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그런 일 없다. 이 일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무엇인가? 바울 자신이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기 떄문이다. 그는 혈통상으로도 아브라함 계보요, 앗시리아에게 포로로 끌려가지 않은 남유다의 베냐민 출신이다. 그야 말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갖춰야할 것은 죄다 갖췄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인 그가 하나님꼐 버림 받지 않았다. 사람들의 끊임없는 살해 위협과 폭행 속에서 살아왔던 바울이었지만, 그는 사랑으로 연결된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그 어떤 것도 끊어놓을 수 없노라 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더불어 하나님을 결코 놓지 않는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바울이 동족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핍박받는 그로 인해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간에서 핍박받기. 고로 양쪽을 연결하기.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면서도 사람이신 분과 같다. 그가 왜 고초를 감당하시는가? 그 분은 세상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2] 그는 엘리야 이야기를 인용한다. 엘리야가 홀로 바알 선지자 850명을 상대한 이후, 그 역시 동족의 살해위협 속에 두려워 떨었다. 세상에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 하나 없고, 악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은 죽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고발하고, 자기 자신 하나만 남았다고 한탄할 때,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7000명이 남아 있다."
엘리야는 "아, 고작 7000명이요?" 하지 않았다. 7은 완전수.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 엘리야가 이 말을 믿고,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신을 죽이려는 동족들에게 나아간다면 엘리야도 하나님 일을 이루는 저 완전한 사람들 중 하나다. 그러나 자기 밖에 안남았다고 생각하고 좌절하면, 그는 여기까지다. 이러한 엘리야의 이야기를 보며 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3] "내가 남은 자다."
바울은 엘리야의 이야기를 하고서는 "이와 같이"라고 말했다. 바울이 끊임없는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줄기차게 하나의 진리를 설한 것은, 자신이 '이 새로운 시절' 속에서('뉜 카이로', 모든 시간의 순간들은 항상 새롭다) 자신이 남은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스페인과 로마로 걷기를 멈출 수 없고, 세상의 헛된 철학에 무릎꿇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이 바로 그 칠천명 중 하나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 남은 자들이 목숨을 내걸어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특정 사람들의 성공?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아니다. 아버지의 일. 곧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 전체를 살리는 일. 아버지의 이름을 닦아드리기 위해! 이 일을 위해서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이다.
이 글을 읽는 기독인들이여! 우리가 남은 자로서 살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찌 될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과 발인데,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더럽힐 뿐, 세상을 새롭게 하는 남은 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다시 못을 박아 넣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만약 이 말안듣는 손과 발 때문에, 예수께서 더이상 가난한 이의 머리에 손 얹어주실 수 없다면, 더이상 그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실 수 없다면 어떻겠는가? 온 몸 던져 그의 일을 해야 않겠나?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양쪽을 연결해야 않겠나? '아버지 이름의 거룩'만을 갈망해야 않겠나? 우리 맘에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맘이 다 있잖아. 그런데 우리가, 아니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글을 읽는 비기독교인들이여!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함에 동의하는가? 만약 동의한다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만약 그렇게 하다가 위기와 역경을 만나면, 당신이 그것을 극복해야 할 당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의 남은 자'라는 정체성이 없이, 당신이 세상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동기는 무엇이고, 기대하는 그 결말은 무엇인가? 만약 있다면 말해주시라. 그러나 나는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의 이름 없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이 어떤 동기에서 오는지, 어떤 결말을 기대하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신뢰할만한지.
기독인도 틀렸고, 비기독인도 틀렸다는 양비론을 말하고자함이 아니다. 교회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모두가 근원으로 돌아가자. 너도 나도 남은 자가 되자. 그러나 우리가 되고 싶다면 될 수 있나? 노동으로 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될 수 없다는 말이냐? 아니, 모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남은 자로서의 정체성이 은혜로 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저 오기 때문이다! 오직 카리스. 엊걸리는 역사의 교차점에서. 하나님 아들이 나를 위해 대신 죽고 사셨다는 그 충격적인 사실을 믿음으로 당신은 세상에 진리의 표본으로 남는다.
다같이 하나님의 남은 자가 되자! 이것을 위해 한 분 아버지께 돌아가자. 은혜(카리스)는 곧 선물(카리스마)이라, 자신의 맘을 돌이켜 거저 주시는 아버지께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 길 밖에 없는 것은 인색함이 아니다. 아버지께 향하는 이 길만이 삐뚤어진 인간성을 곧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아버지가 이 길만을 두셨다. 또한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한 나신 아들의 발자국을 그 길 위에 미리 새겨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