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두다, 아래 두다 : 바울은 언어유희를 쓰고 있다. '휘페르'와 '카타'인데, 휘페르는 '위하여', 카타는 '아래'.
이러한 관계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 두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로 둔다.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위하니 두니,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아래로 두지 못한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기 때문이다. 사랑은 서로를 위하는 것이다.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거저 주시지 않겠습니까 : 아들과 함께 받는 모든 것은 곧 창조세계 전부다. 새롭게 될 창조세계 전부를 아들과 함께 상속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함은, 아들을 내어 주시는 위함이요, 세상 전부를 주시는 위함이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 : 하나님의 우리를 위함에 아들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 위함에도 아들이 있다. 아들을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자요 곧 제사장이다. 죽었다 살아나셔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죽음을 거두어내신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말은, '승천'을 가리키는 유대적 표현이다. 승천은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장면으로, 인자가 하나님께 모든 대권을 이양받기 위해 하늘로 나아가는 것을 예언한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즉 그 분이 왕이시다. 그 분의 입장이 하나님의 입장이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을 만나시는 분 : 개역성경에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어제 살펴본 '엔튕카노', '안에서 만나다'의 의미다. 그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을 만나신다. 전에는 고소자가 있었던 자리에, 이제 변호인이 계시어(요한일서 2:1) 우리와 하나님을 이으신다. 우리의 죄를 자신의 사건 안에서 녹이시며 끝없는 용서를 이루신다.
[2]
이 본문을 읽으며 이삭을 생각해보라. 죽임당할 제물로 여겨져서, 자신을 태울 나무 떌깜을 등에 지고 아버지를 따라나서는 아들을 말이다. 그는 묶여서 압박을 당했고, 그 묶임이 점점 그의 몸을 죄여왔으며, 위험으로 내몰려 칼에 찔릴 위기에 있었다. 그는 정말 희생당할 양처럼 여김을 받은 것이다.
이삭 사건은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이 타락을 뒤집고, 인류에게 언약을 주신 그 시절.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그 언약을 어떻게 이루실지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신다. 이 방법으로 이루신다. 압박과 묶임과 죄임과 위험과 칼이다. 이 앞에서 죽음을 내어놓고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래서 이 방법의 맨 선두에 하나님의 아들 있었다. 바울의 그림은 이삭에서 이사야서 53장으로 이동한다. 죽임당하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삭은 예고편이었고, 예수는 진짜였다.
예수는 이 방법으로 세상을 거꾸로 뒤집고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시다. 그리고 우리도 이 아들을 따라 이 방법을 따라가겠다는 사람들이다. 언약을 믿기 때문이다. 이 방법으로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바울이 인용한 성경 구절은 시편 44:22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불평하는 내용중 하나다. 당신에게는 이 내용이 어찌 들리는가? 불평인가? 아니면 언약에 기꺼이 참여함인가?
"당신을 위하여 한낮 내내 우리가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가 희생당할 양으로 여겨집니다."(시편 44:22)
[3]
*압도적으로 이긴다 : 압도적으로 이긴다. '휘페르.니카오'. 나이키와 니카오가 같은 어원이다. 승리. 휘페르는 '위'다. 개역성경에서는 '넉넉히 이긴다'로 풀었다. 축구경기를 생각해보라. 양 편이 겨루고 있다. 그런데 한 쪽에 바르셀로나의 사비가 있다. 그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감각이 있어, 마치 경기장을 위에서 조망하는 것 같이, 모든 상황을 지배한다. 예측하지 못한 움직임, 기가 막힌 패스, 그의 발에서 시작되어 상대를 넉넉히 이긴다.
모든 고난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사비와 같이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황 전체를 위에서(하나님 보시는 듯한 시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내다보는 감각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결국 정의가 이길 것이라는 확신, 결국 사랑이 옳았음이 드러날 것이라는데 의심없음. 그런데 이 사랑과 정의를 이루신 분이 예수요, 그 분의 방법이 고난이었다는 믿음. 그리고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바로 그러한 고난이라는 기쁨. 이 고난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나의 부활과 세계의 새로워짐의 결말이 남아 있다는 소망. 그래서 왼뺨을 내어주고, 겉옷을 벗어주며, 죽임 당해줄 수 있다. 이것으로 고난을 넉넉히 이긴다. 죽음 마저도 이긴다.
그렇다면 이 충격적인 감각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를 위하며 사랑으로 결속되어 있을 때 이 감각이 생긴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 사랑하여 이 감각을 발달시켜야 한다. 우리는 이 과정 중에 있다.
그러니 더욱 사랑하라. 세상을 지배하라. 내 발밑에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의 발을 씻겨줄 때, 이것이 진정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