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1~5
[1]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가까이서 부르고 있어요.
하나님의 갸륵히 여기심을 통하여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세요.
이러한 제사가 이치에 걸맞는 여러분의 예배입니다.
[1]
* 가까이서 부르고 있어요 : '파라.칼레오'. 파라는 '곁에서', 칼레오는 '부르다'. 개역성경에서는 '권하다'로 되어 있다. 훈계하다, 청하다, 요구하다, 초청하다 등 다양한 뜻이 있다. 어쩄거나 '가까이에서 부르는 것'이다. 왜? 가까운데 부를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이유는 하나다. 가까워도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잡고 있음에도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아직 뭔가 남았으니까, 더 말해야하고, 훈계해야하고, 권해야하고 그런 것이다.
바울은 가온으로부터 뻗어나가는 새 차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지척에 있는 사람들은 그 길을 알지 못하고, 다른 길로 간다. 그래서 몸은 가까이 있으나,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일수는 있으나, 하나된 길로 함께 걷지 않으니, 그 가까움은 가까움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부른다.
*갸륵히 여기심 : '갸륵하다'는 '하는 일이 착하고 장하다' 라는 의미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가까운 곳에서 손짓하고 있는 길은, 하나님의 갸륵히 여김을 받는 길이다. 이 길을 지나야 한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갸륵히 여기시겠는가? 다른 때 아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때다.
또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그 순간이,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순간이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우리의 신실함은 같이 간다. 긍휼은 한 마음이다. 그 분이 우리와 한 마음되지 않고서야 우리는 실천할 수 없다. 그래서 '긍휼'은 '갸륵'이고, '갸륵'은 다시 '거룩'과 연결된다.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 여기서의 몸은 영혼과 분리된 육의 차원이 아니다. 영혼과 몸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고는 고대의 이단이다. 우리의 영은 몸을 떠나서는 기능할 수 없다. 몸이 없는데 어찌 보고 느끼겠는가? 바울이 말하는 몸은 곧 '자아'다. '살몸'이 자신의 생존만을 바라는 이기적 자아였다면, 몸은 그러한 부정적 늬앙스가 없는 그저 '나'를 뜻하는 말이다. 즉 '너 자신을 제사로 드려라'.
이 제사를 설명해주는 말들이,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2. '거룩한', 3. '산'이다.
1은 드려진 제사의 결과요, 2는 드려지는 과정이며 3은 드려지는 제물의 성격이다.
너의 '산'을 드려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3절에서 '산'과 '살'을 구분하고 있다. 아담은 '산 영'이요. 그리스도는 '살려주시는 영'이다. ㄴ과 ㄹ의 차이는 확연하다. 하나는 소멸해가는 생명이며, 다른 하나는 미래로 뻗어나가는 생명의 근원이다. 너의 '산'을 드려라. '산'은 곧 나의 생존이요, 살리지 못함이요, 말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물됨, 곧 그 앞에서 죽음이다.
하나님 앞에 너의 '산'을 드리면, 그는 '살'게 해주시고, '살'리는 삶을 살게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가신 길, 거룩한 길이다. 거룩은 죄와 무관한 하나님다움이다. 그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 처럼 사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죽을 줄 알고 드려진 제물이, 다시 죽음을 밟고 일어나, 사람과 창조세계 회복시키는 바로 그 일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우리의 전부를 드린다. 우리가 가진 전부 중의 전부는 몸이요, 곧 나다.
*이치에 걸맞는 여러분의 예배 : '이치에 걸맞는'은 개역에는 '영적'으로 되어 있다. 본래는 '로고스에 맞는'이라는 의미다. 로고스는 말씀임과 동시에 우주 창조의 이치요 질서다. '질서 잡힌'이라 한 것은, 우리가 위에 말한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걸맞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걸맞고, 사람과 자연 사이에 걸맞는 삶이다. 이치에 맞고 질서 잡힌 삶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예배라 부른다. 하나님께서 부르시어 우리에게 하게끔 하시는 것은 예배다. 그러나 지루하게 주일 낮예배를 평생 드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예배는 삶이다. 질서 잡힌 삶이다. 이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믿어 나를 드린다.
[2] 이 '현시대'의 습관과 외모를 닮지 마세요.
오직 생각을 위로부터 새롭게 함으로 변신 되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해보고 인정하는데 이르세요.
그 뜻은 하나님을 닮아 좋고,
받아들일만 하며,
온전한 목적이 있습니다.
