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떄의 고난 : 굳이 '이 때'라는 말을 넣은 것은 '카이로스'때문이다. '크로노스'가 연대기적 시간, 수평적 시간, 인간의 차원이라면, 카이로스는 시간 위의 시간, 수직적 시간, 신의 차원이다. 바울은 고난이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말한다. 즉 고난은 뜻없이 닥친 어려움이 아니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할 때는 두 가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카이로스가 아닌 연대기적 시간으로 접근했을 때 발생하는 두 가지 잘못된 결론이다.
1) 과거의 고난은 현실의 의미에 지나지 않다는 의미론
2) 이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라 피할 수 미래라는 숙명론
그러니 우리가 '고난에 뜻이 있다' 말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내 뜻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시간을 넘어선 존재, '과거-현재-미래'의 도식에 걸리지 않는, 모든 시간의 차원이 현재처럼 생생한 이가 말씀하시는 뜻이다. 그 분은 과거 사건을 그저 의미에 지나지 않다고 말씀하지 않는다.(그렇다면 그저 '의미'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죽일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또한 오히려 연대기적 시간에서 파생된 숙명('죄, 삐뚤어짐'이라 부른다)을 깨뜨리시는 분이다.
로마에 있는 예수 공동체를 비롯해서, 뭇 수많은 예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지금 이 때'까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로마는 박해의 잔혹함과 규모에 있어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네로를 시작으로 약 250년에 걸쳐 300만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에 지나지 않나? 가상현실에서도 의미를 얻는다. 그러나 그들의 고난은 실제 사건이요, 역사였다. 그렇다면 이것이 그들의 숙명이었나? 아니다. 그들의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야 합당하다. "그들은 왜 고난을 자처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3]이다.
*창조세계 : '크티시스'. 개역성경에는 '피조물'이라 번역되어 있다. 피조물이라 하면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개체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따져 말하자면 창조세계 전체가 곧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본문에서의 피조물은 곧 모든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창조세계 전체다. 참고로 '크테시스'는 '소유물'.
창조세계가 허무한 죽음에 굴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자연(自然)'이라함은 '스스로 그러함'인데, 창조세계의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살고자 한다. 사람도 그러하다. 그래서 '살고자' 욕심도 부리고, '살고자' 사람도 짜먹고, '살고자' 환경도 파괴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1) 존재의 '살고자 함'이 문제인가? 2) 살고자 택한 '방법'이 문제인가? 아니면 3) '존재' 자체가 문제일까?
1) '살고자 함'이 문제인가? 생명은 다 살고자 한다. 이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생(生)은 명(命) 받은 것이다. 살라는 이가 계시니 사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2) 그럼 살고자 택한 방법이 문제인가? 그렇다. 우리가 살고자 택한 방법은 무엇인가? 경쟁이요, 질투요, 밟고 올라섬이요, 짜먹음이다. 내가 살고자 남을 죽임이다. 이것이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잘못된 방법이다. 사람들이 '살고자 함'을 동력 삼아 세계를 온통 잘못된 수렁으로 빠뜨리는 악마적인 방법이다. 이것을 고쳐야 한다. 그럼 어떻게 고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맨 아래에서 확인)
3) 존재 자체가 문제인가? 아니.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존재는 존재만으로 가치 있다. 저 살고자 하는 이에게 왜 태어났냐고 물어선 되겠는가? 태어난 이를 죽음으로 돌아가라 말해선 되겠는가? 하나님을 넘어서 그럴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있음의 갈 길은 완전이지 없음이 아니다.
*소망 : 그렇다면, 무엇을 소망이라 말할 수 있을까? 창조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데서 해방되는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 자녀들에게 있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창조세계가 마침내 이르게 될 '영광의 자유'. 그것이 무엇인지는 뒷쪽에서 확인하시라.
