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33~36
1. 본문
[1] 아, 깊도다!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여!
그의 심판은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은 찾아낼 수 없네.
[2]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으며,
누가 그와 '더불어 논하는 이'가 되었으며,
누가 그에게 미리 드려져, 그의 보답을 얻으리요?
[3] 이는 만물이 그에게서 나와서 그를 지나 그에게로 감이라.
그 드러남이 그에게 세세토록, 아멘.
[1] 희랍어 시간에 본문을 맡았는데, 절묘하게도 이 본문이다.
Ὦ βάθος πλούτου
καὶ σοφίας καὶ γνώσεως θεοῦ·
ὡς ἀνεξεραύνητα τὰ κρίματα αὐτοῦ
καὶ ἀνεξιχνίαστοι αἱ ὁδοὶ αὐτοῦ.
깊도다가 βάθος다. 희랍어는 유성음이기 때문에 모음은 유동적이고, 자음은 붙박이다. 이 점을 생각하면, '깊도다'와 'bathos'는 'ㅍ도'가 겹친다. 신기하지 않은가? 뭐 어원상 그러한 것은 아닐지라도, 외우는데 편하잖아. 뒤에 나오는 πλούτου 역시 '플루투'와 '흘러'의 유사성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이다.
왜 바울이 '지혜'와 '지식'을 나누어 말했는지도 생각해보자. '지식'과 '지혜'는 서로 대립되거나 무관한 두 가지가 아닌, '하나'에 대한 두 가지 양상을 가리킨다. 마치 동양의 음과 양같다 할 수 있을까? 음과 양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음이 있어야 양이 있고, 양이 있어야 음이 있다. 양은 발광체라면, 음은 반사체다. 함께 빛나는 것은 한 빛이 있기 때문이다. 지헤와 지식도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지식이 여러 시대에 관하여, 여러 공간에 관하여 앎이 확장되는 수평적 차원의 것이라면, 지혜는 수직적 차원. 위로부터 오는 깨달음이다.
'깊음'과 '흘러넘침'의 관계도 그러하다. 깊음과 흘러넘침은 일상에서 같이 쓰일 수 없잖은가. 깊으면 흘러넘치지 않는다. 그러나 마치 지식과 지혜와 같이, 바울은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보여주려는듯 하다. 옆으로 흘러넘치는 것이 수평적 차원이라면, 깊음은 수직적 차원이다. 그런데 깊으면서도 흘러넘치니, 수평과 수직의 만남이요, 곧 중심, 가온이다. 음과 양의 하나됨이다. 하늘과 땅의 만남이다. 하나됨.
ὡς 이후 두 가지가 이 "깊고도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부연한다. '심판'과 '길'이다. 심판은 κρίματα인데 뒤에 '마타'는 "~한 것"이다. 또한 글자가 'ㄱㄹ'으로 시작하니 우리말로 '옳고 그름을 갈라 놓은 것' 이라 생각하면 좋겠다. '판단', '심판'이라 번역되는 크리노스라는 단어는 '제3자의 판단'을 뜻하는 단어다. 곧 신의 판단이요, 그의 모든 판단은 곧 심판이다. 왜냐하면 그의 판단은 수평적 시간을 잘라 어떤 순간이나 최종적 국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심판이 벌어지는 시간과 장소는 곧 '가온'이다. '가온'은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그 지점을 말한다. 야곱이 광야를 헤매며 험난한 인생을 살다가도, 그의 인생에 해답을 발견한 것은 벧엘의 사다리 아래에서 였다. 가온이다. 깊고도 넓은 바로 그 차원,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으로의 진입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러하다. 흔히 심판은 부정적인 단어로 여겨지지만, 이것은 제3의 판단자를 거절하려는 그른 맘에서 나온 생각이다. 인간 스스로 주인됨이다. 자기 인생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전권을 쥐고 판단하려 함이다. 그러나 둘로 분열되어 찢긴 인간에게, 이 선하신 제3의 판단자가 너무도 절실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를 찾아야 한다. 그를 생각하고 찾는 그 시간, 그 자리가 가온이 된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수평적 시간은, 하나님의 수직적 판단에 의해 모든 찰나가 재단된다. 과거의 일이나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금이다. 지금 그의 최종판단이 이뤄진다. 그는 모든 시간을 잘라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신다. 지금이다.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의 판단에 옳다 인정 받는 것이 곧 믿음이요, 심판자는 이것을 '의롭다' 판단하신다. '지금' 믿는 것이 곧 나에 대한 영원한 판단이다. 내 마음 자리가 가온이 되어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십자가가 된다. 그 자리가 신이 거하시는 시은좌요, 피뿌려진 자리다.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수평적으로만 걷던 인간은 새로운 차원을 만나 없던 길을 보게 된다. 마치 <설국열차>에서 폭발로 뚫린 옆 길과도 같다. 수직과 수평이 만난 그 가온에서부터 걷는 새 길이다. 이러니 이 길은 인간이 아무리 많이 걷는다고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아무리 생각을 많이 한다고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 재단이요, 가온이요, 새차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주권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영생이요, 나에게서 현시대를 끝장내고, 오는 시대가 나에게 이미 와버린 것이다.
