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줄에서 말하는 '그들'이란 앞 절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의 '누구든지'다. 이 누구든지가 어떤 누구든지인지 바울은 밝힌다.
그들은 과거에 한 분 하나님을 부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 분에 관해서 들어본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듣지 못한 것은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보내심 받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 맨 아랫 줄에서 사태가 뒤집힌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셨기에(그래서 '열 두 사도'다. 사도는 '보냄받은 자'라는 뜻) 전해주는 사람이 생겼고, 전함을 들었기에 들을 수 있으며, 들었기 때문에 믿고서 하나님을 외쳐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이 '누구든지'다.
예전에 썼던 것을 인용하면,
*좋은 소식 : 새로운 왕이 등극했다는 소식. 당시 로마는 인구 문제와 식량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새로운 통치자가 나타나서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 점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인지라, 자신들의 기나긴 포로생활을 종결내줄 새로운 왕이 나타나기를(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왕을 '메시아'나 '그리스도'라 부른다) 고대하고 있었다. 그 왕이 나타나났다는 소식이 '좋은 소식'.
'좋은'은 우리말 '잘'로도 풀 수 있는데, 곧 여러 문제 속에서 '하나님처럼 잘 하는 것'이다. 즉 '좋은', '잘'이란 말은 실제적인 문제 해결이다. 하늘의 관점으로 넓게 보아 땅의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그 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새로운 왕은 그러한 왕이시다. 하늘에서 군림하기만 하는 왕도 아니고, 땅에서 무력한 왕도 아니다. 하늘로부터 와서 땅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왕이다.
[2] 그런데 이 소식을 사람들이 귀담아 듣지도 않는다. 바울은 마음이 답답하다. 그런데 이 답답함은 바울만의 것이 아니었다다. 바울은 같은 이유로 답답해 하는 이사야를 만났다. 여기서 '귀담아 듣다'라 풀어놓은 것은 개역성경에는 '순종하다'라 되어 있다. 순종을 굴종처럼 여겨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정말 큰 오해다. 예전 풀이 해놓은 것을 역시 인용한다.
*잘 들음(순종) : 순종의 본래 뜻은 '아래서 들음'이다. '휘파under+쿠오listen'. '경청'이다. 잘 듣고, 들은 것을 잘 생각해보고, 그 들은바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충실함은 곧 믿음(신실함)이다. 그러니 먼저 순종이있고, 이후 믿음이 있다. 순종은 강요가 아니다. 오히려 부드럽게 설득되어감이다. 고개를 끄덕임이다. 진실을 듣기에 그렇다.
말씀을 잘 들어, 그 말씀으로 자신의 속을 꽉 채우려는 자가 누가 있는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찾으신다.
[3]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바울과 또한 지금 그의 편지를 받아보는 바로 이 사람들이다. 또한 우리다. 바울이 말한다. '충실함(믿음)은 들음(순종)에서 나며, 이 잘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숨(레마)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것(dia)'. 이 말을 뒤에서부터 따라가 보시라.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그 사건의 주인공의 말숨을 잘 듣는다. 그 말숨을 자기 속에 채워 충실하게 산다. 바로 그 사람이, 이사야가 그토록 찾던, 바울이 그토록 찾던 사람이다. 그리고 이 '하나의 사건'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고로 이 편지를 받아드는 수신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어 그토록 찾고자 하셨던 바로 그 사람이다. 역사는 이 사람 찾기를 학수고대했다. 이사야가 말했던 "누가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믿겠습니까?" 그 '누가'가 바로 당신이다.
이것은 어떠한 논리 체계의 받아들임이 아니다. 레마다. 레마의 '레'는 발음할 때 기식이 붙어있다. 곧 숨이다.그 하나님의 숨결 한가운데를 지나 들어라, 그리고 충실하라. 하나님을 만나리라.
3. 제소리
11430日. 오늘은 열쇠구멍과 열쇠의 비밀을 깨닫는 날이었다. 죽음(4)을 넘어 새 삶(3)으로 그 빈(0)데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