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우리는 지난 주, 예수의 권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권위'라는 말은 부정적인 늬앙스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권위를 내세운 사람들의 말과 말, 다툼과 경쟁, 그리고 전쟁들이 권위라는 말을 왜곡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권위라는 말을 예수 안에서 찾으면, 권위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권위란 어떠한 것일까요?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더러운 인격을 일소하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권위를 보여주셨습니다. 진짜 권위 말입니다.
그러나 이 권위는 끊임없이 의심을 받아왔습니다. 예수의 모든 사역속에서,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최후의 그 순간마저도 허튼생각은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그 예수의 권위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예수의 권위가 오늘날도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신에게 부여받은 자격으로, 더러운 인격을 치유하며,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습니까? 허튼 생각은 말합니다. "신으로부터 얻는 권위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더 큰 권위야.", "하나님의 권위 말고, 사람들로부터 얻는 권위를 얻어봐.", "나에게 절만 하면, 더러운 인격에서 뿜어나오는 나의 권위를 너에게 주지." 그래서 이 더러운 인격의 말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자신의 전부인 사람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 더러운 인격에 절하고 그것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 예수께서 모든 생애로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신,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에 의해 너무도 분명하게 세상을 바꿔왔던 그 권위가, 오늘날도 우리 자신들에 의해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두 단계의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세상을 바꾸길 원하십니까?" 이 질문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길 원치 않아요. 자기 눈에 아무런 악이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이 장밋빛인줄로 착각하는 소경들이 즐비합니다. 그저 자신만 하루 세 끼 먹고, 평화를 누리고 있으니, 세상을 바꾸는 일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일 수 없습니다. 역동적으로 세상을 바꿔왔던,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위 아래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던 예수의 제자들과는 너무도 다른 삶이에요.
그 다음 단계의 질문은 이것이죠. 만약 당신이 세상을 바꾸길 원하신다면, 어떻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입니다. 예수의 자격, 예수의 능력, 예수를 닮아가는 인간됨. 이것이 진정한 변화의 단초라 믿기 때문입니다. 신의 자격으로 온 이를 인정하고, 그의 능력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을, 자기 자신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에게도 이 일이 번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 무엇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을 함께 읽어봅시다.
나병환자의 치유(1:35~45)
아주 이른 새벽, 아직도 한밤중인데, 예수께서 나가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따라갔다.
그들이 예수를 찾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찾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주변 다른 마을들로 가자. 내가 그곳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이를 위해서 왔다."
그래서 예수께서 갈릴리 온 지역을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구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는 가슴 깊이 감동을 받으셨다. 그래서 손을 뻗어 그를 만지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 원한다. 깨끗해져라!" 그러자 곧바로 질병이 그를 떠나고 깨끗해졌다.
예수께서 그를 곧바로 보내면서 엄하게 경고하셨다.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도록 주의해라!" 그냥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모습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네 자신을 정결케 하고 그들에게 증명해라."
그러나 그 사람은 나가서 여기저기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어찌나 잘 퍼트렸는지 예수는 어느 마을에서도 공개적으로 다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깥 한적한 곳에 머무셨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이른 새벽, 아직도 한밤중인데, 예수께서는 나가서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시몬과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따라갔습니다. 시몬은 예수를 따르지 않을 수 없죠. 바로 앞 내용에서, 열병에 걸린 시몬의 장모를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예수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무수한 사람들이 예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아우성 속에서 예수님은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아주 이른 새벽, 아직도 캄캄한 밤에, 예수는 외딴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해도 뜨지 않은 이 이른 새벽, 시몬과 사람들이 예수를 찾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예수를 발견하자, 말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다급한지 알겠죠? 새벽입니다. 새벽에 누군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죠. 그러나 사람들은 잠도 자지 않고 예수를 만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아이러니를 발견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변 다른 마을로 가자." 왜요? 왜 자신을 찾아 새벽도 마다 않고 찾아온 사람들을 뒤로 하고 예수는 어디를 가시는 것입니까? "내가 그곳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이를 위해서 왔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살려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도 급하지만, 더 급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마을에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즉, 한 마을에 눌러서 사람들을 치료해주시는 것이 아닌, 다른 여러 마을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께 있어서 더욱 다급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온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1. 복음을 전하는 일
'복음'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마가복음의 시작을 기억해내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에, 이 중요한 말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막 1:1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알고 있죠. '이렇게'가 '어떻게' 입니까? 세례요한이죠. 왜 하나님의 복음이 이렇게 시작되어야 합니까? 왜 세례요한부터 언급이 되어야 합니까? 세례요한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세례요한이 예고하는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그저 친절한 서른살 청년입니까? 사람들에게 인기 많은 아이돌입니까? 아니면 힘을 가지고 세상을 뒤집어 엎겠다는 패기 넘치는 혁명가 입니까? 아닙니다. 왕입니다. 즉, 신약의 복음의 이야기가 구약의 마지막 인물인 세례요한부터 기술 되었기 때문에, 신약은 구약과의 연결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그 연결 위에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분은 왕이십니다. 출애굽의 왕이 돌아왔습니다. 왕의 귀환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정한 왕의 귀환을 그 왕 자신이 알립니다.
