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들이 '지혜롭다'여기는 지식은 무엇인가? 둘로 예리하게 나누는 지식이다. 지식이 전문화되면 될수록 세밀하고 정밀하게 분류하고 분석한다. 복잡한 통계에 따라서 사람들을 분류하는 통계학자나, 사람들의 복잡한 심성을 낱낱히 파헤치는 정신분석학자나,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사람들의 군을 나누는 사회학자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세밀하고 정밀하면서도, 나누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되게 한다. 너와 내 속에서 날이 선 메스로 죄를 걷어내고, 너와 내가 같은 분에게서 나왔음을 마음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알게 한다.
아마도 초대교회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자신들을 분리시키며, 마치 이것을 '복음'인양 착각하고 지혜롭게 여겼던 것 같다. "하나님, 우리는 저들과 다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말이다. 그런데 정작 이 기도는 예전 유대인들이 많이 했던 기도지. 복음은 "유대인의 특권을 이방 사람들이 대체한 것"이 아니다. 원수조차 품고 하나됨이다.
바울은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가짜 지혜를 '비밀'로 갈아 엎는다. 이 '비밀'이라는 단어는 고대 밀교 입회의식에서의 신비체험을 뜻하는 말이다. 바울이 비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우주 가족이 되는 그 시작에는 반드시 '이것'이 옳다는 지적 동의와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 그 비밀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마음이 굳어졌다. 마음의 굳어짐은 완악함이라 번역된다. 마음에 다른 생각이 가득차서 단단해졌고, 하나님 모실 공간이 전혀 없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로 가득하니, 마음 속 올곧음은 그 다른 것들에 눌려 꺽이고 휘어있다. 마치 돌밭에 피어난 씨앗과도 같다. 그런데 그 '비밀'은 그 마음 굳어짐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와 내가 분리되고 끝장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비밀은 찢겨져 다시는 연결될 수 없을 것 같은 극악의 상황 속에서의 하나됨이다. 곧, 구원이요, 용서요, 아버지 뚜렷이 드러냄이다. 부활이다. 이것이 알고 겪어야 할 비밀이다. 하나님 가족의 입문 의식이다. 제도적으로는 세례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부활은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다. '온 이스라엘'의 참 의미는 '나만', '우리만'이 될 수 없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는 하나님의 우주 가족이다.
[2] 바울은 성경을 인용한다. 시온에서부터 '흐르게 된 이'가 오신다! 이 '흐르게 된 이'는 누구인가? 개역성경에는 '구원자'로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에는 분명 '흐르다'라는 'ㅎ뤼오'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 바울이 인용하는 구절은 이사야 59장 20절이었는데, 아마도 여기서 '구속자'라는 단어를 보고 그렇게 번역한 것 같다.
이사야 59: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그러나 그 윗절을 보면 왜 바울이 '흐르게 된 자'로 말했는지,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사야 59:19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즉 '흐르게 된 자'는 '하수 같이 오실 이'다. 이 흐르는 물처럼 오실 이는 말 그대로 living water! 그가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서게 하는 일이다. 그들의 죄악들을 베어버리고(할례와 같이) 없애버리는 일이다. 이러한 일이 이뤄질때마다 이것은 흐르게 된 자의 언약 성취다. 그 언약의 성취는 우리도 흐르는 자가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도 2분법에 찌든 세상 속에서 속속들이 사이로 스며들며 세상을 회복시킨다. 최후에는 나의 몸과 세상이 회복된다.
지난 인류의 역사는 반유대주의에 미쳐 살았다. 중세는 말할 것도 없고, 근대에 들어와서도 600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한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심지어 정의의 강물로 흘러들어야 할 기독인들도 이에 동조하여 나치를 묵인하고 그랬다. 유대인들을 미워하며,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건 사탄의 현시였다.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서로 죽이게 하는 일이 사탄의 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러나 유대사람들을 미워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고 바울이 이미 2000년 전에 말했다. 하나님의 거저주심과 부르심에는 고쳐야 할 과거 따윈 없다. 이스라엘의 부르심에도 뜻이 있고, 이방인을 부르심에도 뜻이 있다.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뜻이 무엇인가?
[3] 개역성경에는 '순종하지 않다'로 번역되어 있으나, 원어는 '설득되지 않다'다. 우리가 전에 살펴봤듯이 '순종하다'는 '잘 듣다'이다. 개역성경을 번역할 당시는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현대인에게 '순종하다'과 '설득되다'는 늬앙스가 많이 다르다. 따라서 성서를 원어에 비추어 고쳐 읽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설득되길 원하신다. 이스라엘이 설득되지 않음으로 다른 민족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설득되었다. 설득됨은 곧 하나님의 긍휼을 입음이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되는 복음을 받아들임이다. 하나님을 따라, 사람과 자연과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삶, 곧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당신은 그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는 복음에 설득된 사람인가? 둘을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를 말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온통 그 '하나됨'을 위해 남은 숙제들이다. 희망의 단초들이다. 복음을 굳건히 믿는다면, 이것도 믿어야 한다. 바울이 이스라엘의 돌아옴을 믿듯이 말이다. 결코 설득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될 것을 꼭꼭 믿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부정할 때 조차, 모든 사람을 설득하시는 곧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인류는 하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제소리
11442日. D-35. 하나님. 나에게 흘러오시는 정의. 설득되는 나. 하나를 붙잡는 삶과 삶. 연결. 하나됨.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