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울은 두 개의 책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레위기>요, 다른 하나는 <신명기>다.
이 두 책은 어떠한 책인가? 모두 출애굽과 관련된 책이다.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규정들을 적은 책이고, <신명기>는 이집트에서 구출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그 율법을 다시 재천명한 책이다. 바울이 인용한 레위기 구절을 보자.
레위기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산다" 다른 것 없다. 이 말이 옳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으로 자유를 얻었으니 율법과 무관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일 없다. 언제나 '자유'에는 목적이 있다. 목적없는 자유는 갈 길 없는 자유이며 곧 방종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자유를 주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참사람'을 길러내심에 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율법의 다양한 규정에 얽매이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글 뒤에 인격이 있다. 율법 뒤에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계시다. 그 분의 맘을 헤아리는 것, 그 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것, 이것이 '율법을 지킴'의 본 뜻이다. 그래서 복음으로 얻은 자유로 인해,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다. 곧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인간성'의 완성이다. 새사람, 신인류의 출현이다.
신명기를 보자. 포로기 이스라엘이 사무치도록 읽고 또 읽었던 책이다. 바울도 그러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바울이 신명기 안에서 발견한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해보라.
신명기 30:1~4, 12~14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레위기와 맥락이 다르지 않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말한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모습이라 생각하면 안된다. 말한대로 살 수 없는 바로 그것이 우리를 포로로 붙잡고 있는 파라오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 막는 사탄이다! 우리는 왜 말한대로 살 수 없는가? 왜 우리의 삶 속에서 옳은 뜻은 꺾이고 꺾이고 꺽여 우리는 마음의 등뼈 마저도 꺾이게 되는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눈총 때문에? 생존의 문제 때문에? 우리가 죽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자꾸 하니 말씀도 잘못 읽는다. 마태복음의 '팔복'을 "우리는 팔복대로 살 수 없으니, 팔복을 온전히 살 수 있는 예수님을 믿자"는 식으로 말하면 안되는 것이지.
[2] 신명기 30장 뒷부분을 이어서 보자.
...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바울은 이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너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즉 그리스도를 땅으로 끌어내리는 짓입니다)라거나,
'누가 심연으로 내려가겠느냐'
(즉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는 짓입니다)"
가고자 가고자 해도 닿지 않았던 그 말씀 실천이, 스스로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 말씀은 하늘로부터 왔고, 죽어서 땅에 묻혔으나 그 지옥의 죽음의 바다 깊은 곳에서 다시 올라왔다. 본문에서 말씀은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다. 그래서 말'숨'이다. 즉 숨쉬는 말, '사람'으로 우리에게 걸어왔다. 만약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말씀대로 온전히 살았던 한 인격에 대한 부정이다. 그리스도가 '온전함'으로부터 오셨음을 부정하는 것이요, 죽음 앞에 말씀을 질식시켜 그의 부활을 왜곡하는 일이다.
가고자 가고자 해도 닿지 않았던 그 말씀 실천이, 스스로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러니 할 수 있다. 우리가 가고자 했을 때는 하늘이 손에 닿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하늘이 왔다. 수영장에 던져져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는 체대생이 있다. 몸에 힘은 빠지고, 물 속에서 몸은 점점 무거워져 죽을 것만 같다. 수영장 라인의 저 끝에 손이 닿으면 이제 쉴 수 있는데, 저 끝이 도저히 닿을 것 같지 않다. 그런데 갑자기 저 수영장 끝이 물리적 공간을 깨고 다가오기 시작한다. 환영인 줄 알았는데, 정말 그 일이 현실로 벌어졌다. 당신이 그 체대생이라면 힘을 내겠는가, 힘을 빼겠는가. 결승점이 다가온다. 마라토너가 바닥에 주저 앉아 넋놓고 기다리고 있겠는가? 아니면 발목에 힘을 더욱 주겠는가?
'이름'은 곧 '이르름'이다. 이르를 수 있는 자들에게 이름을 주신다. 말씀대로 살 수 없도록 하는 것들을 깨고, 또 깨고, 또 깨서 하나님께 이르는 이름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곧 '이스라엘'이다. 당신은 이스라엘, 참 유대인인가? 그렇다면 깨야한다. 산이라도 깨버려서 말씀의 길을 놓아야 한다. 이 일을 목숨보다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럼 최후에는 죽음마저도 깨버리게 될 것이다. 끝이 깨졌으니 진실로 깨끝해질 것이다. 그러니 그의 이름을 너의 이름 삼아라. 그럼 그 하늘은 멀리 있지 않고, 네 속에 있어, 네 입과 마음으로 나타난다. 내 마음이 곧 하늘이 된다.
[3]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일으키셨음을 믿는 것.
예수가 '주'라는 말은, 한 분 근원이신 한 분으로부터 뜻이 전달되었다는 말이요,
부활은 세상이 삶과 죽음의 이분법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넘어서 나아갈 제 3의 길이 있다는 말이다.
입에 근원의 말씀을 담아라. 마음으로 제 3의 길을 믿어라. 특정 종교 선전 아니다. 자신들을 종교의 경계로 묶는 일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은 관심밖이다. 오직 당신이 말숨대로 사는 것만 중요하다. 그 한 분의 숨은 곧 거룩한 하나님의 숨결이다. 그 분의 숨이 믿는 이에게 실천력을 준다. 그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이전 내 생각을 깨뜨리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숨결로 호흡하여 내 속에서 나를 무겁게 했던 지방들을 태우고, 뜨거운 열량으로 힘을 얻어, 가볍게 간다. 제물되자는 것이다. 제물은 몸도 맘도 가볍다. 다 드릴 것인데 아낄 것이 없다. 그런데 제물의 제물됨이 어찌 제물에게만 있겠는가? 그 분이 우리를 다루신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헛되지 않게, 우리의 시작부터 끝까지 잘 다루시어, 모든 것이 의미있게 하신다. 그러니 잘 살 생각도 하고, 잘 죽을 생각도 해야한다.
흔히 '진보'라는 신화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이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다 믿는다. 옳은 뜻대로 사는 일이 인간의 능력이라 근거없이 믿는다. 그러나 정반대의 근거들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진정한 진보는 보이지 않는 저 끝으로부터 온다. 우리는 진보를 만들어가기 이전에, 이끌린다. 순차적으로 오지 않고, 고난과 굴욕 속에서 온다. 다른 진보가 아니라 인간성의 진보다. 고난 속에서 사람의 인격이 닦아지고 꽃피는 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진실이다. 인간은 자기 능력을 과신한다. 자신들의 능력에 기댄 진보가 진정 인류의 인보인가? 고난을 극복하고 새 인간성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준비하는 것 없이, 우리는 성장했다 말할 수 있는가? 사람을 이끄시는 한 분에 대한 생각 없이 우리는 어느 한 점으로 갈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한 분의 이끄심을 따르는 것이 신앙이요, 말씀을 듣고, 눈을 새로 떠서, 마음의 숨님의 소리와 몸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 길이 설령 광야 길이라도, 돌아갈 수 없다. 이 길을 거쳐야 참 진보다. 생명을 향한 한 걸음이다.
소리를 듣고 따라가자. 그 울림에 따라 몸을 놀리자. 신명기로부터 울려서 바울을 진동시키고, 오늘날 옳은 뜻대로 사람을 일으키는 그 울림을 듣자.
신명기 30: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가까이 있다. 듣고 따라 부르면 내 속에 들어와 나를 새롭게 하고, 나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