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군가는 긍휼히 여기고, 누군가는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평등의 개념에 익숙한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마치 하나님이 누군가를 편애하시는 것처럼 여겨져서 그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바울은 끝까지 밀어붙인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든, 사람이 얼마나 무언가를 열심히 하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옳으시다! 이것은 진실인가, 그의 우김인가?
바울은 이에 대한 답변을 출애굽 이야기로 시작한다. 출애굽기 33:19 의 인용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면 이 출애굽의 길을 더이상 가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저 자신과 주님의 백성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백성과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말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원하는 바를 묻는다. 모세의 대답은 먹을 것을 달라거나, 자신들을 돌봐달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 간청한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지금 로마서 9장의 맥락은 '이스라엘이 버림 받았는가?', '하나님은 불의하신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음을 기억하자. 그 답변을 위해 바울이 인용한 말씀이 이것이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주'.
[2] 바울은 이어서 파라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집트의 파라오의 완고함은 유명하다. 그는 10가지 재앙을 온통 뒤집어 쓸 때까지 미련할만큼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었다. 그 때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를 완고하게 하셨다'고 기록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가진 불만은 더욱 증폭된다.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을 위해 파라오는 희생당했다. 이쯤되면 파라오에게 동정하는 맘이 생기다 못해 항의하고 싶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우리는 여기서 '뜻'이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그 뜻은 '하나님의 힘을 나타내어 온 땅에 그 이름이 알려지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은 목숨을 잃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 목숨을 주시는 분이시다. 만약 하나님이 진정 하나님이시라면, 그의 정당성은 사람 목숨으로 판단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한 세대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목숨과 목숨으로 이어지는, 세대와 세대를 관통하여 이뤄지는 뜻이 그 분께 있다. 감히 그 분을 판단한다면 그 분은 자신이 말씀하신 그 뜻으로 판단 받으실 것이다. 정말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실 것인가? 이 뜻을 위해 누군가는 긍휼히 여김을 받고, 누군가는 마음이 완고해진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다 긍휼의 하나님 뜻 안에 있다. 그 안에서 하나의 뜻을 이뤄나간다.
그러나 사람은 이 뜻에 대해 반박할 수 없다. 어제는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사람답다'라는 말을 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다운 것인가? '~답다'는 '닮다'인데, '무엇 닮았다'라고 말하려면 '무엇'을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럼 '사람답다' 할 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참 사람, 이상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축의 종교라 말하는 집단들은 모두 이 이상적인 인간상을 가지고 있다. 석가, 공자, 예수. 그런데 그 이 사람을 정말 사람다움의 원형이라고 어찌 알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다움을 판단할 수 없다. 언제나 불완전하다. 사람을 사람답다고 판단하려면 상위의 근거를 필요로 한다. 그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도 참 하나님인지 알려면 상위의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그럼 하나님 위의 하나님이겠지. 그럼 하나님 위의 하나님, 그 위의 하나님, 그 위의 하나님.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우리의 사고는 한 자리에서 멈출 수 밖에 없다. 더이상 상위의 기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 모든 것을 만들었기에,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한 분. 하나님.
[3]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이 버림 받았는가?' '하나님은 불의하신가?' 에 대한 바울의 답변을 보고 있다. 바울은 모세와 파라오 이야기에 이어 토기장이 이야기(이사야 29장, 45장)를 들려준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든다. 어느 것은 '화 그릇'으로 만든다. 어느 것은 '긍휼 그릇'으로 만든다. 진흙들의 불만은 이 지점에 있었다. "토기장이시여, 왜 이 그릇은 화 그릇으로 만드시고, 왜 저 그릇은 긍휼 그릇으로 만드셨어요!" 그러나 그는 만물 위에 계신 최종 표준이시다. 진흙은 그의 하고자 하시는 바에 대해서 무어라 말할 자격이 없다.이 사실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이슬람이다. 이슬람의 알라는 감정이 없다. 언제나 자신의 습관대로 판단하는 절대자다. 모슬렘은 그의 판단에 대해서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라가 아니다! 오늘 본문의 첫장면이 기억나는가? 하나님은 자신을 밝히시기를 이 단어를 내세워 나타내셨다. '긍휼'이다. 불쌍히 여김이다. 같은 마음 품음이다. 공감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셨다. 다시 그릇 얘기로 돌아가보자. 토기장이는 화 그릇을 깨지 않고 참으신다. 삐뚤어진 그릇을 꺠지 않는 이상한 토기장이가 하나님이시다. 한편 긍휼 그릇에게는 자신을 풍성히 드러내신다. 고난 받아 죽임당하는 왕의 모습으로. 그리고 이 풍성히 드러난 하나님의 모습을 알게 된 긍휼그릇은 어찌 사용되는가? 알리고자. 여기서 오해는 풀어진다. 톰라이트의 말대로 '긍휼 그릇'은 '긍휼함을 받는 그릇'이 아니라, '긍휼함을 전하는 그릇'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 소식을 듣는 화 그릇들도 긍휼의 수혜자가 된다.
뜻이다.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의 최종 표준이시다. 이 분을 거절하겠는가? 아니면 함께 세상을 긍휼 하겠는가? 끝내 화 그릇으로 남겠는가? 아니면 스스로 긍휼 그릇이 되겠는가?
그 분은 불의하지 않으시다. 이스라엘 역시 버림받지 않았다. 다만 이스라엘에게 이 긍휼의 하나님을 전할 긍휼 그릇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뤄질 뜻을 이루기 위하여.
3. 제소리
11424日. 지난 날을 회상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긍휼을 전하라. 왜 할 말을 하지 못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