해서 통치했다. 그리고 그 분할된 통치 접경에 가버나움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가버나움을 경유해서 이동할 때는 무엇을 받았다? 통행세. 그 통행세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다? 로마.
2. 세리
그렇게 해서 예수는 많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집에 앉으시게 되었다.
한 가지 더 역사의 그림을 확인합시다. 바로 '세리'입니다. 영어 번역으로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합니다. tax collector에요. 세금 걷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유대인들은 좋아했을까요? 안좋아했을까요? 끔찍히도 싫어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섬기는 이스라엘인데, 그 이스라엘은 지금 다른 이방 민족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족 중에서 누군가가 우리의 돈을 걷어다가 자신들을 불법적으로 다스리는 그 이방민족에게 전달합니다. 당연히 좋아할리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로 치면, 딱 일본순사입니다. 각시탈로 각성하기전 주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볼 레위도 세리였고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삭개오도 세리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돈을 걷어 로마를 섬기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리들의 삶은 정말 비참했습니다. 동족들의 온갖 미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민족의 변절자,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 상종도 말아야 할 더러운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레위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날마다 가버나움 큰 길에 앉아 있습니다. 그 곳으로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레위를 만납니다. 그리고 레위에게 돈을 냅니다. 그러나 곱게 내지 않습니다. 욕을 하고, 인상을 찌뿌리고, 세리에게 손가락질하고, 열혈 유대인들은 멱살을 잡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을 매일매일 겪습니다. 세리의 마음 상태가 어떠했을까요?
왕따 당해본 적 있습니까? 저는 있는데, 진짜 학교가기 싫습니다. 저야 일주일중에 한 번은 학교 안갈 수 있으니까, 다행이었지요. 세리는 그럴 수가 없어요. 눈뜨고 일어나면 유대 땅이고, 그 유대 땅은 자신을 싫어하는 동족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을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을 수 있느냐? 그럴 수도 없어요. 그 사람들 돈 걷으러 나와야 되거든요. 죽을 맛일 것입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 세상의 악을 치유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창조세계에서 악을 소멸하기 위해 싸우는 군사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이 세리를 매도하는 것은, 악을 소멸하고 있습니까? 악을 키우고 있습니까? 물론 이해가 됩니다. 그들이 왜 로마를 미워하는지, 그리고 로마에 동조하는 동족이 어떻게 보일지. 만약 우리가 친일파에게 침뱉는사람들에게 가서, "저 자도 친일파이기 이전에 사람이니까, 저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되요."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왕따 시키는 아이들에게 가서, "저 왕따 당하는 애도 친구가 필요해"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날도 우리는 무수한 세리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세리들을 감싸고, 그 세리들의 친구가 되는 것을 막는 무언가를 만들어둡니다. "저 사람과는 친구하면 안돼" 왜요? 저 사람이 '사람'이면 친구가 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혹시 이런 얘기 못들어 봤습니까? "너 저애랑 친구하지마" 왜요? 무엇 때문에요? 왜 우리는 자꾸 세리들을 만들고, 편을 나누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누군가를 비방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정말 만약, 편을 나누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을, 신의 이름으로 하게 된다면,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영국군이 대치하잖아요? 독일 군인 목사는 독일 병사들의 승리를 기도합니다. 영국 군목은 영국군의 무사한 승리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의 편을 들어주실까요? 양편 다 무사하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걷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 신의 이름이 사용되면,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 됩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성전, 거룩한 전쟁'이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악의 축인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3000명은 미국군인만 3000명입니다. 그보다 30배 이라크의 어린 아이와 민간인들이 포화 속에서 죽어나갔습니다. 이것이 거룩한 전쟁입니까? 이것으로 악이 소멸되었습니까?