무수한 민족들의 신화속에서, 인간의 생각과 삶속에서, 신은 너무도 오해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사람을 괴롭게 하는 신, 자신의 아이를 바쳐야 하는 신, 그저 잘먹고 잘살게 해주는 신, 이렇게 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오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오해를 깨뜨리고, 신 자신이, 이 온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가, 이 땅에 현현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이것, 자신이 바로 그 왕임을 알리는 것, 이것이 그 왕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럼, 그 왕이 오셔서 전하시는 메시지는 어떠한 내용일까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왕의 다스림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창조주가 원하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왕의 다스림을 가리켜, 당시의 문화와 사상의 용어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라 부르셨습니다. 즉, 왕의 다스림이라는 뜻입니다. "이 왕의 다스림을 받을 것인가, 받지 않을 것인가",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선언된다. 이것은 왕의 귀환에 대한 소식이고, 이것은 급박하게, 다급하게, "왕의 다스림을 받을 것인가, 받지 않을 것인가" 를 묻습니다.
당시 예수를 많은 사람들이 영접했습니다. 혹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수님 믿고 죽어서 가는 천국가야지"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천국은 없어. 나는 천국 안가도 돼. 예수님 안믿어." 이런 사람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라는 말 자체는 죽어서 가는 어딘가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왕의 다스림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느긋하게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여유있게 미래를 고민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급박한 것입니다. 왕의 다스림을 받아라! 만약 그 왕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인격이 치유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 왕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그 왕의 반역자가 될 뿐입니다. 더러운 인격을 닮아갈 것이고, 그 왕의 반역자인 사탄 걷는 말로를 똑같이 걷게 될 것입니다.
병자들을 치료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왕이심을 알리는 일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께서 왕이시라는 이 복음의 소식 위에서만, 병고침과 귀신 쫓는 사역을 말해야 합니다.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 왕은 모든 악으로부터 사람들을 건져내는 출애굽의 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 앞에서 모든 악은 힘을 잃고, 병들었던 인격은 다시 소생한 것입니다. 그가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은, 그가 진정한 왕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병고침과 귀신 쫓음도, 그가 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지, 그 분의 복음과 상관없이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의미. 그 안에 예수의 삶 전체가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두 글자로 줄이면, '전도'가 됩니다.
2. 전도 : 새로운 권위의 선언
그래서 예수께서 갈릴리 온 지역을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본문은 이후 예수의 행적을 보여줍니다. 그 간의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이렇습니다.
최초 우리는 요단 건너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요단을 따라 올라 갈릴리를 향했습니다. 그 갈릴리 여러 동네 중 가버나움을 자신의 거처로 택했고, 그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더러운 인격에 붙잡힌 자를 구원하셨습니다. 이후, 가버나움에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이 가버나움에서 있던 충격적인 소식이 퍼지고 퍼져, 인근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 새벽길을 마다않고 가버나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 가버나움을 떠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병고침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만나는 충격은, 그가 복음을 전한 장소입니다. 회당입니다.
당시 회당은 어떠한 장소였을까요? 회당은 유대 권위가 집결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림을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토라, 그 토라를 해석하는 종교 지도자들, 그 밑에 회당을 중심으로 사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이 회당에서 만들어진 권위는 어디로 집결하고 있었을까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해석은 어떠했다는 것입니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성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신약은 없겠지만, 구약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구약 해석은 정확히 무엇을 만들어냅니까? 피라미드입니다. 소수에 의해 다수가 굴종하는 구조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구조입니다. 이것을 무엇을 가지고 만들었습니까? 성경을 가지고서 만들었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안겨줍니다. 무엇이 중요하다? 해석이 중요하다.