[2]
*현시대 : 유대인들은 두 개의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현시대, 다른 하나는 오는 시대. 정의가 승리하고, 올바름이 인정받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시대가 바로 '오는 시대'. 예수로 인해 현시대 속에서 오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현시대와 오는 시대가 중첩된 시절. 곧 현시대는 막을 내리고, 오는 시대가 완전히 구현될 것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습관과 외모를 닮지 마세요 : '쉬스케마티조(쉰+스케마)' 라는 단어를 쓴다. 접두어 '쉰'은 '함께', '스케마'는 '환경과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는 외형이나 습관'을 말한다. 따라서 '쉬('ㄴ'탈락)스케마티조'는 현시대의 외형과 습관을 닮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희랍어 사전을 뒤지다보면, 신약성경에만 나오는 단어라고 표시된 경우를 더러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울도 '파자'를 통해 단어를 새로이 구성하여 의미를 표현했다는 얘기다.)
현시대는 죽음을 양분삼은 시대, 말라버릴 시대다. 하나님 없이 살아보자는 시대다. 이러한 현시대가 사람을 규정해버린다. 내가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잘 생각해보라. 당신은 현시대에 갖혀 있는가? 아니면 그 현시대 너머 새로운 시대를 이미 맞닥뜨렸는가?
하루를 내가 어찌 사는지 잘 적어봐야겠다. 그 속에 현시대를 닮은 것이 있다면, 과감히 잘라내야겠다.
*마음을 위로부터 새롭게 함으로 변신되어: '아나카이노시스'. 접두어 '아나'는 '위', '다시'라는 의미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난다'라 번역된 단어도 '아나'가 들어간다. 또한 '생각'이라 풀어놓은 단어는 은 이전에 살펴보았던 '누스'다. 즉 너의 누스를 위로부터(혹은 다시) 새롭게 하라는 것이다.
그럼 '생각을 위로부터(다시) 새롭게 함'이 무엇인가? 회개다. 예수의 첫 말씀. "회개하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왔느니라." 내 생각을 버리고 하늘의 생각을 품음이다. 현시대를 내어놓고 오는시대를 받음이다. 이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가?
'변신'이다. '메타.모르포'라는 단어를 쓴다.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 이야기>의 '변신'이 이 '변신'이다. '메타'는 '바뀜'이고, '모르포'는 형태다. 삶의 형태. 시간 속에서 공간 위에 규정되는 삶의 모습. 바울은 앞서 현시대에 의해 만들어진 '스케마'를 닮지 말라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새로운 '형태'로 바뀐다 했다. 즉 바울의 생각 속에서 '스케마'는 모르포시스'로 바뀐다. 그 사이에 '누스를 새롭게 함'이 있다.
현시대의 생각을 버리고, 새시대의 생각으로 살면, 정말 삶의 모든 부분이 바뀐다. 변신이라 해서, 팔 하나가 더 생기고, 키가 더 커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 속에 놓인 우리의 몸이 새롭게 사는 것이다. 몸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완전히 달라질 것이 약속되어, 내가 선택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현시대의 기준으로는 담아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는 시대의 삶이다. 이것이 곧 변신이다. 금전 관계, 가족을 대하는 태도, 교우 관계, 진로와 직업 선택, 날마다 자고 일어남, 먹고 마심이 새 기준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해보고 인정하는데 이르세요 : 그리고 그 변신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전치사 '에이스'를 쓴다). 현시대의 외모와 습관을 버리고, 하늘의 생각을 받아, 자신의 삶을 변신시켜 사는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분별'은 '도키마조'라는 단어를 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시험해보아 인정한다'이다. 생각해보라. 자신의 뜻이 옳은지 그른지 사람들이 시험해보기를 바라는 하나님이라니! 게다가 해봐야 인정할 수 있는 뜻이라니! 대충 글줄께나 읽는다고 자랑하고, 다른 사람보다 유식하다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해봐야 참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해보지 않고 인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 속의 관념에 기댄 것이지 하나님께 기댄 것이 아니다! 이 구절 앞에서 나는 한 없이 작아진다. 해보지 않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아예 길을 잘못 든 것이다.
해보자. 그 뜻은 하나님을 닮아 좋고('아가토스'는 '헤가데오스' 즉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말에서 왔다), 받아들일만 하며, 온전한 목적(텔로스)이 있다. 우리는 오늘을 어찌 살 것인가?