ἀνεξεραύνητα 을 잘라보자. ἀ/ν/εξ/εραύνητα 'not/thematic vowel/from/조사하다' 즉 "조사를 가지고는 도달할 수 없는" 이라는 의미다. ἀνεξιχνίαστοι 도 ἀ/ν/εξ/ιχνίαστοι 'not/TV/from/발자취' 즉 "발자취를 더듬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이라는 의미다. 그 분의 '길'과 '생각'이 그러하다. 조사와 더듬어 뿌리를 찾는 것으로는 그 분의 생각을 다 알 수 없다.
[2]
τίς γὰρ ἔγνω νοῦν κυρίου;
ἢ τίς σύμβουλο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ἢ τίς προέδωκεν αὐτῷ,
καὶ ἀνταποδοθήσεται αὐτῷ;
'누가'로 시작되는 문장 세 개.
νοῦν 을 '생각'이라 풀었다. 유출설 : '헨(하나)-누스-푸쉬케-퓨시스'.
σύμβουλος 는 '함께/논하는 이'
ἀνταποδοθήσεται 는 'anti상대/로 부터/받다('디도미'의 수동태)'
첫번째 질문은 "누가 그의 '생각'을 알까?" 이다. 여기서 '생각'은 '누스'라는 단어다. 옛 희랍 사람들은 '헨(하나)'로부터 '누스(생각)'이 나고, '누스'에서 '푸쉬케'가 나고 '푸쉬케'를 통해 사물의 '퓨시스(본성)'가 난다고 생각했다. '헨'이 곧 태극이요, 창조주라면 '누스'는 만물을 있게 한 생각, 곧 창조의 계획과 목적이라 하겠다. 뜻이다. 그런데 누가 이 창조의 뜻을 알았는가? 피조된 당신은 알고 있는가? 존재의 이유. 삶의 나아가야 할 그 새차원의 새 길.
두번째 질문은 "'누가 더불어 논하는 이'가 되었는가?" 이다. 서로 논할 때는 둘이 되기 쉽다. 니 의견, 내 의견으로 갈라져 옥신각신하는 것이 일상다반사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의견을 나누며 논할 수 있는 이가 어디에 있을까? 여기에서 욥기의 향기를 느낀다. 창조주는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욥에게 "니가 창조의 뜻을 알아?"라고 되물으셨다. 하물며 욥 마저도 이러했는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와 함께 창조를 생각하며 이뤄갈 자가 있겠는가?
세번째 질문은, "누가 그에게 미리 드려져 보답을 얻겠는가?" 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답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과 세계의 새로워짐이다. 불교는 인간의 인식이 잘못되었다 하고, 막시즘은 브루주아가 착취하기 좋은 사회 체제가 문제라 한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의 문제만으로 접근했을때, 문제는 해결의 초점을 잃어버린다.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에게 당신의 인식이 문제이니, 그 인식을 버리면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다수의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 사회 시스템을 온통 뜯어 고치면 문제가 해결 되겠는가? 그렇지 않다. 사람은 한 사람도 버릴 수 없다. 폐기 처분이 아니라, 새로워짐이다. 곧 인간도 새로워져야 하고, 세상도 새로워져야 한다. <성서>로 말하자면 부활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 두 가지가 있어야 참 소망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답'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인한 개체의 부활이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로워지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것이 누군가가(tis) 미리 드렸기 때문에 보답으로 얻어진다 한다. 누가 무엇을 드렸는가? 아니, 그 전에 이 일이 정말 이뤄지는 것이 확실한가?
그렇다면 하나님께 먼저, 미리, 앞서(희랍어 '프로') 드려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것으로 인해 인간과 새로워짐의 보답을 얻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인간과 세계의 새로워짐 곧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었기에,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죽고자 전진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사람과 세상을 새롭게 하신다는 하나님을 고디 믿었기에, 아무런 보답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 속에서, 악을 선으로 갚기 위해 먼저 자신을 내어놓는 그 한 사람 말이다. 그렇게 자신을 드렸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도 그를 믿으셨다. 그가 인간과 세계의 새로워짐을 위해 자신을 내놓았을 때, 하나님은 그 믿음대로 일하셨다. 이것이 '언약'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내놓았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키시고, 그의 부활은 곧 세상을 새로이 창조하시는 신호탄 삼으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사람을 믿으므로 인간과 세계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 보답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의 드려짐 십자가. 그리고 부활.