*새롭게 될 것 : 개역성경에는 '구속'이라 되어 있다. 내 유년시절 추억이 가득한 휴대용 카세트가 있다. 녹음기능도 있어, 이것 저것 녹음도 많이 했다.(조성모의 '투헤븐'을 변성기 안지난 목소리로 녹음한 것이 지금도 있음) 그런데 카세트가 고장이 나서 재생이 안된다. 이 카세트에 대해 내가 바라는 것은 버리고 새것을 사는 것이 아니다. 고침이다. 제기능을 살림이다. 새롭게 함이다. 성경 용어로 말하자면 곧 '구속'이다.
인간과 세계를 보라. 새로워질 수 있을 것 같은가? 많은 이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것이다. 그러나 조금도 새로워질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변화와 갱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어떨까? 그것을 소망이라 부를만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보았다. 나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보았다. 사람과 세계의 새로워짐의 소망을 한 사람의 삶과 죽음과 살아남과 그 몸의 새로워짐에서 보았다. 게다가 이것은 이 소망은 가능성으로 말하지 않는다. 구약이 줄곧 가리키고 있던 약속이었다. 약속에 대한 합당한 태도는 믿음이다. 곧 확실함이다. 가능성으로 치면 100%다. 그 100%의 가능성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던 인간이 새롭게 될 것이다. 인간만 새롭게 되지 않을 것이다. 창조세계 전체가 새롭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다. 모두가 들을 만한 기쁜 소식이다.
[2]
*신음, 산고의 고통 : 바울은 지금 머리속에 출산의 그림을 떠올리고 있다. 죽지 않기 위해서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죽이고,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아파하는. 이 잘못된 방식으로 생을 추구하는 사람과 세계는 지금 신음하고 아파한다. 이 앞에서 '아파야 청춘이지'라고 말하면 안된다. 따귀 맞는다. 지금 세계는 청춘이 아니라 출산 직전의 산모니까.
그럼 죽음에 신음하는 인간과 세계를 통해서 출산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숨결을 받은 우리의 몸이 새롭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런데 다시 [1]로 돌아가 확인해보라. 창조세계가 고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들 나타나는 것이다. 그 자녀들은 썩을 몸이 아닌 완전한 몸, 새로운 몸, 더이상 죽음과 상관없는 몸을 가진 자녀들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냥 그 자녀들에게만 좋은 일이라면 창조세계 전체가 이것을 기다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창조세계가 하나님 자녀 나타남을 고대하는 이유는 사람의 부활이 곧 창조 세계 전체가 새로워지는 시작이기 떄문이다. 우리 몸이 새롭게 되는 그 날이, 창조세계가 허무한 죽음에 굴복하는 날의 마침이기 때문이다. 요한의 글을 통해 우리의 전통속에서 이 단어로 이것을 표현해왔다. "새 하늘과 새 땅" 하늘은 하나님의 차원이요, 땅은 인간의 차원이다. 곧 전체다. 그런데 그 하늘과 땅이 새로워진다. 곧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소멸과 없음이 아니다. 완성과 완전이다.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요한계시록 21:1
[3]
당신은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가? 당신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이고,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세계도 사람도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로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워질 것이다. 죄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만든 것이니 모든 죄와 악은 소멸될 것이다.(성경은 '악의 진원지'을 '바다'에 묘사한다. 이스라엘을 가로 막는 홍해, 요나가 던져진 바다, 계시록의 괴물들은 바다 위에서 올라온다) 마치 금을 뽑아내는 것처럼, 모든 불순물들은 뜨거운 사랑의 열기에 소멸되고, 하나님과 사람과 세계가 남을 것이다.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몸을 가지고.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소망이다. 이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신을 사람답게 한다. 사람다움은 무엇인가? 소망을 붙듬이다. 동물은 미래를 소망하지 않는다.어떤 소망을 붙들었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사람인 당신, 무엇을 붙잡았는가? 제대로 붙잡았다면, 견디고 있는가? 견디고 있다면, 기쁘게 견디고 있는가? 그럼 당신에게도 참소망이다.