[3] 나에게 주어진 '찢겨진 두 차원을 잇는 그 인격'으로
내가 여러분 중에 있는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마땅히 생각해야할 것에 대해 자만하지 말고,
오직 '중용'에 이르도록 마음 먹으세요.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신실함의 척도에 따라 나누신대로 하세요.
[3]
*아침 일찍 커피숖에 왔다. 월요일날 적어놓은 본문을 보고 생각에 잠긴다. 오늘 나는 누구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오늘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생각을 주실까? 그 생각을 어찌 이 땅에 구현할까? 제자리에서 쳇바퀴도는 것 같은 광야 같은 삶인데, 그럼에도 분명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 길은 내 발밑에 내는 것이 아니라, 내 맘에 내는 것이라 외치는 소리가 있다. 그래서 다시 쓰고 생각한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자.
* 찢겨진 두 차원을 잇는 그 인격 : 나는 이 단어를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리스토스'라는 단어인데, 예전에 이 단어를 설명했던 적이 있어 인용해본다.
그런데 베풂이 있다. 이 말은 희랍어 '카리스'인데, 곧 '거저줌', '드러난 아름다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카리(감사), 카라(기쁨), 카리스마(선물) 같은 말들이 파생되었다. 게다가 이말은 '그리스도'와 라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카리스의 속격이 '카리스토스'인 것. '크리스토스'와 모음 하나 차이.
카리스나, 크리스토스나 X로 시작한다는 점을 생각해본다. 교차다. 엇걸림이다. 거저주며,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감사가 터져나오고, 기쁜 그 순간에는 무언가가 교차되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카리스토스의 크리스토스'인 예수는 고로 '교(交)차인'이다. 그는 두 가지 차원을 하나로 묶는 가온이다. 두 가지 이질적인 것을 사귀게 하는 미지수 X 값인 것이다.
X는 교차다. 엇걸림이다. X가 양쪽을 연결했고, 스스로 중심이 되었다. 그 X는 무엇인가? 나는 그간 모든 문제가 '2'에서 발생한다고 말해왔다. '자연과 인간'을 둘로 갈라놓은 개발지상주의, '나와 너'를 찢어놓은 이기주의, '영혼과 몸'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고대의 이단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둘로 갈라놓은 죄.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하나됨을 모른채, 잘못된 중심을 따라 찢겨있다. "하늘과 땅의 이혼 상태." 이러한 문제 속에서 사람은 기껏 추구한다는 하나됨은 전체주의요, 그 반대는 서로 잘났다 싸우기만하는 개인주의일 뿐이다. 모래알 같은 무력한 개체로 남던지, 회반죽이 뭉뚱그려져 비인격으로서 전체에 참여하던지, 이 양자택일이 우리에게 거칠게 요구될 뿐이다. 생존을 인질로 잡힌채.
그런데 이 와중에 X가 있다. 그 X는 자연과 인간을 이어, 나와 너를 이어, 영혼과 몸을 이어,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
'이'+'어'는 '예'다. 모든 찢겨진 것을 이을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무력이나 마술이 아닌 '인격'이다. 그 X는 무엇인가? 모든 찢겨진 것을 이어내는 그 힘있는 인격, 곧 하나님의 인격이다. 개역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은혜'라 풀어놓았다. 우리말로 하면 '베풂'이다. 이 베풂은 적선인가? 선의인가? 아니, 그 보다 크다. '차원연결'이다. 두 차원 사이에 '엇걸림'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함이다. 하나(님)의 인격으로만 그리 할 수 있다.
* 자만하지 말고 : '자만'이라 풀어놓은 말은 '휘페르.프로네오'. 라는 단어를 쓰는데, '휘페르'는 '위에', '너머'라는 의미의 동사전철이고, '프로네오'는 '여기다, 생각하다'. 그래서 '자만하다'가 된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높게 생각하는 것이다. 바울은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몇몇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말을 전한다. "자만하지 말아라!" 그들이 왜 자만해졌는가? '마땅히 생각해야 할 바' 때문에 자만해졌다. 옳은 일을 생각하다가, 이 생각을 품은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선을 긋고 새로운 계급을 주창하게 된 것이다. 옳은 뜻을 주신 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옳은 뜻을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이다. 곧 스스로 우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얼마나 쉽게 보는가? 다른데도 아닌 내 안에서 말이다. 무언가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이 생각을 나의 소유처럼 여겨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를 나누어 찢어버리는 이 졸렬한 귀족 의식 말이다. 그것은 잘난 것이 아니라,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었는데, 그 생각을 품은 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니 말이다. '하나됨'을 생각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지, 나와 너를 찢어놓는 가위질이 될 수 없다.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 중용 : 자만하지 말고, "오직 중용에 이르도록" 생각해야 한다. 생각의 목적은 자만이 아닌, '중용'이다. 개역성경은 '지혜'로 풀었다. '소.프로네오'라는 단어다. '소'는 '소조'에서 왔다. '구원'이라 번역되는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보존'이다. '프로네오'의 기본 의미는 '횡경막'이다. 후에 생각이나 감정과 같은 인간의 내면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럼 '소프로네오'를 무어라 풀면 좋을까. 구원과 마음. 균형잡힌 생각. 요새 <향연>을 읽고 있는데, 선생님은 '중용'이라 푸셨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심. 류영모 선생은 중용을 우리말로 '가온찍기'라 했다.