앞서 두 가지 질문은 과거형이었으나, 마지막 질문은 미래형이다. 왜냐하면 아직 보답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만이 이뤄졌다. 이제 남은 것은 남은 사람들의 부활과 세상의 새로워짐이다. 이것을 위해 너 자신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인간과 세상의 새로워짐을 믿지 않으면, 이 일을 위해 헌신할 수 없다. 목적지가 분명하면 그 걸음도 분명하다. 부활과 새새창조를 믿으라.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도 당신을 믿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앞서 말했던 가온이다. 수평적인 인간의 차원과, 수직적인 하나님의 차원이 만나 새 길을 연다. 그 길은 새창조의 길이다.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하는 길.
[3]
ὅτι ἐξ αὐτοῦ καὶ δι’ αὐτοῦ καὶ εἰς αὐτὸν τὰ πάντα·
αὐτῷ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자주보던 전치사의 조합이다. 출애굽으로 이해해야 한다 말했던 그 조합 ἐξ διa’ εἰς . 각각 '출처'와 '과정'과 '목적'을 나타낸다. 그리고 앞에서 봤던 내용들을 조합해보면 이 출애굽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 출애굽의 시작(ek)은 가온에서 십자가로 죽고, 부활로 새로나 이 현시대로부터 출(出)하는 일이다. 나는(出) 것이다. 새창조로 나는 것이다. 거듭남이다.
그럼 새로 난 이는 어디로 가는가? 그는 길을 걷는다. 그 길은 via dolorosa 예수의 길이다. 하나님을 굳게 믿어, 인간과 새로움을 향해 가는 새차원의 길이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말하고, 걸으나 완전히 다르게 사는 삶이다. 외부의 고난을 은혜로 바꿔버리는 정수기 필터같은 길이다. 끝내는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는 길이다. 길을 걷다 길이 되신 그 분을 밟고 걷는 길이다.
그 길에 끝에 부활하신 그가 계신다. 곧 그로 새로이 태어나, 그와 함께 걸어, 그에게 가는 길이다. 이것이 예수로 인해 열린 새로운 출애굽의 정체요, 하늘과 땅이 만남이다. 그 경계는 찢어지고 우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산다.
모든 만물이 그러는 중에 있다. 로마서 8장에 "창조세계가 산고를 겪는다"는 말은 이것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영광'으로 끝난다. '영광'은 곧 '드러남'이다. 그가 드러난다. 마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을 통해 결국 드러나는 것이 예수이듯, 오늘 새로이 태어나 새로워지며 마침내 새로워진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난다. 그들은 청지기다. 이들과, 이들로 인해 마침내 제질서를 찾은 만물과, 이러한 이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을 덮는다. 그 자리에 죽음은 없다.
개역성경에서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를 '세세에'로 번역한 것은 기가막힌 일이라 생각된다. 직역하면 '시대들'이다. 이 '시대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대인들의 세계관 속에서 두 가지 시대가 있다. '현시대'와 '오는 시대'. 그런데 그 시대들 전체를 관통하여 드러남이 있다. 즉 악이 지배하는 현시대든, 마침내 정의가 이뤄지는 오는 시대든, 모든 시대는 하나님의 눈 앞에 있으며, 현시대는 한 사람을 준비했고, 오는 시대는 한 사람이 낳는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함께 논하며, 하나님께 드려진, 그 사람이 빚어가시는 새 창조, 곧 둘째 아담을 통해 벌어지는 새 역사.
정리해보자.
첫번째 문단을 한 글자로 요약한다면, 지금이겠다. 수평과 수직이 만나 시간이 잘리는 찰나. 하나님의 판단이 이뤄지는 순간. 바로 지금이다.
두번째 문단을 한 글자로 요약하면, 그 '누가'의 주인공인 예수다. 그가 하나님을 알고, 그가 하나님과 의논하며, 그가 하나님께 드려졌으므로.
세번째 문단을 한 글자로 요약하면, 새창조다. 나도 만물도 그를 통해 새로나서, 그를 지나, 그에게 가서 완성된다.
지금, 예수, 새창조. 여기에 빠진 것이 하나 있다면, 당신이다. 당신을 통해 지금 예수의 새창조가 벌어진다. 하나님의 약속이니 신뢰할만하다. 당신에게 현시대가 잘려나가고 오는 시대가 이미 시작된다. 다른 것 아니라 이것을 '믿음'이라 부른다. 하나님이 당신을 옳다하시는 바로 그 순간이다. 당신이 이것을 믿으면, 결국 당신이 믿는 바대로, 인간과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되리라. 영광이다.
3. 제소리
11444日. D-33. 44433이라니! 희랍어 시간에 맡은 본문이 공교롭게도 로마서 강해 순서와 절묘하게 맞아 들어갔다! 열심히 연구하라는 뜻이리라.
11446日. D-31. 고작 9일을 참았을 뿐이다. 그것도 온전히 참지 못했다.
너는 사사롭(446)기 그지 없다. 이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러나 다시 하나의 생각을 바라보자.
11447日. D-30. 어제 성경이와 연구하다가 여러 통찰들을 얻었다. 감사했다. 사는 일이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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