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과 거짓 : '참'의 어원은 '씨', '종자'를 뜻하는 '달'에서 왔다 한다. 즉 '참'이라는 것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명 씨앗'이라는 말이다. 또한 결실에 대해서도 속이 꽉 '차있음', 알이 '차오름'이란 말을 쓰는 것으로 보아 그 속이 무언가 꽉 차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이 차있겠나? 씨앗이지. 씨앗이 결실되어 그 안을 또 생명으로 채운 것이다. 반대로 거짓은 '거죽'에서 나왔다 한다. 속에 들은 것이 없고 겉만 번드르르한 것이 거짓이다.
'참'은 희랍어로는 '알레테이아'를 쓰는데, 이것은 망각의 강인 '레테'를 넘어선 것이다. 즉 잊지 않고 '기억'한 것이다. 무엇에 관해? 뿌리에 관해, 시작에 관해, 사건의 진상에 관해.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일까? 죽음과 망각이 지배하는 이 세상 너머의 참은 무엇일까? 생명이다. 기억이다. 모든 것을 낳으시는 속이 꽉찬 이이시다. 곧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가 참이지 거짓이 아니라 한다. 그런데 그의 속에서 나온 것은 슬픔과 걱정이었다. 참이라 했으니, 생명과 상관있는 슬픔과 걱정일 것이다.
*거룩한 숨결...나의 양심 : 요새 라틴어를 배우면서 희랍, 라틴 사람들이 인격을 세분화해서 생각했던 것을 배우고 따져보고 있다. '아니마, 아니무스, 멘스, 센수스'이런 단어들을 사용해서 인간 내면을 설명하더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랫말도 있듯이, 사람 맘에는 여러 차원이 중첩되어 있는 것같다. 이것을 인간은 오랜동안 다양한 단어로 포착하고자 시도해왔다. 정신, 인격, 마음, 생각, 지성, 감정, 의지, 의미. 정신분석학도 이러한 종류중 하나고.
그럼에도 마음은 하나다. 여러 단어를 가지고 설명하되 마음은 본래 하나인 것이다. 분열되면 안된다. 여러 차원이 모여 있는 '하나'의 자리. 이성적 추론이 주된 기능도 아니고, 그저 욕망이 분출되는 활화산도 아니며, 마음은 우리 안에 있으나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신비한 처소.
바울의 마음에는 거룩한 숨결이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인격, '신격'이라 부르면 어떨까. 그리고 옳고 그름의 표준 기능을 하는 '양심'이 있다. 그리고 '나'도 있다. 이 마음 안에서 나와 양심과 하나님은 서로 끊임없이 대화하고, 옳고 그름을 물으며 '생각'하고, '선택'해 나간다. 그런데 바울의 마음에 감정적 차원이 포착된다. 이것을 하나님과 바울과 양심이 보고 있다. 슬픔과 걱정이다. 속에 없는 슬픔과 걱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거죽이 아니라 참이다. 그런데 왜?
[2]
바울의 충격적인 기도 내용. 그의 걱정과 슬픔의 정체. 이스라엘.
*제물 : '아나떼마'. 개역성경에는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라 번역되어 있다. 이게 어떤 '저주'일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curse의 저주는 아닌듯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의미의 '저주'로 쓰인 로마서 3:14에는 '아나떼마'가 아닌 '아라'라는 단어를 쓰기 때문이다. 로마서 12:14에 나오는 저주도 '아나떼마'가 아니다. 그 저주가 이 저주가 아니다. 혹 '아나떼마'를 저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로마 교황청의 영향인가? 로마 교회에서 아나떼마를 선언하면 이것은 곧 카톨릭 교회에서의 출교를 의미했고, 이것은 신으로부터 온 저주로 여겨졌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의미들을 갖다 붙이면 본문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럼 뭐야? '아나떼마'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 '희생제물'이다. 그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가 아니라, '내가 그들을 위한 희생제물 되어'가 된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다. 그런데 그는 본격적으로 유대인을 위한 사역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유대교에 깊이 몸담았던 사람으로, 누구보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소양을 갖췄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지중해를 끼고 터키로, 스페인으로 순회하며 이방인에게 나아간다. 그러면서도 정작 바울 자신은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에 대한 아픔을 감출 수 없기에 기도한다. 유대인들을 위한 희생제물로 절 삼아주세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 개역성경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라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은 곧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바울은 이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받았고, 세상을 새로이 보게 된 사람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인생을 건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어찌 그리스도와 끊어질 수 있겠는가? 끊어진다면 그것은 이게 또 무슨 의미겠는가? 인격이 마비된다는 말인가? 지옥간다는 말인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단 말인가? 그만큼 유대인을 걱정한다는 말인가?
'그리스도로 부터 나온' 이라 해석하면 어떨까. 그리스도로 인해 출생되고, 새로이 되고, 그로 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동족들을 위한 제물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일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래서 '아포 크리스투'라는 말을 넣은 것이 아닐까.
[3]
바울은 이스라엘의 장점들에 대해서 열거한다. 눈여겨 본 것은, 이스라엘도 처음부터 아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양자'였다! 난 그간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만 양자인줄 알았네. 다시 생각해보니 이스라엘도 똑같이 삐뚤어진 사람들이었고(심지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드는 아버지 아래서 자랐다) 이스라엘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라, '먼저 양자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하신 것도, "이스라엘을 내가 지금 먼저 양아들 삼는다"는 말이겠구나. 아, 자기 아들 '죽일' 살인자들을 미리 아들들로 삼는 하나님의 사역이 시작된 것이었다!
*만물을 향해 계시는 하나님 : 바울은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만물을 향해 계시는 하나님'. 여기서 '향해'라는 말은 전치사 '에피'를 번역한 것인데, 소유격 명사를 받을 경우 "toward, in the direction of, on" 이런 의미가 된다. 즉 '지향'이다. 만물을 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분이시다. 하찮은 것 하나 없이, 만물을 향해 계시며, 또한 만물의 목적 안에 계시며, 또한 만물 위에 피조물의 형상으로 오신 분이시다.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한!
그런데 바울은 이 부분에서 유대인 얘기를 쭈욱 하다가 그리스도가 언급되니, 갑자기 말하기를 멈추고선 참지 못하고 찬양하기 시작한다. 마치 유대인들이 성경을 필사하다가 하나님 글자를 쓰기전 붓을 놓고 찬양하듯! 만약 논리전달이 목적이라면 이렇게 하면 안될 것이다. 잘 짜여진 글을 써야지, 갑자기 맥락을 벗어난 찬양이라니! 그러나 그의 목적은 갖춰진 글이 아니다.(물론 바울은 글을 잘 갖춰서 쓰는 사람임에도!) 만나자는 것이다. 찬양받기 합당한 한 분을 인격안으로 모시자는 것이다. 비로소 찬양이 터져나오는 새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게다가 뜬금없는 찬양은 맥락을 벗어난 듯 싶지만, 이 세상의 모든 맥락은 찬양 받으시는 분 안에 있다. 그러니 참으로 그 안에서 갖춰진다. 글 뿐만 아니라, 그 숨결 안에서 인격이 갖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