가온찍기는 무엇인가? 중심을 바로 잡음이다. 중심은 로마서 11:33~36에서 보았던,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이 만나는 자리, 곧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자리, 하나님 거하시는 시은좌다. 곧 내 속이다. 마음이다. 여기가 바로 가온이요, 중심이다. 이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다. 그래서 인내천(人內天)이다. 내 삶의 중심으로 하나님을 모셔오고, 그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되신다. 내 가온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그 안에 그리스도 살아 사심이다. 이 자리에서부터 '지금'이 시작되고, 하나님의 의롭다하시는 새로운 판결이 이뤄지며, 새 삶이 흘러나온다.
그 분이 내 맘의 중심이니, 내 몸 삶 역시 어디로도 치우침이 없다. 이런 의미의 중용이다. 곧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다.
* 신실함의 척도 : 하나님이 각 사람을 '신실함의 척도'에 따라 나누셨다. 우리는 앞의 본문에서 찢겨진 두 차원을 잇는다 말했다. 분열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레 단어를 사용하는 바울을 보라. 그런데 여기서 신실함을 척도삼아 사람들을 나눈다. 그럼 다시 계급을 만들고, 차별을 조장하는 것인가? 신실함으로 사람들을 가위질하여?
아니다. 오해하면 안된다. 사람이 나누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누신다. 그것도 사람이 어떤 수단으로도 잴 수 없는 근거로 말이다. 하나님이 이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신다. '신실함'. '믿음'. 그의 판단과 나누심은 분열과 차별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풍성한 다양성과, 그 다양성으로 더욱 영광스러운 하나됨을 이뤄가신다.
'신실함', '믿음'은 다른 말이 아니라, 일단은 '그의 대화상대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신실한 자에게 말을 거신다. 그리고 하나님께 신실한 자 역시 끊엄잆이 하나님께 말을 건다. 서로가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으며, 대화하고 소통한다. 그렇게 주고 받은 말에 서로가 신망있게 반응한다. 하나님은 그의 하신 말씀에, 사람은 그가 올려드린 기도에. 그리고 바로 이 신실함을 따라, 각자에게 삶의 영역을 떼어 주시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것처럼. 이것이 '믿음의 척도로 나누셨다'는 말의 의미다. 따라서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상황은, 그 분과의 신실함을 표현하는 장(場)이다.
따라서 이 '신실함의 척도'는 계급도 아니고, 차별도 아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대화하는 이 수직적 삶의 중심은, 예수를 믿는 모든 자에게 동일하다. 다만 수평적 차원에서 다양성이 생긴다. 그 분과의 인격적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대로 살 각자의 삶이 주어지는 것이다. 각자의 재능과 체질에 맞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주셨다. 하나님은 말단 사원을 세심히 살피는 그런 CEO다.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러니 모든 상황 속에서, 가온찍기로 나아가라. 수평과 수직이 만나는 그 중심으로 새 차원을 열어가라. 나에게 '찢겨진 두 차원을 잇는 인격'을 부어주심은 그 때문이니까.
[4] 우리가 하나의 몸 안에 많은 부분들을 가진 것처럼,
공동체에 속한 모든 가족들이 하나의 직분을 갖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되어,
서로 다른 이들이 그 한 몸을 따라 몸의 부분이 되었습니다.