해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해석, 성령께서 조명해주시는 해석, 인간을 인간답게, 창조의 아름다움과 십자가의 신실함을 반영하는 해석, 해석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해석은 분명히 시작입니다. 어떻게 성서의 말씀들을 읽어내는가? 이것을 통해 어떠한 의미들을 발견하는가? 이것은 시작입니다. 자신의 삶을 바꾸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아주 중요한 시작입니다.
해석을 하지 않는 것은, 천하의 명검을 집에 걸어두고 쓰지 않는 것이지요. 장인이 한땀한땀 만든, 명품 바이올린을 켜보지도 않고 세월에 먼지에 썪히는 것이지요. 성서는 말씀이 검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인격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검인데, 이 검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결코 권장할 수 없는 일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소수만이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틴어를 가지고 성서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오직 사제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민중들은, 사제가 어떠한 설교를 하던지,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해석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고여서 썩는 물과 같이, 소수에게 제한된 해석은 썩고 썩어서, 로마 카톨릭 전체를 병들게 했습니다. 무수한 십자군을 보내어 -십자군에는 소년 십자군도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십자군의 옷을 입히고 적군의 화살받이로 사용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죽이고, 죽임당하는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습니다. 마녀 사냥 당하는 힘없는 여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선언 되었습니다. 돈을 내면 먼저 죽은 가족들의 죄를 없애준다는 면죄부를 파는데, 루터 이전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이 문제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겨졌습니다. 왜요? 해석이 고여 있었고, 그 고인 곳으로 권력의 파리들이 모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위클리프가 (1324~1384) 번역한 성경 중 남아 있는 170권중 하나
위클리프라는 사람이 성서를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화형당했습니다. 루터가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서를 해석하는 일, 이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 불과 몇 백년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서를 읽을 수 없도록 제한하는 국가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유대 회당. 거기에 해석이 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그 인생을 저당잡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악행에 신의 이름을 뒤집어 씌웁니다. 이 거지같은 일이 좋아보이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렇게 인간의 권위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거짓된 권위의 한 가운데에 예수가 서 계십니다. 복음을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왕이 왔다고 소리치십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도를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도'는 복음을 가리키는 초대교회의 용어였습니다. 즉, 전도는 도를 전하는 것, 곧 복음을 전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왕의 귀환 소식을 전하는 일이고, 그 왕의 다스림을 따라 사는 길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는 기존의 권위 가운데에서 새로운 권위를 선언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진정한 권위가 선언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언은 곧, 이전에 사람들을 저당잡고 있던 권위에 대한 도전, 아니, 세상 권세에 대한 사형선고가 됩니다. 진정한 왕의 귀환 소식 앞에, 거짓 왕은 설 자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건, 돈이든, 명예든, 복음이 선언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모든 거짓왕들의 속박에서 벗어난 진정한 인간됨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됨은 반드시 이러한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3. 가난한 사람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구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전도하셨습니다. 회당의 한 가운데서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제한된 해석이 만들어낸 권위의 중심에서, 예수는 새로운 권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자격과, 힘과, 하시는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들에게 해석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더러운 인격에 사로잡혀, 왜곡된 인격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인격의 온전함을 맛보게 되었고, 몸이 병들어 인간됨이 무너졌던 자들 또한 인간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신기한 마술사나 기적의 치료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권위는 언제나 이러한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병이 걸렸다면, 그 사람은 모든 사회 활동이 정지됩니다. 논리는 이러한 것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은, 죄가 있는 사람, 죄가 있는 사람은 참 유대인이 아니지. 그렇다면, 병은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겠군. 너 아웃.
