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바울은 "주여, 도대체 누가 우리가 전한 바를 믿었습니까?" 하는 이사야의 한탄을 인용했다. 이사야의 이 한탄은 누구에 대한 한탄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한탄이다. 바울이 9,10,11장에서 "이스라엘은 버림 받았는가? 하나님은 불의하신가?"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을 놓쳐선 안된다. 이스라엘은 한 분 하나님 소식을 예나 지금이나 안믿으려 한다. 그럼 문제는 무엇인가? 저 위의 과정 속에서 어느 부분에 끊어짐이 있는가?
3번에 문제가 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말숨과 노래가 들리지 않는 곳은 없다. 심지어 이슬람에도, 심지어 북한에도, 심지어 아직도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부족들에게도 이 소식은 전해졌다. 2050년이면, 성경 번역 사역이 종료된다 들었다. 글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 저기 예수의 소식은 흔하게 들린다. 노아때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다 늙은 노인네가 축구장 세 개를 이어붙인 것 만한 배 만드는 소식은 아마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만한 소재였을 것이다. 다들 비웃든 경탄하든 이 소식을 몰랐던 고대인은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불뱀에 물려 다들 죽어갈 때, 하늘 위에 들린 놋뱀을 보라는 소리 못들어본 환자가 어디 있을까? 다만 고집 부렸을 뿐이지. 나는 저딴 배 안타. 놋뱀은 봐서 뭐해. 부활을 내가 모르면 어때.
[2] 이스라엘은 분명히 들었다. 다만 고집 부렸을 뿐이다. 그들이 들은 것을 애써 밀어내는 동안, 이스라엘 바깥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믿어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르밧 과부, 나아만 장군, 나오미의 며느리 롯, 기생 라합.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계 대표 민족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음에도, 그 죽고 사는 새 삶을 믿어 하나님께 나아왔다. 이사야가 '담대하게' 말했다고 바울이 말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러한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었을 것이다.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오히려 이방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용기를 갖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스데반이 죽었다. 모든 사람이 예수께 나아올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말했기 때문에.
흔히 종교를 문화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유대교 위에서 정초되었고, 유대교를 벗어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흐름이 요새의 추세더라. 물론 유대교의 토대 위에서 더 분명해지는 사실들이 있겠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문화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본다.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았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이 발견되고, 하나님께 묻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는 현상. 예를 들면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디오티마의 경우다. 이 여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다. 이 여자의 얘기를 소크라테스가 했고, 플라톤이 전했다. B.C. 4,5세기 사람이라, 이스라엘 역사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노자는 또 어떠한가? 노자는 정말 줄곧 예수님 얘기다. 그가 말하는 참된 인격, 그리고 그 인격의 근원에 대한 통찰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 닿아있다. 그럼 이것을 나는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유대교, 불교, 유교, 도교, 그리스 철학을 나는 열쇠구멍이라 생각한다. 유대교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인격'을 그려왔고, 불교는 그것을 '비어있다'고 말했다. 유교는 '나에서 나라 전체에 이르는 한 진리'를 말했으며, 도교는 인간이 하고자 하는 것은 다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 다양한 종교적 생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열쇠구멍을 이룬다. 그리고 그 열쇠구멍은 사람 모양으로 생겼다. 인격이 구현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탐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열쇠구멍에 딱 맞는 사람이 한 분 계시다. 그는 글자를 넘어선 율법의 완성이요, 마음을 비운데서 그치지 않고 그 맘을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시며, 자신에서 시작해서 온 우주를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하고자 하심을 이루신 분이시다. 이 분이 열쇠에 들어맞으심으로 인류는 낡은 현시대를 넘어 새시대로 돌입한다. 자물쇠가 풀리어, 서로 잡아먹던 옛 시절은 끝나고 새 곡식창고가 열리는 것이다. 요셉의 꿈처럼.
[3] 그리고 하나님은 아직도 손을 내밀고 계신다.
자신을 거절하는 여자에게 자존심 다 버리고 그 앞에선 남자처럼,
수치심도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두 손 내밀어 구걸하는 거지처럼,
왜 온세상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기에 민망하기만 한 손을 오랫동안 내밀고 기다리시는지.
재벌에 비할 수 없이 부유하신 그 분은 짝사랑 중이시다. 그 분은 구걸 중이시다.
사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당신을 얻고자.
3. 제소리
11431日. 재벌 나와 인생역전 하는 드라마들. 그 같잖다고 돌려버리던 채널 속에서도 말숨소리 노래소리는 전해지고 있었다. 아 그 옛날, 신데렐라, 콩쥐팥쥐에서도. 부활하는 신데렐라, 부활하는 콩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