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앞에서 이스라엘이 가진 여러 좋은 조건에 대해서 말했다. 그들은 율법도 있고 예배도 있고 약속들도 있고 먼저 선택된 민족으로서 좋은 자질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극렬하게 거부하는 민족이다. 그렇다면 복음에 비추어 봤을 때, 그들은 버림당한 것인가? 이것은 이스라엘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맏아들이라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하루 아침에 그들을 버리신 것인가? "하나님은 불의하신가?"
기독교가 반유대주의를 옹호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래서 로마서 9장부터 11장이 불필요하다고 말한 신학자들도 있었다. 심지어 나치를 옹호하던 목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서 9장부터 11장을 제대로 알고나면, 우리가 가진 한 권의 책이 반유대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버림 받지도 않았고,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지 않으시다."
먼저 바울은 '이스라엘'이란 말의 정의를 새롭게 한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거주지로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말도 아니고, 야곱(이스라엘)의 후손을 의미하는 말도 아니다. 혈통이나 지리적인 것으로 '씨'의 정체성 삼을 수 없다. 사실 이것은 모든 정체성 문제에도 적용된다. '나'를 나되게 하고, '우리'를 우리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컨데 '민족'이라는 개념 하나를 규정하는데도 복잡 다단한 논의가 개진된다. 지리인가? 혈통인가? 문화인가? 민족이라는 개념을 부정할수도 긍정할수도 없어서, 그 사이의 미묘한 경계를 찾으려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지만, 정체성을 찾는 문제는 똑 부러지는 기준을 찾을 수가 없어 언제나 뿌연 안개 속이다. '이스라엘'이란 말도 마찬가지. 도대체 무엇이 이스라엘이냐? 누가 하나님 자녀냐?
[2]
바울은 '오직'이란 말을 두 번이나 넣어 이렇게 말한다. "이삭 안에서 난 자라야", "약속의 자녀만이".
이 말을 하면 가장 열받을 사람들은 이슬람 사람들일 것 같다. 그들은 이스마엘의 후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오해다. "이삭 안에서 난 자라야"라는 말은 혈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삭이 어찌 태어났는가를 생각해보라. 생명 출산이 불가능한 100세의 부부 사이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아이가 이삭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근본은 생명 출산이 불가능한 이 부모의 죽을 몸인가, 아니면 그 죽을 몸에 씨를 심어주신 하나님인가?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살몸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따라서 이슬람과 이스라엘은 싸울 이유가 없다. 당신들은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연이 아니다. 누구의 몸에서 나오고, 누구의 계통을 따르냐는 하나 중요하지 않다. 근본과 출처는 한 분께 있다. 말 그대로 하나님. 그 분으로부터 나온 자녀. 그들은 죽을 사람의 몸으로 말미암지 않고, '약속'으로 말미암는다. 그렇게 비롯된다.
게다가 바울이 지금 인용하는 것은 창세기의 족장이야기다. 왜 '이스라엘'이란 말의 의미를 새롭게 하면서 창세기를 인용하는가? 왜냐하면 이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의 근거, 곧 뿌리를 이 이야기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 본문을 한참 잘못 읽었다.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는 혈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보다 먼저 계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위에서 '의미를 새롭게'라 써놨지만, 이것은 새로운 것도 아니다. 본래 그러했던 것이다.
[3]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은 이삭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낳은 야곱과 에서도 그러하다. 이삭과 리브가가 인지하기 전에, 이미 그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있었다. 형인 에서가 동생인 야곱을 섬기는 것은, 이삭과 리브가가 자식들을 안아보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두신 뜻이었다.
이 말에 대한 두 가지 오해를 짚고 넘어가자. 먼저는 '역사 결정론'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 결정론은 두 가지 반응을 가져온다. 하나는 방만이다. 역사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저 내 맘대로 해도 미래는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낙담이다. 내가 무엇을 해도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는 좌절이다. 그리고 이 '방만'과 '낙담'은 사실 하나다. '뜻없음'이다. 분명히 하라! 하나님의 뜻은 방만과 낙담을 가져오는 결정론적 시각이 아니다. 그 분의 시야는 시간을 넘어서고 우주를 넘어선다. 그 뜻 안에서 '내 맘대로 해도 되겠네'라는 방만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뿐이다. 또한 결국 역사가 완성되지 못할 것이라는 낙담은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분이 해나가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만도 낙담도 없다. 주신 생각을 끊임없이 실현해 나간다. 이것이 결정론인가? 아니, 미래를 맡겨주심이다. 이 둘은 한 끝 차이다. 뜻있음과 뜻없음이냐, 청지기냐 주인을 버린 반역자냐. 삶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그리고 그 결과는 정말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뜻이 있다. 에서와 야곱이 나오기 전에 그들을 향한 뜻이 있었다. 이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에 대해서도 오해하지 말아야한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갖게 된 프레임을 가지고 텍스트를 읽어낼 때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지식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자로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성경은 제 가진 의미를 우리에게 드러낸다. 저 위의 말은 '계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야곱이 에서의 우위에 있다는 말이 아니란 말이다. 역사는 오히려 반대로 진행되었다. 형을 속였던 야곱은 개고생한다. 평생을 떠돌이로 살며, 본인도 고백하기를 '험악한 인생'을 살아왔노라 했다. 오히려 에서의 고생 이야기는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누가 위냐, 아래냐 따지는 건 하나님 뜻이 아니라 사람 생각이다. 이후 에서와 야곱이 어떠한 결말을 맞이했는지를 알면, 이것이 더 분명해진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가? "부르신 이가 야곱의 어머니에게 하신 말씀대로" 그는 동생을 섬겼고, 미움 받았다. 더불어 에서는 탕자 비유에 나오는 형이 갖지 못한 '간지'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용서다. 고생길에서 돌아온 동생을 끌어안은 에서를 보며 당신은 무엇을 발견했는가?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다. 그 동일한 뜻이 자신들만이 이스라엘이라 주장하는 고생하는 혈연집단을 위해, 대신 미움 받고 섬기는 한 사람에게도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