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본문은 분명,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로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시 남은 자가 등장한다. "반면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말로는 '남은 자들'과 '나머지 사람들'이 비슷하지만, 원어로는 전혀 다른 단어다. 전자는 '레임마'를 쓰고 후자는 '로이포이'를 쓴다.
'레임마'는 영어의 remnant다. 남은 자.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머리에 인 사람들이다. 어제의 말을 인용하자면, "아버지의 일. 곧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 전체를 살리는 일. 아버지의 이름을 닦아드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한 "나머지 사람들"은 렘넌트가 아니다. 이들은 택하심을 거절한 사람들, 렘넌트가 되기를 거절했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전체를 돌보는 일을 원치 않고, 자신이 속한 집단이 다른 사람들을 밟고 일어서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다. 마치 메시아를 월드컵에 나선 축구팀의 스트라이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메시'는 '메시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르헨티나만을 위해서 뛰기 때문이다. 자기 편의 승리만을 위해 사는 사람, 이것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자신의 국가가 스포츠에서 졌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사람들을 보라), 전체가 뵈지 않는 사람들. 이들이 '나머지 사람들'이다. 이 나머지 사람들에게 예수의 구원은 엉뚱한 구원으로 비칠 수 밖에 없다. 이방인에게 용서를 베푸는 예수는 자살골을 넣는 메시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게 보는 사람은 구멍난 인격. 눈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당파심 때문에 생명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물과 식물을 죽여 위장에 넣고선, 그것을 태워 생기는 칼로리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덫과 돌뿌리를 준비한다. 그러나 그들이 준비한 부비트랩에 걸리는 것은 정작 자기 자신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척추가 굽었다고 했다. 척추는 몸의 중심이다. 그 척추가 굽은 것은 중심이 굽은 것이다. 곧 인격의 등뼈 굽음. 惡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쫓고 있는 것의 정체가 이것이다.
[2] '남은자'가 보는 이스라엘
바울은 이스라엘의 반전을 말한다. 예수를 믿은 이후, 줄곧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스라엘 안에서 반전의 실마리를 찾는다. 바울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스라엘의 악함 속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요셉의 형들의 악함을 은혜로 바꾸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악함 속에서도 분명이 역전의 하나님이 두신 뜻이 있을 거라 확신한다.
이스라엘이 죄없는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로 몰아세운 것 때문에, 이스라엘 너머에까지 구원의 소식이 알려졌다. 오늘 한국 사람인 내가 유대 선지자 이사야를 읽는다.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 다 이스라엘의 삐뚤어짐이 가져온 결과다. 우리는 흔히 "이건 결과론적인 얘기인데" 라는 말을 쓴다. 결과론적이 아니라, 모든 결과에는 뜻이 있고, 그 결과를 만든 과정이 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인생에서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가면서 온다. 나쁜 일 속에는 좋은 일의 실마리가 들어있고, 좋은 일 속에는 나쁜 일의 단초가 심겨있다. 밧세바와 간통한 이후 그가 쓴 시편이 51편이다. 반면 모든 것이 좋은줄만 알았던 솔로몬의 말년이 전도서다.
문제는 끝이다. 그 끝이 어떠할까. 0과 1이 반복되는 2진법 코드처럼, 선과 악이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 그 끝은 어찌될까? 악이 결국 승리하고, 모두는 분열하고 피폐하게 되어, '결국 신은 없었어'라는 푸념으로 인류와 지구는 멸망할텐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분이 나타나,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끝내고, 선을 온전하게 이루실 것인가. 바울은 후자다. 나 역시 후자다. 그리고 이 후자의 끝을 믿는 이들은, 현실의 밀려드는 악 속에서도 그 속에 심겨진 좋음의 씨앗을 본다. 그리고 결국 선이 이긴다. 하나님이 이긴다. 지금 내 앞에 거센 파도의 끝은 잠잠함이다.
이스라엘의 삐뚤어짐 속에서도 그들의 돌아옴을 그려보는 것은 그러한 의미다. '이스라엘의 삐뚤어짐 때문에 민족들이 복음으로 풍성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돌아옴은 얼마나 풍성할까?' 바울의 결말에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들의 풍성함이 있다. 그들과 손잡음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듯이.
[3] 전체 속 나의 의미
이러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 바울의 현실은 분명하다. 그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다. 그러나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 해서 이방인들만의 득세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는 메시를 따르지 않고 메시아를 따른다. 모든 사람을 포함한(심지어 원수마저도) '전체' 안에서 자신의 의미가 있다.
그의 임무는 이방인의 인간다움이다. 구원이란 말은 보존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 형상에 대한 보존과 발전 그리고 완성이다. 이것이 '구원'의 의미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본래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 온전함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이것은 본래 이스라엘이 그토록 갈망하던 바로 그 구원이다. 마음이 완악해진 그들을 향한 바울의 전략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다시 그 구원을 갈망하도록 하는 것이다. 손에 창을 들고서 우리 민족만이 세계 제일이라소리치는 거짓 구원을 버리고서 말이다.
나머지 사람들인 이스라엘 안에도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바울은 제도나 켐페인이나 정치적 액션으로 자신의 직분을 감당하지 않았다. 언제나 남은 자. 이방인에게 나아가는 그의 머리 속에 '이스라엘 안에서 남은 자를 찾는 것' 이라는 목적이 뚜렷했다. 즉 이방인에게 나아가나 유대인과 이방인 전체를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사고 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자끄 엘륄의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만일 이스라엘의 거절함이 세상의 평화가 되었다면,
이스라엘에게 나아가 손내미는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부활 이해다. 그는 죽어서 나중에 새몸을 입는 부활만을 말하지 않았다. 기독인은 믿고, 세례를 받아, 부활한 사람으로, 죽음과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즉 부활은 현재다. 부활은 지금이다. 원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것이요, 곧 부활이다.
그러니 찾자. 우리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 나와 자꾸 부딪치는 사람. 사회가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사람. 모두가 피하려는 사람. 나를 핍박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나아가자. 손 내밀어 한 가족이 되자. 가족되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도 그 가족이 되고 싶어서 질투할 만큼 인간다움을 이뤄가자. 이것이 부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