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리 아시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을 사람들로 앞서 정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앞서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마침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1]
개역성경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번역된, 무척이나 유명한 구절이다. 이 구절이 하나님의 자녀들과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8장의 맥락 안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숨님 : 하나님의 숨결, 하나님의 영, 프뉴마. 성령님,
* 하나님과 닿게 하십니다 : '휘페르엔튕카노'. 휘페르는 '위', '엔'은 'in', 튕카노는 '만나다, 일어나다'. 신약성경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다. 사전에는 'intercede(중재하다)'로 나와있다. 동사를 분절하여 이해하면, '씻어난 이들을 위해(휘페르), 그들을, 숨님 자신 안에서(엔) 하나님과 만나게 한다(튕카노)'는 의미. 숨님을 통해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닿는 것이다.
[2]
*마음을 찾으시는 하나님 : 개역 성경에는 '마음을 감찰하시는'으로 되어 있다. 마음은 숨님이 거하는 처소. 숨님의 집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을 '성전'이라 부르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보신다고 했다.(사무엘상 16:7).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과, 마음에 계시는 숨님이, 바로 마음에서 만난다. 그래서 마음은 인간 실존의 모든 중심이다. 하나님과 숨님과 내가 만나는 자리다.
*씻어난 이들 : 성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상관없어진 사람들.
씻어난 이들은 지적(知的)으로 인지하던 인지하지 못하던지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희랍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추론 능력은 영혼의 가장 주된 기능이 아니다. 영혼은 컴퓨터가 아니라, 하나님과 숨님의 처소다. 그래서 '숨님을 따름'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과 닿는 것이다. 최근에 봤던 게시물을 인용하자면, 숨님을 따름은 곧 '무의식적지식(Unconscious Knowing)'. 내가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의식하지 않아도 올바르게 생각하고 움직이는 경지.
곧 마음은 하나님과 숨님이 만나는 자리다. 그 자리는 인간 지식을 초월해있다. 씻어난 이는 다름 아닌,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숨님을 만나는 사람이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 것은 기본 옵션이다.
[3]
노자는 "땅의 일을 위함이 없으니 못다스릴 것이 없다(無爲無 則無不治)"고 했다. 앞서 말한 씻어난 이는 다스림이 그러하다.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숨결을 따라 다스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와 함께 순리되고 함께 움직이며 '선'을 이룬다.
*좋음 : 선(善). 희랍어로는 '아가토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좋음', '선'으로 풀이된다.
좋음이란 무엇인가? 좋음마저도 상대적인 것이라, 너의 좋음과 나의 좋음이 다른가? 여기서 말하는 좋음은 이러한 좋음이 아니다. 노자도 하늘 아래 좋음은 상대적이며, 이러한 좋음은 참 좋음이 아니라 했다. 본문에서의 '좋음'은 절대적 좋음이다. 곧 하나님의 좋음이다. 창조 때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절대자의 판단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이라는 단어를 누가 그렇게 이해하는가? 창조자를 닮은 탁월한 작품이었던 세상은, 혼탁해졌을 뿐만 아니라, 송장냄새로 가득한, 망가진 세상이 되었다.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기준 없이 서로 패를 나누어 분열하고 싸우는 생각과 몸의 격투장이 되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좋음에 이르는 길이 났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곧 숨님으로 호흡하며, 모든 순리에 따라 하나님의 좋음에 이르는 사람이다.
*앞서, 미리 : 희랍어 '프로스'가 동사마다 붙어 나온다. '앞서 정함', '미리 앎'. 곧 시간을 넘어선 것이다.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시간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시간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마치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않듯, 사람은 시간에 속하면서도 시간을 의식하지 못한다. 의식할 수 없으니 제대로 알 수도 없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 너머로부터 우리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도덕원칙들, 인격적 차원의 앎이 흘러 나온다.
칸트는 이것에 대해 자신이 알지 못한다 말하면서도 별빛에 비유했다.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의 도덕법칙", '정언명법'이라고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정언명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도 그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댈 수 없다. 이 시간 속, 상대적 차원에서는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시간에 안에 계시지만, 시간에 갇혀계시지 않는다. C.S.루이스의 말대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이, 그 분에게는 곧 언제나 영원한 현재다. 그래서 그 분은 '앞서' 정하실 수 있고, '미리' 아실 수 있다.점과 직선으로 이뤄진 2차원에 속한 존재가, 어느 날 직육면체를 이루며 솟아오른 직선을 감당할 수 없듯,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문장으로 표현하면 언제나 역설에 직면한다. 지금 이 문장도 그렇다.
*형상 : 그래서 그 분은 시공을 너머 계시다. 그러면서도 시공 안에 계시다. 그 분은 시공을 품으셨다. 그래서 시공 너머 계실 때는 하나님으로, 시공 안에서 활동하실 때는 숨님으로 부르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도 숨님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시간의 지평 위에 있지 않으면, 또한 3차원의 공간 안에 있지 않으면, 대상을 인지할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시간의 흐름을 절대화하기도 하고, 특정 공간을 신성시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님 모르는 인간의 한계이자, 어쩔 수 없음이다. 인간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여기에 '형상'도 있다. 형상은 아이콘이다. 곧 보이는 차원의 하나님이다. 보이는 차원은 곧 인격적 차원이다. 하나님이 인격적 차원으로, 곧 사람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림이나 글자가 아니라, 인격이기에 그를 '아들'이라 부른다. 참 사람다움으로 하나님 다움을 드러내신 한 나신 아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사람들이 씻어난 사람들이다.
[4]
*마침내 드러나게 : 개역성경에는 '영화'로 되어 있다. 희랍어로는 '독사조'. 곧 '드러남'이다. '마침내'라는 말을 넣은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앞서 정하시고 부르신 목적이며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제 하나님 아들의 드러남에 대해서 보았다. 그 드러남은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 나타남이었고, 신음하는 창조세계가 학수고대하는 것이었다. 무엇이 마침내 드러나겠는가? 씻어난 이다! 죄에 빠져있던 사람이 씻어난 이로 이 땅에 드러나는 것. 숨님을 따라 하나님에 닿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좋음에 이르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영화다. 마침내 드러남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셨다. 부름 받은 당신은 인격으로는 아들의 형상을 닮아 하나님에 닿고, 몸으로는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넘어서 숨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창조세계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