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따르다 : 의라는 말이 다양한 범위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용례를 신중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를 따른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나도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꽉찬 사람 되고자 하는 것이다. 곧 참사람이다.
*의를 얻는다 : 그렇게 의를 따르는 사람은 의를 얻는다. '의를 얻는다'는 말은 새로운 자격, 신분을 얻는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를 따라 참사람이 되고자 하여,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이 개인에게 벌어지는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는 믿음으로 출발한다. 류영모 선생은 '믿음은 곧 밑음'이다. 그래서 '바닥소리'라 하였다. 마음 가장 밑바닥에 그리스도를 모시어 그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곧 본성의 자리, 마음의 뿌리 자리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다. 그래서 '시천주(侍天呪)'다. 믿음은 마음 밑둥에 하나님 아들을 모시고 기도(呪)하는 것이다. '시천주'는 오늘 본문과 딱 맞아 떨어진다.
[2]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동력이 잘못되었으니 제대로 된 지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목적지에 닿을 수 없다. 그들이 동력 삼은 것은 믿음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오늘 아침에 이 본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창세기가 보였다. 노동은 무엇인가? 땅을 일굼이다. 땅을 일굼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아담이다. 아담은 왜 종신토록 땅을 일구게 되었나? 삐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노동'에서부터 일을 해결하고자 한다. 아무리 땅에서 좋은 것을 내더라도 그것은 땅으로 되돌아간다. 노동은 땅과의 조화이지, 땅으로부터 하나님 아닌 다른 영원한 것을 내고자함이 아니다. 냈다면 바벨이고 바벨은 무너진다.
그러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창세기 3장의 노동을 거슬러 창세기 1,2장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노동이 시작되기 전, 인간이 땅에 씹어 먹히는 그 죽음이 있기 전 계신 이. 그 분이 해답이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니라 노동에서 자신들의 삶의 준거점을 만들었던 이들은 넘어진다. 하나님이 나타나도 자신들의 노동을 훼방하려는 사람으로밖에 안보인다. 땅으로부터 거룩한 것을 내려는 헛수고라고 말해주어도 우이독경이다. 결국 그를 죽일 것이다. 하나님 모른채 땅만 아는 사람은 하늘을 말하는 자를 죽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민중들이 예수를 죽였다. 노동에서 시작한 이들이 걸려야 할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를 인용한다. 8:14, 28:16. 머릿돌. 머릿돌은 기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머릿돌이 싫어서 걷어차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무언가를 세우고 싶은 이들이 머릿돌을 상하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상하게 하고 버린 그 돌이 마침내 우주의 중심이었음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인격의 좌소였음이 드러난다.
[3]
*인간다움을 보존하는 것 : '구원'이란 말을 푼 것이다. 구원은 '참된 인간으로 이 땅에 남음'이다. '천국행'으로 그간 오랫동안 오해되었으나 그것은 반쪽짜리 의미일 뿐이다.('천국'이란 말은 애시당초 장소 개념이 아니다, 누가복음 17:21)
*그 결말이 확실히 드러난 앎 : 에피그노시스. '그노시스'는 앎이요, '에피'는 목적을 지향하는 전철. 그냥 목적없는 앎, 뜻없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왜 공부하느냐고 물으면 다들 그노시스를 말하지만, 에피가 없다. 어디로 갈바를 모른다. 이스라엘의 율법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목적삼은 바는 참된 인간다움이 아니기에 땅에 집어 삼켜진다. 내부를 금칠한 그 이스라엘의 중심이라던 으리으리한 건축물마저도 그리 되지 않았는가?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번 씩이나.
그렇다면 앎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 앎은 어디를 향해야 할까? 바울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 그 목적을 밝혀두고 있다. 이 목적은 감춰있던 목적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특정 시점에, 특정 사건으로 마침내 드러났다. 인류 전체의 역사를 이야기로 본다면, 그 이야기의 결말(텔로스)이 드러난 것이다.
*자기 의만 세우는데 애쓰고, 자신을 하나님 의 아래 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 '자기 의'라 했을 때 의를 '의지, 뜻'이라 생각해보자. 자신의 뜻 내세우는데만 애쓰고, 하나님의 뜻에는 나몰라라 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절대화 시키는 사람이이다. 이 사람이 주장하는 자기 의를 따라가보면 세계는 둘로 분열된다. 나의 의. 남의 의.
세상에 잘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다 둘이다. 나와 너, 아군과 적군, 내 뜻과 남의 뜻, 남의 뜻은 곧 나의 뜻에 대한 압박이 된다.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사람은 열심을 내면 낼수록 세상을 망친다. 차라리 가만히 있어주는 편이 모두를 위해서 좋을 정도다.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는 사람은 둘이 아니다. 셋이다. 우리가 스포츠에서 느끼는 재미와 감격은 둘이 아니라 셋이다. 양 편이 나누어 겨룬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셋이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이 이야기 안에서 모두 즐겁다. 이겨도 의미가 있고, 져도 의미가 있다. 겪어왔던 것이 역사가 되고, 그 안에 창조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둘로서는 만들 수 없는 하모니가 스포츠에 있다. 셋이다.
하나님의 의 아래 있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나와 너가 있다. 셋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없다하며 나와 너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데서 희망을 찾으려고 한다. 아니, 이런 축구 경기가 재밌어? 공 하나 따라서 떼로 몰려다니는 축구는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나는 군대에서 이것을 절절히 느꼈다) 셋이다. 나와 너와 하나님이다. 이 경계 자체가 잘못되었다 말하는 이들이 하는 일은 몸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몸이 땅에 씹어 먹히는 일을 찬양한다. 노동에 갇혀 있다. 더 멀리 봐야지. 노동 이전에 하나님 계시다. 그 분이 자신의 뜻을 드러내셨다. 낡고 썩지 않는 온전한 몸으로, 3을 끝까지 이뤄가실 것이라는 결말을 당신에게도 보여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