복음서에 등장하는 소아마비환자,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한센병자, 귀신들린자들은 거지입니다. 모든 사회 활동이 정지되었기 때문에, 돈을 벌수도 없고, 인간 대접도 못받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 거지입니다. 병에 걸려 돈을 벌 수 없으면, 오히려 이 사람들의 생활을 돌보아주고, 이들이 다시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필요했음에도 -성서가 분명 그러한 부분을 언급하고 있음에도- 제한된 해석, 권력자들의 해석은 결코 그들을 도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류인생, 인간 이하로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겪는 아픔은 단순히 배고프거나 돈이 없는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병자들 만큼이나, 개 취급 받으며 살아가던 부류들이 고아와 과부입니다. 당시 과부나 고아들은 성서에 과부와 고아를 먹이라는 말씀이 너무도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창녀들도 마찬가지이죠. 몸을 팔아서 번 돈이라도 굶어 죽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밥을 먹는다고, 돈이 있다고 결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죠. 진짜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장지글러라는 유엔 자문위원이 <탐욕의 시대> 라는 책에서 브라질 북부 판자촌을 소개합니다. 그 곳은 저녁만 되면, 엄마가 빈 솥에 돌을 넣고 끓입니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언제 밥먹어?" 그럼 엄마가 대답하죠. "조금만 기다려. 곧 될거야" 아이들이 계속 엄마에게 밥 달라고 보챕니다. 엄마는 계속 똑같은 답변을 해줍니다. 그러다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이 지쳐 쓰러져 잠이 듭니다. 그러면 엄마는 솥에 불을 끓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저자는 말합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먹일 수 없는 어미의 수치심을 우리가 알겠느냐고 말입니다.
문제는 수치심입니다. 유대와 아랍 사회에서는 돈보다 명예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수치심을 무릅쓰고 남에게 빌어서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과 동일하게 받아들여 집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어떤 아저씨가 구걸을 하러 왔어요. 그런데 교회 장로님이 그 아저씨를 붙잡고 훈계하시는거에요. 왜 사지 멀쩡한 사람이 일을 안하고 구걸하느냐, 그렇게 살면 되겠냐며 언성을 높이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제가 보고 있다가, 아저씨, 얼마 필요하세요. 물었어요. 아저씨가 5000원이라고 그러시길래, 5000원 드렸습니다. 그 날, 장로님한테 혼났죠.
그러나 한 사람이, 사지가 멀쩡하던 젊던 떠나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서 도와달라고 하기까지, 그는 수치심도 무뎌져 버릴 만큼 무언가 충격적인 일을 겪었을 것입니다. 예전 영등포 쪽방촌에 갔었는데, 그 때 머리가 히끗히끗한 어느 할아버지가 저한테 굽신굽신 대면서 하신 말씀을 잊을 수 가 없어요. "젊은이, 나 라면 하나만 사주시게" 라면 하나에, 자신의 수치심을 버리는 노인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 날 라면 사드렸는데, 몇 번이나 인사하시면서 고맙다고,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나의 따끔한 한 마디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어요. 특히 교회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센병 환자가 등장합니다. 뻔합니다. 이 사람 거지입니다. 수치심을 버렸습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마을 밖에서 격리되어 살아갑니다. 인간다운 대접 받지 못하고, 인간 이하로 살아가는 이 사람. 그리고 이 사람에게 회당에서 선언된, 왕의 귀환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 다음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까요?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구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는 가슴 깊이 감동을 받으셨다. 그래서 손을 뻗어 그를 만지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 원한다. 깨끗해져라!" 그러자 곧바로 질병이 그를 떠나고 깨끗해졌다.
예수께서 그를 곧바로 보내면서 엄하게 경고하셨다.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도록 주의해라!" 그냥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모습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네 자신을 정결케 하고 그들에게 증명해라."
이 나병환자에게 벌어진 일은, 그저 병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모습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네 자신을 정결케 하고 그들, 즉 제사장들에게 몸이 나았다는 것을 증명하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토라에, 모세오경에, 병이 나았을 경우, 제사장에게 보여서 그것을 인정받으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즉, 제사장에게 몸을 보인다는 것은, 이제 유대 사회 안에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받는 것입니다.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수치심을 본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사회 정의의 회복입니다. 사람이 정말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로 뭐 어쩌자는게 아니라 말입니다.
또한 이것은 예수께서 율법 자체를 비판하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자주 인용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비판의 칼날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으로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종교 엘리트들의 해석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반응형
'복음서, 예수의 도전 > 마가가 목격한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2:13~17 : 1먹 - 그들과 밥먹기! (0) | 2013.11.05 |
---|---|
마가복음 2:1~12 : 다섯친구 이야기 (1) | 2013.11.05 |
마가복음 1:21~34 : 권위의 3요소 = 자격 + 힘 + 목적 (1) | 2013.11.03 |
마가복음 1:14~20 : 역사의 전달자가 말하길,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1) | 2013.11.03 |
마가복음 1:9~13 : 세례, 자신을 찢음으로 이루겠다는 약속 (4) | 2013.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