[4]
하나의 몸 : 많은 부분 = 그리스도 공동체 : 속한 사람들
이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가 함께 가는 그림을 잘 보라. 세상의 문제는 '둘'이라 했다. 모두가 부분으로 잘개 쪼개지든지, 아니면 개성은 무시된 채 전체로 뭉뜽그려지든지(이러한 전체주의도 하나를 부르짖지만, 결국 거대한 둘을 만든다) 둘 중 하나다. 그러나 그렇게 '여럿'이 되든 '하나'가 되든 그것은 인간의 희망이 될 수 없다. 거짓 하나는 둘이다. 지금은 돈으로 하나된 '거짓된 하나'고,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는 '답없는 여럿'이다.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할당하신 믿음의 척도대로 하라 했다. 즉 믿음의 척도대로 하나님께서 나누신대로 하는 것은 차별이 아님이 오늘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개성이 다른 각각의 사람들을 하나의 직분(기능)으로 뭉뚱그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러고 있지.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아, 다른 자아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한 기능으로 뭉뚱그려버렸다. 구매 없이는 살 수 없는 매매의 노예가 되었다. 돈 버는 것을 유일한 직분으로 남겨 놓은채. 교환가치가 없어서 교환하지 못할 미래를 두려워하며, 이 매개물을 얻고자 목적없이 달려가도록 만들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은 믿음의 척도대로 사는 삶이 아니다. 인간이 소망할 바도 아니다.
희망은 몸에 있다. '한 몸 됨'이다. 몸에 각기 다양한 부분들이 있지만, 이 부분들은 '나'라는 '하나의 자아'를 이루어 기능한다. 그래서 몸에는 다양성 안에 총체성이 있고, 총체성 안에 다양성 있다. 우리는 우리 몸을 보고서 세상살이를 배워야 한다.
몸 없이 '자아'를 말하려는 숱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몸없이 자아에 대해서 말함은 사변이요, 망상이요, 현실과 무관하다. '자아'는 무엇인가? 무(無)로부터 시작하여, 시간의 지평 위에서 경험하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 없이는 '나'를 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몸으로 겪은 경험들이 '나'를 이뤄간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지금'이요, 시간의 끝자락에 서 있다. 그러면서도 몸은 각기 분열되어 떨어지지 않는다. 몸의 부분들은 '나'라는 하나의 인격 안에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먼저 몸과 인격이 하나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죽을 몸'이 '영원을 바라는 자아'와 하나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몸을 자아로부터 끊어내는 것으로 자아를 이루고자 했다. 종교들의 고행과 수행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몸이 죽을 몸이 아니라면? 다시 살 몸이라면? 자아의 완성은 몸을 버림이 아니라, 몸을 다시 얻음으로 부터 얻어진다.
인간이 몸과 별개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잘못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미래소망이 될 수 없다. '몸'없이는 '나'도 없는데, 신체성과 물리성을 빼놓고 어떠한 미래 소망을 논할 수 있는가? 몸이 없어서 사랑하는 이를 끌어안을 수도 없는 영혼의 세계를 갈망하는가? 그러나 성서는 그러한 미래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사람들이 자기 몸만 돌보고 가꾸느라 생명이 죽어나가는 현실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몸은 몸인데, 지금같지 않은 몸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움을 몸이다. 그 몸을 믿음으로 겪는 새로운 경험. 그 경험 속에서 몸과 맘이 통일되어 이뤄가는 새로운 자아. 곧 부활이다.
이 부활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더 큰 하나됨을 이룬다. 이러한 하나됨이 곧 '가족됨'이다. '가족됨' 역시 '거대한 몸 됨'이다. 인격이 통일된 사람들이, 또 하나의 더 큰 몸을 이루어, 각기 부분으로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자아 안에서 통일을 이룬다. 이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더 큰 자아는 히틀러의 자아나, 천황의 자아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의 자아다, 곧 성령이다. 이 하나님의 인격 안에서만이 사람의 다양성이 보존될 수 있다. 또한 사람의 다양성은 각기 목적없이 흩어지지 않고, 영원한 하나의 지향점을 얻을 수 있다. 인간됨이 그 안에서 더 분명해지고, 그 인간들 속에서 하나님됨이 더 뚜렷해진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의 부분 되었다'는 말은 부활에 참여한다는 말이다. 이 부활의 삶을 사는 이들의 모임이 곧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다. 그의 생각을 가온에 찍어 중심 삼고, 죽음을 극복하는 자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 나다. 이는 곧 각기 인생으로는 거듭남이요, 인류로는 새 역사다. 이러한 공동체를 통해서 이 새역사의 선봉에 예수께서 이 땅을 걸으신다. 드러났으니 영광이요, 우리에겐 기쁨이다. 그렇게 그가 오늘 그가 몸으로 부활하신다. 우리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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