A.D. 1세기 유대인들이 세리와 죄인들에게 그러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누군가를 따돌리고 외면하는데에 모든 민족이 참여했습니다.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악이 소멸되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지금 자신에게 맡겨진 신의 뜻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3. 그들과 밥 먹기
그런데 그들과 밥을 먹습니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그 사람과 밥을 먹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미움을 뚫어서, 죽어가는 생명에게 나아가는 한 길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어라 하든, 그 사람을 둘러싼 어떠한 생각들이 있든, 그 사람이 친일파든, 노숙자든, 장애인이든, 왕따든, 내 형제든, 남의 형제든, 누군가가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괴로움 중에 있다면, 모든 인식의 껍데기들을 뚫어내고 그 사람에게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리에게 가시는 그 걸음이 그러했습니다.
그럼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유대인이에요, 그러한 민족 반역자인 세리들과 밥을 먹는다. 어떻습니까? 절대 안먹습니다. 아니, 먹을 수가 없습니다. 세리와 밥을 먹는다는 것은, 나도 로마에 동조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거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로마의 통치를 인정하며, 그래서 세리도 내 친구다." 먹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는 그와 함께 먹었습니다.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밥을 먹는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정말 친밀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음식이 귀할 뿐더러, 이 사람들이 말하는 식사는 오늘 날 우리처럼 후다닥 먹고 치우는 그런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리스의 문화는 전세계의 문화였습니다. 그리스의 식사는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서-거의 눕죠- 먹으면서 대화하고, 서로의 친밀함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그림은 사실 예수님 식사의 그림이 아닙니다. 그저 다빈치의 상상일 뿐이죠.) 어찌되었든, 함께 식사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너와 내가 한 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위대한거에요. 무언가가 식재료가 되기 위해, 비가 와아죠, 적정한 온도가 있어야죠, 햇빛도 적절해야죠, 흙에는 또 누군가가 죽어서 만든 양분들이 있고, 그 양분들을 분해하는 미생물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이 모든 조건 속에서 날마다 조금씩 자라고 커지는 생명들이 누군가에 의해서 채집되고, 길러집니다. 이것들이 다시 여러 장소로 이동을 거쳐, 사람들의 손길을 지나, 각양 각색의, 다른 지역에 있던 생명들이, 한 집의 부엌으로 모입니다. 거기서 또 한 사람의 경험과 지혜로, 더해지고 빼지고 합쳐지고 나눠진 것들이 준비되고, 그것을 이제 한 상에 둘러놓고 우리의 위장으로 넣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 되고, 우리는 그렇게 모든 만물을 통해 힘을 얻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식사의 자리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김지하 씨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 김지하
하늘을 혼자서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것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치고 함께 먹는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중에는 먹보요, 술꾼이라는 별명도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오해가 빚어낸 별명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역이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밥을 먹는다. 그것은 너와 내가, 친구라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밥 먹을 사람들이 없다? 그것은 당신이 외롭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을 수 없다? 그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엉망이라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너와 내가 친구임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함께 먹지 않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함께 먹는 일은 우리의 일상임과 동시에, 신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함께 밥 먹는 일. 이 일은 끼리끼리, 편나누기를 깨뜨리는 일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그럼 우리는 누구와 먹어야 합니까?
4. 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가?
다시 한 번 본문을 읽어봅시다.
다시 한 번 예수께서 바닷가로 나가셨다. 무리가 다 예수께로 왔고 예수는 그들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통행료를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서 예수를 따랐다.
그렇게 해서 예수는 많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집에 앉으시게 되었다. 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는데,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가?"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다. 나는 선한 사람이 아니라 악한 사람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찾아가서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건강하다 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이 선한 사람이다 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치유가 필요하고, 자신이 악하기 때문에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갈망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누구입니까? 세리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세리는 누구입니까? 병들어 있고, 자신의 악함에 괴로워 하는 사람 누구입니까? 충격적으로, 우리가 그 사람과 함께 밥 먹는 것을 통해서, 그는 자유와 치유를 경험합니다.
마치 세리 레위가, 유대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쓰는 마태가 되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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