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곡식 가루와 떡덩이는 하나님께 처음 드려지는 거룩한 제물이다. 이 유대제사에 등장하는 것들을 사용해서 문장을 시작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지금도) 가지고 있는 오해와, 실상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제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실컷 주장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이 첫 곡식 가루라 말하고, 떡덩이라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다.
자신들을 거룩하다 주장하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꺾여져 나갔다. 그 증거는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멸시하고 죽이고자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들의 굳은 마음과 삐뚤어짐 때문에 온 민족에 예수가 전파되는 결과가 벌어졌다. 마치 아름다운 나무에서 본래 있던 가지들이 잘려 나가고, 그 자리에 야생 올리브 나무에서 잘라온 가지들이 접붙임 당한 모습이다. 아름다운 올리브 나무는 곧 하나님 가족이요. 야생 올리브 나무는 이방이다. 잘려나간 가지는?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가족된 이들이 도리어 이스라엘을 멸시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데, 너희는 예수를 믿지 않는 폐역한 사람이라 손가락질하고 자신들이 이스라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남을 손가락질 하는 것과 자신을 자랑은 한통속이다. 손가락질이나 자랑은 모두 너와 나를 나누는 '둘'이기 때문이다. '하나'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 가족들이 이스라엘과 자기 자신들을 나누어 '둘'을 말한다. 자랑하고 손가락질 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람과 사람 사이를 둘로 나눌 수 있는 그 어떠한 기준도 없음을 기억하라. 만일 내가 자랑할 수 있다면, 내가 아니라 그 뿌리 뿐이다. 모든 사람이 접붙임될 수 있는 그 나무 밑둥만이 모두를 하나되게 할 수 있으므로, 이 뿌리를 자랑하는 것은 좋은 자랑이다. 그러나 당신은 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
가지들은 말한다. "이스라엘이 잘려 나갔기에 오늘날 제가 하나님 가족 되었습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잘려 나갔는가?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가족 되었는가?
'믿음'이다. 예수를 믿고 따름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잘려나가도 할 말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고 따름에는 배제가 없다. 모든 사람을 끌어 안는다. 예수는 제3의 길이다. 또한 좁은 길이다. 하나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오솔길이다. 모든 사람이 손을 잡고 그 좁은 길을 함께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예수를 믿고 따른다 하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누는 무언가 잘못된 기준을 붙잡고 있는다면, 당신은 이스라엘의 과오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베푸심과 엄격함을 보라. 그는 예수를 믿고 따르려는 자들에게는 무한히 베푸신다. 그들에게 그 날 먹을 생명들과, 본성을 거슬러 살 수 있는 실천력과, 내가 할 수 없던 일을 해내갈 수 있는 부활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이 거룩한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고집하는 자들에게는 엄격하시다. 그들이 잘 될리 없다. 지금 잘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끝은 결국 둘이요, 누군가를 죽이고, 죽임당할까 두려워 인격이 말라버리는 삶이다. 망이다.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길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엄격히 대하시는 것은 그 분이 우리의 참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금 왜 사는 줄 모르고, 본성을 거슬러 참되게 사는 실천력이 없고, 당신의 미래에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 당신의 길은 어긋나 있다. 그리고 당신 역시 이 일로 인해 괴로워한 나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혹은 이것이 인생이라 체념하며 무감각해져 있거나. 당신은 분명 길을 어긋나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엄격하시다. 왜냐하면 그 분은 그릇된 길로 가는 아이를 엄격히 대하시는 참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길을 돌아서 아버지께 돌아가면, 지금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이 역전된다. 마치 탕자와 같다. 그가 실컷 무언가 해보고자 살아갔을 때, 그를 덮친 것은 목적 잃은 삶의 애달픔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께 돌아갔을 때 모든 것이 역전 되었다. 탕자가 이후 공허하고 인생의 의미를 몰라서 다시 가출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고, 상상할 수도 없다.
[3]
아버지의 마음을 보라. 아버지는 가지를 잘라 죽이고자 함이 아니다. 그는 가지가 뿌리로부터 흘러나오는 양분의 가치를 알아, 참되게 살기를 바라신다. 즉 이스라엘'도' 믿기만 하면 언제든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면 참 인간다움을 얻을 것이다. 이방인들이 그렇게 구원을 얻었듯, 이스라엘도 예수의 뿌리로부터 양분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도 예수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힘이다.
당신의 힘은 무엇인가? 무언가를 '실컷'할 수 있는 끈기? 자기 삶을 꾸려나가는 추진력?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 진정한 힘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실컷 얻더라도 죽음은 모든 것을 가져갈 것이다. 자기 삶을 열심이 꾸려나가도 그 삶은 죽음의 종착역에서 멈추게 될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더라도 죽음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진정한 힘은 사랑하는 힘이요, 원수마저도 끌어안음이요, 누구와도 하나됨이요, 이 힘은 죽음을 넘어선다. 하나님의 힘은 부활이다. 그는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생각을 뒤집어보면, 그들의 돌아옴은 이방 사람의 돌아옴보다 더 턱이 낮을수도 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들의 구원을 불가능이라 말할 수도 없다. 이스라엘은 이 아름다운 나무에 원래 붙어있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야생 올리브 나무에서 잘려, 전혀 다른 나무에 접붙임된 이방인들이지만, 그들은 본래 그 나무의 가지들이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의 구원을 논외로 할 수 있겠는가?
다시 첫문장으로 돌아가보자. 하나님께 드려진 첫 열매(제물). 지구가 무너져도 쓰러지지 않을 영원한 나무밑둥. 당신은 그 분에게 접붙임 되었는가? 이 분께 접붙임되는 것을 거절할 사람 누구인가? 거절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3. 제소리
11439日. D-38. 거룩한 나무밑둥. 밑음은 바닥소리. 그 분께 본성을 거슬러 접붙임. 뿌리 외에 자랑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