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동족,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라면 제물이 되어도 좋다고 말했던 그 이스라엘.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 그 앞에서 이스라엘은 반역자였고, 살인자였으며,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람들이었다. 민중과 지도자가 합심하여 예수 한 사람 죽이는데 목청을 높였다. 그것도 황제 숭배의 로마에게 예수를 죽여줄 것을 바라며, 자신들의 정체성 마저도 온통 부정해버렸다. 마치 출애굽 이야기에서 파라오의 배역과 같이 이스라엘은 끝까지 완고했고, 그 결과 메시아는 동족들의 고소와 비아냥 속에서 죽어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십자가 이후다. 성전 휘장이 찢어졌으며, 모든 사람이 지성소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모세 마저도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가리시고 그의 위로 지나가시며, 자신을 소개하시기를, '긍휼의 하나님' 이라 언표 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모세를 넘어, 그 긍휼의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들, 이후 눈으로 보지 못했을지라도 그 역사의 순간을 통해서 긍휼의 하나님 믿게 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사건 이후, 죽어 매달려 있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최초로 고백했던 이가 누구였던가? 로마의 백부장이었다. 성전의 지성소에 접근할 수도 없던 그가, 끔찍한 살인 사건의 현장 속에서 긍휼의 하나님을 뵈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서, 호세아의 예언을 보라. "내 씨알 아닌 자를 내 씨알로 부르겠고, 사랑 받지 못한 자를 사랑 받는 자로 부르겠다." 어디에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말했던 그 곳에서." 바울은 지금 동족 이스라엘이 버림 받았기에 하나님은 불의하시냐는 물음에 답하고 있다. 바울이 무엇이라 말하는 것 같은가? 대역전의 실마리를 보는가?
[2]
이스라엘이 버림 받았다고 말하는 그 자리에 '남은 자'가 있다. 이사야는 아브라함 언약을 언급한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바다의 모래와 같은 자손을 약속하셨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폐역하여 하나님을 거절하고 스스로 인간다움에서 멀어져 갔다. 그렇기 때문에 [1]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2]의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같지 않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양자됨은 약속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혈연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아들들 속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다. 남은 자가 있다!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그 남은 자들은 인간다움을 보존해나가는 사람들이다. 전체가 무너지지 않게 하는 의인 열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줄곧 있었다. 그들은 포로기의 역사 속에서도 굳게 버티며 역사의 전달자 역할을 했다. '암 하아레쯔'들이 그러하다. 흔히 '땅의 사람들'이라 번역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바벨론 포로 시절 이스라엘의 모든 귀족들이 포로로 끌려 갔을 때, 포로로 끌고갈 가치가 없는 사람들로 여겨져 가나안 땅 위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 하잘 것 없고 천한 사람들이 말씀과 예배를 지켰고 역사를 이어갔다. 이후 포로 귀한 명령이 떨어져 이스라엘 귀족들이 돌아왔을 때, 이미 그들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 속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더 작은 집단인가? 그렇지 않다. 소수로 남아 있는 그들이 더 크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은 자기 자신을 넘어전체를 덮기 때문이다. 또한 남은 자는 이스라엘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국경 마저도 넘어선다. 그렇게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안에.
[3]
이 남은 자가 '씨'다. 이틀전 본문을 돌아보라. "오직 이삭 안에서 난 자라야 네 씨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찌 이해되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사용하셔서 성경을, 메시아 소식을 전달하셨다. 그런데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했다. 그럼 그들은 버림 받는가? 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아니다. 남은 자가 있다. 그리고 그 남은 자가 바로 긍휼 그릇이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거절한 그들을 깨뜨리지 않으시고 참으신다. 그리고 긍휼 그릇에게 사명을 주신다. 긍휼을 담아 전하라! 이들은 전체를 돌아볼 사명을 담았다. 전체를 보존하기 위해 남은 의인 열 사람. 이 사람들이 없으면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분명한 기준도 없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만 하려고 하며, 인간다움을 서서히 잃어가는 폐역함에 빛은 어디있는가?
하나님께 있다. 남은 자는 자신을 닦아 그 빛을 비춘다. 이것은 분명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우리가 그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는 것이 어려운가? 세상이 우리를 집어 삼키는 것이 어려운가? 전자는 가능성이 있으나, 후자는 가능성 조차 없다. 아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주께서 남기시는 그 씨는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감히 누가 하나님께서 세상에 뿌리시는 생명을 소멸할 수 있으랴! 돌들이 널려 있고, 가시덤불이 자라며, 새들이 쪼더라도, 어딘가 반드시 남은 씨앗이 있다. 그 남은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고, 세상은 그 열매를 보고 진정한 인간다움을 본다. 그래서 세상이 안망한다.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이 다 무너지고 멸망한다해도 자신을 버려 끝까지 이 세상 전체를 짊어질, 최후의 남은 자 한 사람을 말이다.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인간다움이 세상을 보존하고 있음을 깨닫고서, 만물을 붙드시는 그의 사역에 동참하라! 게다가 사람들이 착각하듯, 그 분은 이 엄청난 일을 맡기시고, 몸을 벗으신채 어디 멀리 가지 않으셨다. 그는새로워진 몸으로 여기 계신다. 새로워진 몸이기에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이 그에게는 하나다. 그래서 '임마누엘'이라 한다.바로 그 분으로부터 남은 자들이 힘입어 사는 실천력이 흘러나온다. 당신은 이 힘을 알고 있는가? 모른다 하지 마라. 지금 당신은 남은 자를 세 사람이나 알고 있다. 최후의 그 한 사람,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온갖 희생을 치르며 글을 쓰는 또 한 사람, 그리고 오늘 당신 앞에 선 남은 자 지망생.
3. 제소리
11425日. 남아 있으니 열매를 맺어야지. 폈다 지는 꽃은 없어도 된다. 죽었다 사는 씨앗과 비교할 수 있으랴. 무화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